1. 키츠와 셸리
“날씨가 따뜻한 이탈리아 로마에 가세요.”
1820년 8월 어느날 영국의 천재 시인 존 키츠(1795~1821)는 병원에서 의사로부터 로마에 가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건강이 나빴다. 심각한 결핵으로 고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 차례 많은 양의 피를 쏟아내기도 했다. 런던에서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휴양을 하고 있었지만 건강은 좀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때 치료하던 의사가 색다른 제안을 했다. 이탈리아로 가라는 것이었다.
“런던은 날씨 변덕이 심하고 추운 데다 비가 많이 와서 결핵 환자들이 살기에는 좋지 않아요. 로마는 항상 따뜻하잖아요? 그곳에 가면 건강이 좋아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키츠는 의사의 말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도 런던 날씨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8월이지만, 어떤 날은 기온이 25~26도를 오르내리다가 다음날은 15~16도로 뚝 떨어지기도 했다. 게다가 해가 화창하게 비치는 날은 드물고 비가 자주 내렸다. 그래서 키츠 같은 결핵 환자들에게는 런던이 그다지 살기 좋은 도시가 아니었다.
친구들, 이탈리아에 가야겠네. 의사도 그곳에 가야 건강이 좋아진다고 하고, 나도 이탈리아에 한 번 가 보고 싶네."
“그렇게 하게. 그럼 어느 도시에 갈 생각인가?”
“퍼시 셸리가 살고 있는 피사는 어떨까?”
“그것도 괜찮겠지만, 그보다는 의사가 많은 로마가 치료를 받기에는 더 좋지 않을까?”
“그렇겠군. 그럼 로마로 가도록 하지.”
키츠의 친구인 화가 조셉 세번이 로마까지 함께 가기로 했다. 두 사람을 태운 배는 9월에 런던을 출발했다. 10월 이전에는 로마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키츠와 세번의 생각이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키츠의 로마행은 그의 죽음을 재촉한 꼴이 되고 말았다.
키츠의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이탈리아로 가던 도중 폭풍우가 연이어 몰아쳐 일정이 계속 지연됐다. 게다가 배가 출항할 당시 영국에 전염병이 나돌았는데, 이 때문에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철저한 위생 검역을 받느라 배가 더 정박하게 됐다. 결국 키츠는 예정보다 훨씬 늦은 11월에 로마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는 로마의 기온이 크게 떨어져 쌀쌀해진 상태였다.
“여기나 런던이나 쌀쌀하기는 마찬가지군. 결핵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는 날씨 같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오지 말 것을 그랬어.”
“그래도 여기는 런던처럼 비는 많이 내리지 않는다고 하네. 따뜻한 방안에서 푹 쉬면 몸이 나아질 걸세.”
키츠는 스페인 광장의 스페인 계단 옆에 붙은 집을 구했다. 세번은 친구를 살리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헌신적으로 간호했다. 그들을 따라갔던 영국인 의사 제임스 클라크도 최선을 다해 치료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키츠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악화될 뿐이었다. 로마에서도 매일 적지 않은 양의 피를 쏟아냈다. 결국 그는 로마에 도착한 지 석 달 만인 1821년 2월 23일 26세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당시만 해도 키츠가 누군지 잘 몰랐던 로마 시청 측에서는 “전염병 환자가 죽은 집”이라며 집에 있는 모든 가구는 물론 벽지까지 다 불태웠다고 한다.
키츠는 로마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는 죽기 직전 친구 세 번에게 “묘지에 이름을 적지 말아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세번은 친구의 뜻에 따라 묘비에 ‘여기 물에 이름을 적은 한 사람이 누워있다’라고만 새겼다. 여기서 물이란 스페인 광장에 있는 ‘난파선 분수’를 뜻한다고 한다.
키츠보다 세 살 많았던 또 다른 영국의 천재 시인 퍼시 셸리(1792~1822)는 그때 이탈리아 피사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동생처럼 생각하던 키츠가 안타깝게 요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나중에 키츠를 위해 <아도네이스>라는 애도 시집을 펴내 깊은 슬픔의 뜻을 표시하기도 했다.
셸리도 그다지 오래 살지 못했다. 그는 키츠가 죽은 다음해인 1822년 7월 8일 배를 타고 가다 갑작스런 폭풍을 만나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익사하고 말았다. 그는 죽기 전에 “유령을 만났는데 나의 죽음을 예고했다”고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당시 의기소침해 있던 셸리가 자살했다고 주장한다.
셸리의 시체는 며칠 뒤 해변에서 발견됐다. 이탈리아 검역당국은 위생을 이유로 그의 시신을 강제로 화장했다. 유해는 로마의 공동묘지로 옮겨져 키츠 묘지 근처에 묻혔다.
2. 로버트 존슨
1903년, 이탈리아 로마를 여행하던 미국 시인 로버트 언더우드 존슨은 스페인 광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는 광장의 언덕에 있던 트리니타 데이 몬티 교회를 둘러본 뒤 스페인 계단을 천천히 내려왔다. 당시만 해도 외국 관광객이 드물던 시절이라 계단에는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존슨은 1800년대 후반 미국에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잡지 <더 센츄리 매거진> 편집국장으로 일했고,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 창설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존슨은 우연히 계단 오른쪽에 붙은 집 한 채를 쳐다보게 됐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강렬한 느낌이 그 집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키츠가 생을 마감한 곳이라는 놀라운 이야기를 해줬다. 그는 더욱 흥미가 커져 집 앞으로 다가가 차분하게 문을 두들겼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미국인 제임스 월콧 헤이즐허스트와 그의 어머니였다. 두 사람은 그 집에서 세입자로 살고 있었다. 당시 집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 사람이 살고 있나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였다.
충격적인 사실을 확인한 존슨은 곧바로 로마에 사는 미국인 및 영국인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그중 한 명은 영국 시인이자 외교관인 레넬 로드였다. 그는 공동묘지에 있던 키츠와 셸리의 무덤이 없어지게 됐다는 사실을 알고 백방으로 뛰어다녀 묘지를 구해낸 전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또 노먼 햅굿, 애그니스 리플리어, 제임스 허버트 모스, 해리 넬슨 게이 등 시와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참석했다.
존슨은 스페인 광장에서 봤던 키츠의 집과 그 집의 끔찍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는 시인 키츠와 셸리가 로마에서 푸대접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탄했다. 그는 키츠의 집을 사서 기념관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유명한 시인이었던 키츠가 생을 마감했던 집을 그대로 놔두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우리가 돈을 모아 집을 사서 기념관으로 바꿉시다. 그러기 위해 먼저 키츠-셸리 기념협회를 만든 뒤 모금 활동을 벌이는 게 어떨까요?”
“좋아요. 키츠와 셸리를 좋아하는 친구들을 모아서 이탈리아, 미국, 영국에 각각 지부를 두고 활동합시다. 1~2년만 움직이면 집을 사서 수리할 비용 정도는 모으지 않겠어요?”
친구들은 존슨의 생각에 모두 흔쾌히 뜻을 같이 했다. 그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키츠&셸리기념협회’를 만든 뒤 역할을 분담해 집 구입비용을 구하러 열심히 뛰어다녔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에드워드 7세 국왕도 이 소식을 듣고 큰 관심을 보이며 자금을 지원했다.
존슨과 친구들의 노력은 결국 3년 만에 열매를 맺었다. 이들은 1906년 12월 30일 모금한 돈 1만 4천 달러와 은행 대출금 8천 달러를 주고 집을 샀다. 대대적인 수리를 마친 집은 ‘키츠&셸리 기념관’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셸리는 이 집에서 살지 않았지만, 키츠의 절친한 친구인데다 키츠와 같은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는 점에 착안해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기념관 헌정식은 1909년 4월 3일 유럽의 많은 유명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당시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도 참가해 행사를 직접 진행했다.
이후부터 키츠&셸리 기념관은 키츠&셸리기념협회가 관리하게 됐다. 기념관은 키츠, 셸리와 관련된 여러 자료들을 보관, 전시하고 있다. 또 바이런, 워즈워드, 로버트 브라우닝, 오스카 와일드 등 유명 시인들의 작품과 그림도 다수 소장하고 있다. 기념협회는 키츠와 셸리의 무덤도 관리하고 있다. 매년 6월에는 키츠와 셸리의 문학적 업적을 널리 홍보하자는 취지에서 ‘키츠&셸리 프라이즈’라는 문학상 공모 행사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