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회화가 시작되는 순간
안녕하세요. 이남일 도슨트입니다.
제가 진행하는 네덜란드·벨기에 예술 기행 일정에서 안트베르펜과 함께 반드시 방문하는 도시가 바로 겐트입니다.
이번 글은 많은 분들에게는 조금 낯설 수 있는 이 도시를 소개하고, 왜 제가 겐트를 일정에 포함시키는지 설명해보고 싶어서 쓰게 되었습니다.
벨기에 여행을 떠올리면 대부분 브뤼헤를 먼저 생각하지만, 미술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플랑드르 회화의 출발점에 가장 가까운 도시는 오히려 겐트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이 여정에서는 겐트 제단화가 있는 성바보성당을 중심으로 미술관 투어가 구성됩니다.
겐트는 중세 유럽에서 가장 부유했던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북해로 이어지는 수로와 섬유 무역을 기반으로 성장했고, 한때는 파리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고 기록될 만큼 경제력이 강했던 곳입니다. 오늘날의 겐트는 관광지라기보다는 대학 도시이자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도시의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지만, 중심부에 들어서면 중세 상업 도시의 구조가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운하와 길드 하우스, 성당과 광장이 서로 멀지 않은 거리 안에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어 도시 전체가 하나의 역사 공간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걸어보면 주요 방문 장소들이 가까이 붙어 있어, 왜 이 도시가 시민 중심의 상업 도시였는지를 몸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 위에서 겐트에서는 북유럽 예술의 흐름을 바꾼 거대한 예술 프로젝트가 탄생합니다. 바로 얀 반 에이크 형제가 제작한 겐트 제단화입니다.
겐트 중심에 위치한 성바보성당은 겉보기에는 전형적인 고딕 성당처럼 보이지만, 내부에는 북유럽 회화의 기준을 완전히 바꿔놓은 작품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신비한 어린 양의 제배’, 즉 겐트 제단화는 유화 기법이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상징적인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일반적인 제단화가 종교 이야기를 단순히 묘사하는 데 머무른다면, 겐트 제단화는 성경의 세계를 하나의 구조로 정리해 관람자가 이해하도록 설계된 작품에 가깝습니다.
제단화는 절기에 따라 열리고 닫히도록 만들어져 있으며, 닫혀 있을 때와 펼쳐졌을 때 서로 다른 세계가 등장합니다. 인간의 세계와 하늘의 세계가 단계적으로 이어지고, 중앙 패널에서 피를 흘리는 어린 양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합니다. 그 주변으로 모여드는 인물들은 구원을 향한 인류 전체를 의미합니다.
이 작품을 주문한 후원자는 겐트의 상인이자 도시 행정관이었던 요도쿠스 페이트였습니다.
그는 신앙적 헌신뿐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경제적 힘을 동시에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당시에는 교회에 대한 후원과 기부가 영혼의 구원과 연결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겐트 제단화는 신앙과 현실 세계가 만나는 상징적인 결과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성바보성당에서 이 작품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명화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왜 이런 작품이 이 도시에서 탄생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경험에 가깝습니다.
겐트를 먼저 천천히 걸어보고 성당 안으로 들어가 제단화를 마주하면 작품이 훨씬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많은 분들이 놓치고 지나가지만, 성당 내부에는 루벤스의 작품도 함께 남아 있어 플랑드르 미술의 흐름을 한 공간 안에서 이어서 볼 수 있다는 점 역시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현재 성바보성당은 무료로 방문할 수 있지만, 겐트 제단화 관람 구역은 별도의 티켓으로 운영됩니다.
성수기에는 대기 시간이 생기기도 하기 때문에 저는 관람객이 비교적 적은 시간대를 선택해 방문합니다. 제단화를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멀리서 한 번 바라보고 지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접히는 구조로 이루어진 작품이기 때문에 각 패널에는 모두 의미가 있으며, 인물의 시선과 빛의 방향, 보석과 직물의 표현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작품이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현장에서는 이러한 관람 방식 자체를 함께 설명해드리고 있습니다.
가까이에서 보면 피부의 질감, 금속의 반사, 유리의 투명함까지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바로 이러한 사실성이 얀 반 에이크가 회화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이유입니다. 최근 복원 작업을 통해 드러난 변화와 숨겨진 이야기 역시 현장에서 함께 나누는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겐트 성바보성당은 단순히 유명 작품 하나가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중세 상업 도시 시민들이 예술을 통해 신앙과 자신의 힘을 표현한 공간이자, 북유럽 르네상스 회화가 시작된 현장이며, 브라반트 고딕 건축과 회화가 하나의 무대처럼 결합된 드문 사례입니다. 벨기에의 예술적 유산 가운데서도 특히 중요한 장소로 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많은 여행 일정에서는 겐트를 짧게 지나가지만, 실제로 이곳은 유럽 회화의 시작점을 직접 마주하는 장소라고 해도 과장이 아닙니다.
작품을 단순히 ‘봤다’는 기억과, 도시와 역사 속에서 작품을 이해했다는 경험은 분명히 다르게 남습니다.
제가 진행하는 네덜란드·벨기에 예술 기행에서는 얀 반 에이크 형제의 겐트 제단화를 충분한 시간 동안 해설과 함께 관람하며, 도시와 예술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도록 구성하고 있습니다.
유럽 미술 중심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겐트 성바보성당과 겐트 제단화는 왜 반드시 일정에 포함되어야 하는지, 직접 방문해보는 순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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