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까칠합니다.
주변 정리가 되고 나니 나의 삶은 더 심플해졌다.
그 무렵 생애 첫 아파트를 얻게 되었다. 아이가 없는 집은 늘 깔끔했지만 마음은 황량한 느낌이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이 질수록 책이 늘고 취미가 늘어났다. 무엇이라도 해보려는 나의 꼼지락 거림은
안에서 분주했다. 하지만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한심했을 것이다.
남편이 대기업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돌봐줄 아이도 없는데 젊은 나이에 집에만 있는 나의 모습을 좋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친정엄마 말고는.
몸이 안 좋긴 했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도 아니고 관찰을 해야 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오히려 움직는게 더 좋다며 아르바이트라도 해보라는 권유를 주변에서 해왔다.
'애도 안 낳고 돈도 안 버는 며느리가 꼴 보기 싫겠지'라며 남편에게 투정도 부렸다.
그리고 팔자가 좋아서 집에서 놀고먹는 나를 보기 싫어하는 사람은 시어머니만은 아니었다.
엄마를 제외한 가족들이 다들 나만 보면 자꾸 살만 찌는 나를 채찍질했다.
10년이 다되도록 집에서만 있다 보니 꽃다웠던 나는 어느덧 30대 중반이 되었고 경단녀가 된 현실에서 밥만 하던 내가 갑자기 뭘 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나이 제한에 걸리는 아르바이트가 많은 데다가 결혼 전 아르바이트 경험이 전무했기에 남들 다 한다는 서빙도 자신이 없었다. 그야말로 사회에서 무쓸모가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의지도 바닥인 데다가 경험도 없으니 자신감도 없는 나는 점점 더 집밥에 집착했다. 그거라도 해야 나의 쓸모가 증명되는 것 같았다. 이 집에서 내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열심히 집안일을 잘 해내고 밥도 잘하는 주부여야만 했다.
본래 식탐이 없는 남편은 진수성찬이 주어져도 별 감흥이 없는 사람이었다. 한 끼를 해결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지만 나의 열성에 맞춰주느라 꽤 고생을 했다. 주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10년이란 긴 시간 동안 나한테 일을 해보지 않겠냐는 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언젠가 때가 되면, 네가 하고 싶으면 하면 된다고 말해주는 고마운 남편이었다. 직장에서 만나 4년의 연애를 한 남편은 누구보다 나의 성격을 잘 아는 사람이다. 활달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고 무엇보다 일의 성취감을 알던 내가 이렇게 칩거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일인지 말이다.
몸이 안 좋아 서울까지 장거리로 병원을 다닐 때 나는 검사결과가 좋지 않으면 집으로 오지 않고 병원에서 가까운 호텔을 잡아 쉬고 다음날 내려왔다. 당황스러운 전화통화에 "알겠어. 쉬었다와"라고 하는 수화기 너머의 한숨을 나는 알지 못했다. 그때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고 비련의 여주인공이었다.
나는 나대로 나의 슬픔을 다스리기 위해 호텔에 머물렀고 남편은 그런 나를 걱정하며 집에서 잠 못 드는 밤을 지냈을 것이다.
사람마다 시련이 왔을 때 이겨내는 방법이 모두 다르다. 누군가는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몸을 만들고 건강을 챙기려고 부지런을 떨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담담한 척, 괜찮은 척했던 나였지만 사실 나의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최근 술을 한잔 하면서 남편이 나와 병원에 갔을 때 얘기를 했다.
"검사결과를 들으러 간 날 교수님이 얘기하는데 자기 표정이 완전 멘털이 나가 있었어.
그런 줄 알았으면 진작에 서울병원에 갈 때도 같이 줄걸 그랬어. 나는 자기가 그래도 담담하게 잘 받아들인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던 것 같아."
"맞아. 나도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것 같아. 담담해지려고 노력했는데 머릿속이 엉망이라 교수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못 듣고 돌아왔어. 나도 좀 그냥 기댈걸"
그때 나의 최선은 나의 슬픔을 전파하지 않는 것이었다. 스스로 괜찮다 괜찮다 외치면 괜찮아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우울증이 걸린 사람에게 가장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은 "힘내.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이다. 안 괜찮은 것을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음으로써 더 외롭고 더 힘들어진다. 쉽게 내뱉는 위로의 말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힘내고 싶지 않은데 힘내라고 하지 말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뭐라도 해보라고 응원하지 말자. 그냥 옆에서 묵묵히 지켜봐 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