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피눈물로 지은 로마 티투스 개선문

by leo

제262대 교황인 바오로 4세는 정말 뜻하지 않게 교황 자리에 앉았다. 전임자였던 마르첼로 2세가 교황이 된 지 한 달 만에 급서하는 바람에 기회가 돌아온 것이었다.


바오로 4세가 교황이 되자 다들 놀라워하면서, 교황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했다.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그가 아주 완고한 데다 남과 대화할 줄 모르는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교황이면서도 종교보다는 조국에 대한 충성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특이한 인물이었다.


특히 교황으로 취임했을 때 그의 나이는 무려 79세였다. 전임 교황이 병으로 급서하는 모습을 본 교황청 관계자들이 바오로 4세에 대해 ‘언제 큰일을 당할지’라고 생각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그도 마르첼로 2세가 숨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자신이 교황 자리에 앉으리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우스운 것이어서, 아무리 어부지리로 교황이 됐다고 하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재수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뜨악해 하면 기분이 나쁜 게 인지상정. 바오로 4세도 그랬다. 그는 1555년 5월 23일 취임한 이후 늘 마음이 불편했다.


‘교황 자리 주인은 하느님이 결정하는 것이거늘 저 신앙심 얕은 자들이 나를 우습게 여긴단 말이지. 어디 두고 보자. 그냥 두지 않겠다.’


바오로 4세는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7월 첫날 이벤트를 하나 펼치기로 했다. 교황청 관계자들은 물론 로마의 모든 시민이 포로 로마노에 모여 교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면서 티투스 개선문 아래로 지나가는 퍼레이드를 열자는 것이었다.


“한 사람도 빠져서는 안 된다. 티투스 개선문을 지나면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교황청에 대한 지지를 서약하고, 교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라. 누가 진실로 맹세를 하는지, 입으로만 서약을 하는지 나는 물론 하느님이 지켜볼 것이다.”


교황청 관계자들은 바오로 4세의 지시에 어이없어 했다. 하지만 교황청의 최고 책임자이며 하느님의 대리인인 교황의 말을 아무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들은 교황이 시킨 대로 로마 곳곳에 행사를 알리는 방을 붙였다.


‘7월 첫날 모든 로마 시민은 티투스 개선문 밑을 한 번씩 지나가야 한다. 그곳에서 하느님과 교황 성하께 충성을 서약해야 한다. 만약 불참하는 자에게는 파문은 물론 여러 가지 무거운 형벌이 내려질 것이다.’


바오로 4세는 행사가 진행되던 날에 포로 로마노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카피톨리노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수많은 신도들과 로마 시민들이 티투스 개선문을 지나가는 모습을 빠짐없이 관찰했다. 또 티투스 개선문 옆에 측근을 보내 사람들이 단순히 그냥 지나가는지, 아니면 정말 신심을 갖고 성실한 자세로 지나가는지를 일일이 점검하도록 했다.


개선문을 끊임없이 바라보던 바오로 4세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옆에 서 있던 안테로 추기경을 불렀다.


“추기경, 그런데 말이오. 혹시 오늘 행사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 건 아니오?”


안테로 추기경은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바오로 4세의 질문이 무슨 뜻인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만약 행사 불참자가 있다면 큰 벌을 내릴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교황의 최측근이었던 그는 사실을 숨기고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일부 불참자가 있습니다.”


“불참자가 있다고? 그게 대체 누구지?”


“기독교 신도들은 아니고, 바로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입니다.”


“몇 명이나 참석하지 않았는가?”


“로마의 유대인이 3천 명가량 됩니다. 오늘 행사에는 한 명도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실 로마의 유대인들이 티투스 개선문 행진을 거부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과거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아픈 역사 때문이었다.


티투스 개선문을 만든 사람은 고대 로마의 도미티니아누스 황제였다. 그는 형 티투스가 이스라엘 유대인 무장반란을 진압한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개선문을 만들었다.


티투스가 지휘한 로마군이 학살한 유대인은 자그마치 60만~100만 명이었다. 예루살렘은 벽 하나만 남기고 완전히 폐허가 됐다. 그 유명한 ‘통곡의 벽’이었다. 이후 유대인들은 고향에서 쫓겨나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됐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조상을 대량 학살하고 전 세계로 떠돌게 만든 사람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건축물 아래로 지나갈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바오로 4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벌개졌고,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안테로 추기경은 괜히 사실대로 이야기했나, 싶었다. 교황은 다시 고개를 돌려 티투스 개선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가슴 속에는 유대인에 대한 적개심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바오로 4세는 며칠 뒤 안테로 추기경을 집무실로 조용히 불렀다. 추기경은 연락을 받자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한 채 서둘러 교황청으로 들어갔다. 교황은 며칠 전 포로 로마노에서 화를 낼 때보다는 표정이 누그러져 있었다.


“추기경, 어서 오시오. 며칠 동안 유대인들에 대해 생각해봤는데 말이오. 티투스 개선문 행사에 참석하지 않은 저 더러운 유대인들 말이오.”


‘…’


안테로 추기경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교황의 생각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괜히 말을 잘못 꺼냈다가는 일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추기경이 유대인 대표를 한 번 만나보시오. 그래서 이렇게 말을 전하도록 하오. 교황이 지난번 행사에 불참한 것은 불문에 부치겠다고 하신다. 용서의 기회를 주는 뜻에서 다음 달 한 번 더 유대인만을 모아놓고 행사를 할 터이니 꼭 참석하라고 요구하시오.”


안테로 추기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교황의 집무실에서 빠져 나왔다. 그의 머릿속은 얽힌 실타래처럼 복잡했다. 사실 유대인 대표들을 만나봐야 답은 뻔한 것이었다.


‘고집 센 유대인들이 교황의 요구를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그들은 죽더라도 고개를 숙이지는 않겠지. 결국 로마에 피바람이 불 수 밖에 없는 것인가?’


안테로 추기경은 다음날 아침 날이 밝자 유대인 대표들을 사무실로 불렀다. 그리고 교황의 요구 사항과 그의 생각을 설명했다.


“비바람은 피해 가시오. 목숨은 일단 건져놓고 볼 일이 아니오?”


유대인들은 그렇게는 할 수 없다며 완강히 버텼다. 그는 할 수 없이 바로 교황을 찾아가 유대인들의 답변을 있는 그대로 전했다. 교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굳은 표정으로 나가라는 손짓만 했다.


며칠 뒤, 바오로 4세는 로마 교황청의 모든 성직자를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그의 표정은 오래 전부터 신들에게 제사 드리는 것을 잊어버리고 오만방탕에 빠진 인간들에게 대홍수라는 벌을 내려주려고 다짐한 제우스의 얼굴처럼 굳어 보였다. 그는 측근에게 두루마리를 건네주고 읽도록 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잘못 때문에 신으로부터 영원한 노예의 벌을 받은 존재다. 그들은 로마에서 기독교에 감사하기는커녕 그들이 우월하다고 뻔뻔하게 우긴다. 앞으로 모든 유대인들은 산탄젤로 인근 테베레 강변의 담장으로 둘러싸인 곳에 모여 살아야 한다. 밤이 되면 문을 잠가 아무도 오갈 수 없다. 유대인들은 앞으로 재산을 소유할 수 없다. 유대인이라는 걸 구별할 수 있도록 남자들은 노란색 표식이 있는 모자를 쓰고 다니도록 하라. 여자들은 가슴에 노란색 배지를 달아야 한다. 만약 칙령을 어기는 유대인들은 강력한 처벌을 받게 될 것임을 명심하라. 또 유대인들에게 쓸 데 없는 관용을 베푸는 로마 시민, 기독교도, 성직자들도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교황의 지시에 따라 다음날부터 산탄젤로 지역 인근 테베레 강변에 유대인들이 집단 거주할 시설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곳에 ‘쓰레기', '찌꺼기’라는 뜻의 이탈리아어인 ‘게토’라는 이름을 붙였다. 게토를 설계한 건축가는 지오반니 살루스티오 페루지였다.


30여 년 전 베니스에 처음 게토가 생긴 데 이어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로 로마에 게토가 완성되자 유대인 3천여 명이 가족끼리 손에 손을 잡고 집단 이주를 시작했다. 그들은 과거 로마군에 대량학살당한 뒤 이스라엘을 떠나 외국으로 떠돌아다녀야 했던 조상들처럼 그들 앞에 기다리는 길고 험난한 운명의 어두운 그림자를 느끼며 게토 안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유대인들은 이후 300여 년 동안 게토에서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아야 했다. 게토가 세워진 곳은 해마다 홍수로 많은 재산과 인명 피해가 나던 곳이었다. 또 로마에서 가장 지저분해서 위생에 문제가 많아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다.


유대인들은 해마다 거주비를 교황청에 지불해야 했다. 또 매년 티투스 개선문에 강제로 끌려가 교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면서 개선문 아래를 지나가야 했다. 그러면서 큰소리로 이렇게 외쳐야 했다.


“교황의 자비 덕분에 우리는 로마에서 살 수 있게 됐다. 교황 성하, 감사합니다. 영원히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유대교 지도자인 랍비는 해마다 카피톨리노 언덕에 올라가 교황 등 교황청 관계자 및 로마 지도자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엉덩이를 한 번씩 걷어차였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세 가지 임무를 완수하면 게토에서 1년 더 살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1789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가 로마를 점령하고 교황을 발아래에 뒀을 때, 그는 유대인들이 게토에서 나올 수 있게 했다. 하지만 그가 실각하자마자 교황청은 다시 유대인들을 게토로 돌아가게 했다. 교황청은 1870년 이탈리아 왕국에 흡수되자 게토 해체를 선언했다. 그러나 로마의 게토는 그 이후에도 ‘유럽의 마지막 게토’로 남아 있다가 1930년에야 완전히 없어졌다. 

forum-romanum-883849.jpg

티투스 개선문은 1948년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뜻밖에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먼저 이해에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유명한 유대인 랍비가 이탈리아 유대인들을 티투스 개선문에 모이게 했다. 그는 유대인들을 이끌고 고대 로마에서 개선식이 열렸을 때 병사들이 개선문을 지나간 방향과 반대쪽으로 해서 개선문 밑을 행진했다. 과거 유대인 역사의 치욕을 씻어내고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귀환을 상징하는 행사였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 정부였다. 새로 창설된 이스라엘 정부는 국가의 상징인 ‘국장’을 만들기 위해 디자인 공모전을 실시했다. 이때 메노라가 들어간 디자인이 1등으로 당선됐다. 메노라는 성경에 나오는 가지가 7개인 촛대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은 과거에 사용됐던 메노라가 정확히 어떤 모양이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이때 결정적인 힌트를 제공하는 단서가 발견됐다. 바로 티투스 개선문 부조였다.


티투스 개선문의 여러 부조 중 하나에 옛 이스라엘 유대인 탄압에 대한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가 진압당한 유대인들이 노예가 돼 로마로 끌려오는 장면이다. 놀랍게도 이스라엘이 이 부조에 메노라가 등장하는 것이다. 베스파니아누스와 티투스 황제가 유대인 노예들로 하여금 전리품을 운반하게 하는데 그중 하나가 가지 7개를 뚜렷하게 새긴 메노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