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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아 May 23. 2023

욕망과 사랑의 차이

‘삼십대 초반, 돌이켜보면 여태껏 꾸준히 열정적으로 해온 것은 글쓰기도 일도 뭣도 아니고 연애였다. 그리고 연애에서 배운 것은 불 조절이 중요하다는 것, 그것 하나 깨우쳤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 내 마음은 약간 달궈진 팬이고, 나는 그 위에 뭘 올려놔야 할지 모른다. 뜨겁게 무엇인가를 만들고 싶다. 그간 여러 번 내 팬 위에서 사랑을 목격할 수 있었다. 혹은, 무대 위에서 생로병사를 겪는 사랑을 관찰할 수 있었다. 두 마리의 사랑을 어떻게 길러내고 관계 맺게 하느냐의 문제에 골몰하는 것만큼 사치스러운 일이 없다.‘

위의 문단은 올해 3월 17일에 쓴 일기의 한 부분이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연애를 통해 상대와 나와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 주변 친구 말을 빌리면 '사랑꾼'인 셈이다. 현재의 연애에 임하는 태도를 보자면 예전만큼 집요하고 성실하고 치열하지는 못한 것 같다. 내 마음은 막 달궈지기 시작한 팬이고, 건강식이면서도 새로운 맛의 요리를 준비해볼 작정이다. 아직 허기가 밀려오기 전이긴 하지만, 테이블에 앉아 요리를 기다리는 사람과, 테이블 위에 놓인 고급 술을 맛보게 될 때 느끼게 될 감각, 주고받을 대화를 기대하는 마음이 있다. 테이블에 앉은 이는, '아직 메인 디쉬는 안 나온 것 같아!' 라고 중얼거리는 듯하다. 한편으로는, 이혼은 하더라도 자식은 꼭 낳아야 한다던, 이혼한 내 부모들의 말을 떠올려볼때, 과연 나처럼 집요한 사랑꾼이 자식을 얻으면 어찌 될 것인가. 자식에 대해서도 더없이 집요하고 치열한 태도로 기록하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조금은 더 높은 차원의 사랑을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호기심이 있기도 하다.


(좌) 마릴린먼로와 아서밀러 / (우) 조니뎁과 케이트모스                                


연애란 흥미로운 실험장이다. 나는 새로운 연인이 오기 전에, 내가 바라는 연인상과, 그의 나의 관계도와, 그 관계성이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을 구체적으로 떠올려보는 것을 즐긴다. 소설 작가가 캐릭터, 관계도, 장면 설정을 한 뒤, 본격 소설 쓰기 작업에 착수하면서, 작업 중에 그도 예상치 못했던 의외의 방식으로 진행되는 사건들을 맞닥뜨리게 되는 것과 흡사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작가는 소설 집필 중, 이러한 특성을 갖춘 인물과 저러한 특성을 갖춘 인물이, 운명의 이름을 빌린 작가가 짜 놓은 판에서 밀접한 관계를 맺었을 때, 그들의 내면에 어떤 반응과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지, 그들이 어떤 사건을 벌이게 되는지, 이후 그들이 어디에 다다르고 무엇을 추구하게 되는지 관찰하는 즐거움을 가장 먼저 경험한다.

알랭드롱과 로미슈나우더


이 시절 이들의 모습은 풋풋하고 장난기있다. 청춘 그 자체


이십대 시절, 많은 사람을 겪지는 않았지만 깊이 사귀면서 그들과 여러 길목들을 걸어왔다. 굽이 굽이 넘어가면서 우리가 1장에 있구나, 지금 2장으로 왔구나, 3장의 주제는 이것이로구나, 하면서 서사 구조 안에서 연인과의 관계를 관조적으로 바라봤던 것 같다. 이별을 맞이할 때에는, 상대의 미덕이 빛바랬거나, 권태기를 경험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다른 것을 추구하게 되었기 때문에, 다른 길목으로 접어들어야 할 시점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한 시절 열정을 바쳤다 한들, 미련 없이 작별할 수 있었다. 서로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음에도 헤어질 수 있으며, 이러한 이별은 비극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혼자가 된 나는 이전 연인과의 관계 속에서 눈뜬 나의 욕망에 집중한다. 그것을 힌트 삼아 내가 어떤 길을 걷고자 하는지 알아낸다. 만일 내가 다시 에너지를 회복하여, 새로운 연인의 상을 그려낸다면, 그는 당시의 내가 지향하는 인간상, 즉, 미래의 내가 갖추었으면 하는 미덕을 갖춘 사람이거나, 새로운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길에 먼저 서 있어서, 그 길을 같이 걷기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최초로 그려본 사랑의 장면을 기억한다. 많은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음 가득한 공간 속에서, 그와 나는 고요하게 시선을 나눈다. 우리는 같은 농담으로 웃고, 같은 부분에서 슬픔이나 기쁨의 감정을 느끼며, 눈빛만으로 감정을 주고받는다. 우리는 깊이 연결되어있으나 그것을 그와 나 외의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한다. 그리고 주요한 순간에, 나는 그와 함께 있게 되는데 그 때 내가 손을 뻗어 그의 얼굴 한 편을 감싸쥐면 그가 눈을 감는다. 이후에 실제로 나는 그러한 장면 속에 들어있게 되었다. 그 장면은 사랑의 시작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Nickie Zimov의 그림


당시의 나는 '영적이고 동물적인 깊은 교감'을 나눌 상대를 원했다. 집중력, 탐닉, 열정과 같은 단어들이 어울리는 사랑. 이러한 사랑은 뜨거운 눈빛과 강렬한 정서, 로맨틱한 언어를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몰입하게 하기도 하며, 서로 뒤엉키며 육체적인 쾌락에 탐닉하게 하기도 한다. 즉, 에로스적인 사랑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의 반대편은 타나토스적인 측면이기에 집착과 소유욕, 불안과 광기, 들끓는 애증의 세계이기도 하다. 달콤한 독주처럼 유해한 사랑으로, 쾌락 만큼의 고통을 겪어야했다. 여하튼 피를 뚝뚝 흘리면서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는 있었다. 나의 첫사랑은 성질머리 대단했지만, 내 친구들도 '그놈 참 섹시하긴 했지.'하고 인정하는 남자애였다. 그러니 그와 나의 이야기 속에는 예상할 수 없었고, 겪고 싶지도 않았고, 컨트롤할 수도 없었던 장면들이 많았다.

Leonardo Cremonini의 그림



한번은 남한산성에서 그와 다퉜던 적이 있었는데, 그 속에서 그와 나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치렀다.(자세히 풀진 않겠지만 심지어 소품으로 '칼'이 등장했다는 것만 알아두시라, 다행히 실제의 '피'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 그와 나와는 무관하게 하늘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짙푸른 녹음 사이로, 코발트빛 하늘에 노을의 붉음이 번져가면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배우로서 나는 불행했지만, 햇살과 하늘과 바람과 풍경이 몸을 통과하는 듯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은 오랫동안 기억되었다.

이제 내게는 사랑하는 이의 정신적 욕동을 자극시키고 싶은 욕구가 많지 않은 것 같다. 집착과 소유욕이 유난스러운 남자들과 연이 많았던 것은, 그 방식이 다소 파괴적일지라도, 강렬하고 몰입도 높은 사랑을 받고 싶은 애정결핍 때문 같기도 하다, 상대에게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일종의 정복욕, 지배욕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 지금으로써는 이른바 집밥 같은 사랑의 형태를 원하는가보다. 사랑이 전부인 마냥 죽네 사네 달려들만한 체력이 남아있지 않다. 꽃다운 나이를 뜻하는 이십대, 방년(芳年)이 가고 마음이 확고하게 기반 위에 선 삼십대, 이립(而立)이 되면 균형을 추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각자가 추구하고 바라는 바를 이뤄낼 수 있도록 돕는다던지, 적어도 존중해주면서 안정감을 얻는 관계를 지향한다. 도파민 파티보다는 세로토닌의 포근함을 바라는 것이다. 비로소 내 드라마의 장르가 바뀌어버리고 만 것인데, 청춘남녀의 멜로 드라마에서는 벗어나게(혹은 쫓겨나게) 되었을지도.

현재의 연인을 만나기 전에도 물론 사랑의 상을 그려봤다. 이번에는 구체적인 장면의 형태는 아니었다. 어느 깊은 밤, 선잠 속에서 나는 이러한 질문을 던져 보았다. '그렇다면 욕망과 사랑의 차이가 대체 뭐야. 욕망 그 자체가 사랑인 거야? 결국 성욕이 사랑인 거야? 그렇지 않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정말로 그것이 전부라면, 연인 간의 사랑이란 지나치게 가변적이고 연약한 것 아니야? 사랑에 대한 개념은 결국 환상인 걸까?' 그런데 잠 속을 헤매는 내 귓가에 이러한 목소리가 들렸다.



"욕망은 내 몸 안에 묶여있고,  사랑은 내 몸 밖으로 흘러나가는 거야."



잠에서 깬 채 나는 그 문장을 메모해두었다. 그리고 과연 수긍이 되는 말이로구나 싶었다. 과연 욕망은 내 몸 안에 묶여 상대를 원하는 것, 나로부터 출발해 내 몸을 위한 행위들을 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사랑은 나를 초월하는 것, 내 몸 바깥에서 쾌락을 찾는 것이다. 어쩌면 사랑은 죽음에 맞선다기보다는, 죽음을 기꺼이 포옹하는 몸짓이다. 사랑은 언젠가 죽을 상대의 육체를 위무하고 사그라질 것들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며, 지루함을 감내하고 성실한 노동을 하게 만드는 힘이다.

다음 날 떠오르는 생각들을 노트 위에 적어보니, 그러한 사랑의 양태는 연인 간의 사랑보다는 오래된 부부간의 사랑, 혹은 자식을 돌보고 양육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에 가까워 보였다. 그런 사랑은 사실 먼발치에선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도 오늘 같다. 하지만 사람은 그런 사랑에 의해 길러지고, 그런 사랑에 기대어 죽음을 맞이하는 걸 꿈꾼다.

현재 진행 중이기도 한 이번 연애에서는 인위적인 연출, 스토리텔링과 같은 의미부여, 각종 환상을 만드는 것을 가능한 지양하려고 했다. 구와 나는 코로나19 이후에 맺어진 관계로써, 집 데이트 패턴이 굳어져 연애 초기부터 노부부 텐션이었다. 둘 다 정신적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기엔 지쳐있었고, 마음이 연약해진 상태였다. 그렇기에 혼을 쏙 빼놓는 매력보다는 정상 감각을 갖춘 성실한 사람이 지닌 안정감을 더 큰 미덕으로 쳤다. 그도 나처럼 직전에 쓴 경험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구와 나는 만난 1년 남짓의 시간 동안 거의 집이라는 공간 안에 있었다. 또한 그의 집과 내 직장이 위치한 강남구 일대를 거의 벗어나 본 적이 없다. 함께 자전거를 타는 취미가 있었다면 둘 다 건강 해졌겠지만, 내 부족한 자전거 실력 탓에 그럴 수 없었고, 유일한 공통 취미인 술을 즐기느라 봉긋한 술배를 얻은 상태다. 우리의 1장은 안전하면서도 정체되어 보이는 톤으로써, 영화로 치자면 대다수의 관객들이 졸거나 극장을 빠져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극장을 빠져나올 수 없는 입장인 나로서는, 언젠가 1장이 끝나고 2장이 펼쳐지고, 배경음악이 바뀌고 감정 선이 고조되고, 다른 테마의 사건들을 경험하게 된다면, 그와 나는 무엇을 목도하게 될까. 이런 것에 대한 기대를 품어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여전히, 이런 문장을 쓰면서도 뭐 대단한 의욕이 들지는 않는다.

다시, 즉흥적으로 사랑에 관한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보겠다. 환기가 잘 되는 방, 열린 창문 틈으로 가을바람이 들어온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의 신을 섬기듯이, 나 스스로를 사랑하듯이 상대의 몸을 위해 헌신한다. 음식을 만들거나 공간을 정갈하게 관리한다. 그 에너지에 스스로가 살아나는 듯하다. 그도 그의 공간에서 그가 해야 할 일들을 한다. 서로 간 많은 말도 필요치 않다. 어쩌면 특별한 연인들은 그들만의 풍요로운 침묵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아름다운 개를 기르는 것만큼의, 혹은 그 이상의 유대감과 행복감을 줄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때때로는 둘 만의 질서가 있는 보금자리를 넘어서서, 시시각각 풍경이 바뀌는 길 위를 달린다면,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정서적으로 피를 뚝뚝 흘리지 않아도, 햇살과 하늘과 바람과 풍경이 우리를 통과하는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만일, 이번 생에 내가 자전거를 잘 탈 수 있게 된다면, 나의 연인과 함께 조용한 자전거 여행을 다녀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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