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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꽃피는 Apr 19. 2020

나는 나와 다른 꿈을 꾸는 남자와 산다


결혼 전, 선거철이 되면 남편 꼴 보기가 싫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녀와 남편은 서로 정치적 견해가 달랐는데, 문제는 상대편 진영에 대한 남편의 공격이 아주 저속하고 비열해서 토론이나 논쟁으로 서로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남편의 워딩을 듣고 있으면, 그 자체만으로 구역질이 날 정도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거 시기가 되면 남편 보기 싫어서 퇴근 후에도 차마 집에 못 들어가고 밤 11시까지 아파트 주위를 배회하다가 남편이 잠들 때쯤 들어간다던 그녀.



나는 그런 그녀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면, 어떻게 결혼생활이 가능한가라는 의문마저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평소에는 자상한 남편이자 아빠이며, 결혼 생활 자체에는 별 문제가 없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 설명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만, 아이까지 있는 결혼 생활이라는 것이, 단순하게 일면만으로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아는 나이였기에, 그냥 힘드시겠다며, 그녀의 하소연을 들어주기만 하였다.



정치적 견해 차이라는 것은 단순히 짜장면을 먹겠다, 짬뽕을 먹겠다는 수준의 취향의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정치관은  사람이 평생 살아오면서 획득한 가치관과 철학이 응축되어 있는 사고체계이다. 그런데, 그러한 부분에 있어서 서로 소통할  없는 사람과 어떻게 남은  평생을 함께 살아내고, 미래를 꿈꾸어갈  있겠는가. 정치관은 단순히 어느 당을 지지한다, 어느 후보를 지지한다의 문제가 아니다. 구태여 고등학교 정치문화 교과서의 정의를 들고 오지 않더라도, "정치는 사회생활 속에서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는 방식" 의미하지 않는가. 한정적인 사회적 자원을 어떤 방식으로 조정할 것인가라는 부분에 그가 가지고 있는 휴머니즘의 본질과 인성이 녹아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기에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과는 친분을 쌓고 싶어하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말이다, 그 일이 내게도 일어났다.



처음 선을 본 자리에서, 세월호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른들이 중간에 끼어있는 쉽지 않은 자리였기에, 최대한 속 얘기를 감추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차원에서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제 집단의 이해관계와 갈등을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편은, 그게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내 입장에서의 남편은, 적어도 같은 뜻을 가지진 않았더라도 그래도 최소한 말은 통하는 인간처럼은 보였다. 나이를 먹으며 조금은 둥글어진 정치관 심사 테스트에서 남편이 합격점을 받았던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게다.



그때 나는 내 무덤(?)을 내가 팠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결혼을 해 보니, 나는 그녀처럼, 나와는 정치적 견해가 다른 남자와 살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정치관은 그냥 정당지지도가 아니다. 나는 나와 다른 꿈을 꾸는 남자와 같은 길을 걸어가기 위해 남은 평생을 타협하고 협력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다만, 위로가 되는 것은 그녀보다는 조금은 나은 상황이라는 것 정도?


최소한 내 남편은 시아버지께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이다.






참전용사이자 국가유공자이신 시아버지께서는 처음 상견례 자리에서 갑자기 밑도 끝도 없는 말씀을 하셨다. 경북 부농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다른 어르신들과 비슷한 시대를 살아오신 시아버님의 정치관은 구태여 밝히지 않아도 다들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시어머니께서는 탄핵 정국에 95%의 의견과 다른, 박근혜 지지를 외치시던 5% 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 김대중, 노무현이 정권을 잡으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다들 굴었다. 하지만, 겪어보니, 여전히 사람 살만한 세상이더라. 세상 모든 일은 다면적이고, 늘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오래전 일이라, 정확한 표현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그런 취지의 말씀이셨다.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상견례에 참석하셨던 큰아버지 역시 경상도 대다수 노년층과 같은 정치관을 가지고 계셨고, 슬프게도 우리 엄마 역시 시어머니와 함께 탄핵 정국의 5%에 속한 상황에서 구태여 당신께서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심을 어필할 필요가 없었을텐데.... 시아버지께서 왜 그 자리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는 그 연유를 나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똘레랑스"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그런 말씀을 상견례 자리에서 말씀하신 시아버님. 그리고 이상한 방식이긴 하지만, 남편 또한 그러한 아버님의 교육을 잘 받고 자라서, 늘 "그럴 수도 있지"라고 외치고 다니니, 선거철 귀가하지 못하는 그녀의 상황과는 결이 다르긴 한 거겠지.





4.15 총선이 끝난 첫 번째 주말, 남편과 봉하마을에 다녀왔다.


차를 주차시키고 내리면서, 나는 남편을 놀렸다.


"당신 같은 사꾸라가 여기 방문할 필요 있어?"


- 스님도 성당에 가고, 신부님도 절에 가는 마당에, 내가 못 올게 뭐야.






봉하마을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친구들은 매년 다리품을 팔아 방문하였지만, 근처를 자주 지나면서도 나는 차마 이곳을 방문하지 못했다. 늘 부담스러워서 외면하였던 곳. 그의 희생을 바탕으로 내가 행복을 누리는 것 같아서 늘 마음이 불편하던 곳 말이다.



찬란한 봄이 봉하마을에 가득했다.

부드러운 봄바람, 지저귀는 새소리, 푸른 하늘, 따뜻한 햇살, 풀내음 가득했던 그곳.

아이와 함께, 가족과 함께, 연인과 함께하는 작은 행복과 웃음이 가득했던 그곳.


단 한 사람의 빈자리를 아름다운 많은 것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곳은.




이십 대 시절, 나에게 봄은 봄이 아니었다. 봄 날씨가 찬란하게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마음 한 구석을 날카롭게 후벼 파는 무언가 때문에, 4월은 숨쉬기 조차 힘들었던 달이었다. 4.3 항쟁, 4.19 혁명, 그리고 이어지는 오월항쟁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너무나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공간이었다. 나와 비슷한 청춘들, 피와 살을 가지고 있고, 미래에 대한 설계와 소박한 행복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을 이들이 스러지고 또 스러져갔는데, 아무 일 없다는 듯 흘러가는 속절없는 세월. 그 피를 먹고 자란 열매의 달콤한 과실을 즐기면서도, 그들을 모욕하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지천에 가득했다. 여러 차례 정권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는 질서는 변하지 않는 것 같아 보였고, 젊은 나는 조바심을 냈었다. 그러한 다급함 때문에 봄은, 늘 아픈 계절이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가장으로 내가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가 짓눌리면서, 이런 뾰족했던 감성은 많이 무뎌졌고, 언젠가부터는 달력을 보며 더 이상 아파하지 않는 나를 보고 놀라는 일까지 생겼다.


누구 한 사람이 안달하고 조바심을 낸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수많은 작은 염원들이 모이고 모여, 어느덧 거대한 역사의 강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아니, 늘 거기서 흐르고 있었는데, 어리석은 영혼이 이제야 깨달았던 것일 게다.


여전히 부채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이제 봄은 그냥 봄이다. 더 이상 봄이라고 사무치게 아프지 않다. 너무나 더디고 더딘 세월이지만, 조금씩 세상이 바뀌고 있고, 강물은 흘러간다는 것을, 강가의 한 줌 모래 속 알갱이로 지켜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조금 더 한 발씩 걸어 나가면, 이 봄을 마냥 행복으로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이 찬란한 봄, 봉하마을에서 조심스레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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