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
엄마가 말했다. 지루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게 지금 엄마의 삶이라고. 주변 지인들의 안 좋은 소식을 많이 접한 최근에는 부쩍 이런 얘기를 많이 한다. 벚꽃이 이쁘게 핀 봄날 엄마와 강변에 나와 벚꽃 구경을 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그날도 엄마는 만개한 벚꽃에 집중할 수 없었다. 10분만 걸으면 올 거리를 이제는 차 없이는 나올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매일같이 산책을 하러 나오던 이곳을 이제는 혼자 힘으로는 나올 수 없었다. 바로 앞 시장도, 강변도, 뒷산도 어디 하나 마음껏 다닐 수 없었다. 매일 새벽 버스를 타고 출근하던 엄마는 이제 버스 계단을 올라가지 못해 버스는 이용할 수 없다. 택시비가 아까워 평생 버스를 이용했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택시를 이용한다. 주변 환경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변한 것은 늙어버린 몸이었다. '내가 언제 이렇게 늙어버렸지'라며 한숨을 쉬는 엄마다. '나이가 이제 80인데 어떻게 예전하고 똑같아'라며 핀잔과 위로를 동시 준다.
내 나이 30대 초반 아빠가 암에 걸리셨다. 이미 한차례 수술방에 들어가셨다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긴급하게 수술을 중단하고 나온 전력이 있어 아버지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벼운 시술과 약물치료였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한 암이라 전의가 되지 않아 절제만 하면 되는 문제였지만, 우리는 선뜻 수술을 권하지 못했다. 수술을 하지 못해 말 그대로 죽을 날만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사이 갑작스러운 쇼크로 몇 번의 생사를 오가셨다. 죽을뻔한 아빠는 몇 번이고 다시 살아나셨다. 그 시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좌절했었다. 이사를 해야 했던 우리 부부는 생애 첫 아파트를 매매했다. 하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 혼자 거실 창밖을 보며 눈물 흘리는 날이 많았다. 마냥 슬픈 나날이었다. 아빠는 더 이상 치료할 수 없어 퇴원을 하셨고 집에서 생활하셨다. 가족들이 모두 모인 집들이에서 아버지는 집이 참 넓고 좋다며 축하해 주셨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자주 쓰러지시면서 결국 요양병원으로 가시게 되었다.
다인실이었던 요양병원은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 있기에는 힘든 곳이었다. 대소변을 못 가리는 사람들 옆에서 식사를 해야 하고 잠도 편하게 잘 수 없었다. 아빠의 건강도 악화가 되기 시작했다. 마약성 진통제로 버티며 아픔은 덜해졌지만 병문안을 갈 때면 영영 이제 집에 못 간다며 아빠는 눈물을 보이셨다. 암진단부터 아버지와 병원을 다니면서 나는 애써 눈물을 참는 연습을 했다. 슬프지 않은 척 담담한 척 그리고 돌아와서는 한참을 울었다. 아마 아빠는 내가 몰래 울고 온 것을 눈치챘을 거다. '아빠는 오늘 점심은 뭐 먹을까? 내가 살게'라며 웃으셨다. 그때 당시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건 맛있는 음식을 같이 먹는 것과 함께 있어드리는 것 정도였다. 요양병원에 가시는 걸 반대했던 나는 엄마와 언니가 미웠다. 그때까지도 일을 다니셨던 엄마는 더욱 미웠다. 결국 엄마는 아빠의 마지막 병원비까지 모두 본인의 힘으로 해결하셨다.
그 시기 아빠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은 우리 모두 달랐다. 70대 배우자인 엄마와 40대 후반의 첫째 딸, 30대 초반의 둘째 딸 우리는 서로 다르게 죽음에 대처했다. 그야말로 불협화음이었다. 마냥 슬프기만 했던 나와 달리 엄마는 죽음을 받아들이는데 담담했다. 담당의사의 연명치료 얘기에 바로 하지 않겠다고 대답한 엄마를 바라보며 나는 너무 무섭고 미웠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엄마는 딸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아버지의 물건을 다 처분하셨다. 냉정한 엄마였다. 우리 가족은 저마다의 슬픔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그랬던 엄마가 자신의 죽음은 냉정하지 못하다. 갑자기 슬펐다가 갑자기 괜찮았다가를 반복했다. 어느 날은 아빠가 꿈에 나왔다며 아침 일찍 울면서 전화를 한 날도 있었다. 나는 그런 엄마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 아빠는 요양병원에 보내놓고 엄마는 가기 싫으냐고 직접적으로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는 배우자로써 엄마로서의 생각은 자식에게 피해를 안주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고 한다. 지금 보면 엄마가 아빠의 대소변을 보면서 곁에 있었다고 무언가 달라지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5년 전만 해도 나는 그런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는 엄마도 아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얘기한다. 정작 자신이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다고 생각하니 너무 무섭다고 했다. 귀신도 무섭지 않을 나이인 엄마는 지금 죽음이 가장 무섭다. '자식들 고생시키지 않고 자다가 가야 하는데..'라며 나를 화나게 만드는 말을 하는 엄마에게 나는 '그런 소리 좀 그만해! 죽는 게 사람 마음대로 되겠어'라며 짜증을 낸다.
선행학습을 해본 나는 보다 냉정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어떤 방법이 엄마를 위하고 나를 위한 일인가 냉정하게 생각해 보고 엄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엄마는 어떻게 하고 싶은지 차근차근 물어본다. 우리 사이의 대화주제는 벚꽃이 아니라 죽음이다. 건강하게 오래 사시는 것이 모두의 소원이지만 나는 혹여모를 일에 늘 대비해야 한다. 엄마도 혼자 남을 나를 위해 오늘도 열심히 병원을 가고 운동을 하고, 치매예방을 위한 색칠공부에 열심히다. 엄마는 무서운 죽음을 앞두고 혼자 남을 나를 걱정한다. '언니랑 사이라도 좋았으면 덜 걱정될 텐데..'라며 또 내 걱정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남편이 말을 거든다. '어머니 제가 있는데 왜 혼자예요'라고..
우리들의 몇 번의 꽃놀이가 남았을지 몰라 나는 오늘도 엄마 사진을 몰래 찍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