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세 난임일기 1 : 가족계획
40세에 갑작스럽게 결혼을 하고 이전에 가보지 못한 길을 꿋꿋하게 걸어 나가겠다고 비장하게 말했지만, 사실 그게 뭐 대수로운 길이겠는가. 이 땅의 대부분의 부부들이 경험하는 극히 평범한 일상일 뿐인 것을, 마치 대단한 뭐 인양 의미 부여하면서 호들갑 떠는 것도 우습긴 하다.
늦긴 했지만, 남들 다 하는 결혼이라는 것을 했고
결혼을 했으니 남들처럼 별문제 없이 아이를 낳으며,
가 보지 못했던 길이지만,
평범하게 남들처럼 살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물론, 내 나이가 있으니, 힘들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아이가 쉽사리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남편과 내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데 있었다.
만난 지 5개월 만에 결혼을 하면서, 둘 다 가족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따로 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편은 아이는 당연히 낳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나는, 내 나이가 나이인만큼 생기면 낳고, 안 생기면 연연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서로가 꾸는 다른 꿈은 1년이라는 유예기간을 가지고 흘러갔다.
1년 동안 부부가 특별히 피임하지 않고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지속했으나 임신이 되지 않은 경우를 난임이라고 한단다. 1년이 지났고, 이제 우리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혹시나 하는 기적을 바라며 가슴 졸이며 살거나,
아이를 갖는 것을 포기하고 맘 편하게 살거나,
아니면 난임클리닉을 통해 현대 의학의 도움을 받는 것.
나는 속으로 두 번째 선택지를 바랐지만, 상황이 좋지 못했다.
선을 볼 때 듣기로 남편은 3형제 중 막내라고 했다.
요즘 세상에 별 의미는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맏며느리보다는 막내며느리가 편해 보이는 것은 사실 아닌가. 속으로 나쁘진 않군,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말이다... 결혼을 하고 보니,
남편이 막내아들인 것은 사실이었는데
큰 아주버님은 돌싱이었고, 작은 아주버님은 독신이었다.
아니, 세상에.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할 틈 없이, 집안 유일의 며느리로서
김장, 제사, 벌초와 같은,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일을 떠맡아야만 했던 것이다.
거기에 보태어, 대를 잇는 과업(?)까지.
형들이 저렇다 보니, 실질적으로 맏아들 노릇까지 자기가 해야 한다고 남편은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명절날만 해도 큰집 차례라서 반드시 참석할 의무는 없는 것으로 보였다. 아주버님들은 아무도 참석을 안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물론, 명절날 늙은 미혼남녀가 친척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는지를 짐작이 가능하니, 참석하지 않는 아주버님들을 마냥 나무랄 수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내 남편이 이런 형들의 부재를 대신하고자 온갖 노력을 다한다는 것이었다.
'장성한 아들이 셋이나 있는데, 연로하신 부모님만 참석하도록 만들면 친척들 보기에 면이 서지 않는다'며 꼬박꼬박 온갖 집안 대소사에 참석하는 효자 남편. 맘 카페에서 요주의 남편 리스트에 올라오던 효자 남편이 바로 내 남편일 줄은 나는 진정 몰랐다.
외동딸인지라, 돌아가신 아버님 차례를 내가 모셔야 하는데, 새벽 4시에 우리 집(친정)에서 명절 차례를 지내고, 2시간 30분 차를 몰고 큰집으로 가서 (늦게 참석한 죄로) 다른 사촌동서들 눈치 보는 짓을 해야만 했다. 명절날, 엄마 혼자, 찾아오는 친척 한 명 없이 쓸쓸하게 보내도록 내버려 둬야만 해서 나는 무척이나 속이 상했다.
차라리 시부모님께서 이런 남편에 비해 더 융통성이 있으신 분들이셨다. 결혼 3년 차가 되던 해에, 아버님께서는 선언을 하셨다.
"3년 왔으면 됐다. 이제 명절에 참석 안 해도 된다"
어머님께서는 작년 겨울에 선언하셨다.
"이제 김장 안 한다. 우리도 김치 사 먹자."
그 와중에 친정 엄마도 선언하신다.
"이제 너네 아버지 차례랑 제사, 다 절에 모신다."
남편은 좋아라고 나와 엄마를 집에 남겨두고, 명절 아침이면 분주하게 집을 나선다. 시부모님을 경북 큰댁에 모시고 가기 위해서 말이다.
결혼 전, 남편에게 이 점은 분명하게 밝혔었다.
많은 남자들이 결혼 전에는 철없이 부모님 괴롭히며 살다가, 결혼 후 갑자기 효자가 빙의되어서는, 아내에게 대리 효도를 강요하는데, 나는 "효도는 셀프"라고 생각한다고.
남편은, 정말이지 셀프 효자는 확실하다. 나에게 대리 효도를 강요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더 멋진 것은, 시부모님께 잘하듯이, 우리 엄마와 우리 집안에도 잘한다는 것이다.
시외할머니, 그러니까 남편의 외할머니께서 치매일 때,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모시고서도 더 잘해드리지 못한 것이 아쉬워서, 나더러 엄마와 할머니께 잘하라고 늘 이것저것 챙겨주시는 걸 보면, 시부모님을 보고 배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외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49제 내내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외손주 사위의 백 프로 참석에 대해서 이모와 이모부들은 대단하다며 이뻐해 주셨다. 심지어 자식인 이모들 조차도 제에 백 프로 참석 안 했는데 말이다.
이런 식으로 남편의 셀프 효도 메커니즘은 처가, 시가 모두에 공평하게 작동한다. 덩달이 나도 같이 효녀가 되어야 해서 피곤해지기는 하는데, 남편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가 어른들께 잘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나도 인정한다.
문제는 말이다,
덕분에, 2세 갖기라는 주제에
부부 두 사람만이 아니라
양가 부모님의 소원이라는 변수까지 포함되어 버린 상황.
교사로 재직하시던 시절부터 아이를 너무 사랑하셨던 시아버님
남들처럼 손주 한번 안아보는 게 소원인 시어머님
당신이 세상 뜨고 나면, 이 세상에 혈육 하나 없이 혼자 남을 내가 걱정인 친정 엄마
모두는 내가 아이를 낳기를 너무나 간절히 원하고 계셨다.
남을 위해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원하기에
결국 어느 정도 물러서서 중재안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 정부 지원금이 3회까지 나오니,
난임 클리닉에서의 시도는 딱 3번만 시도해보겠다고 내가 입장을 내놓았다.
인공 수정 3회, 시험관 시술 3회까지 지원이 나오니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기회는 다 활용하자는 것이 남편 측의 주장이었다.
타협안은 다음과 같았다.
일단 병원을 찾아가서 검사를 실시한다.
병원에서 인공 수정을 하라고 하면 인공 수정부터 6회의 기회를 활용하고,
바로 시험관 시술을 권유하면, 에누리 없이 딱 3회만 시도한다로.
나는, 적어도 우리가 인생의 많은 시간을
사람의 노력으로 어떻게 극복이 되지 않는 일에 매달려
즐길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끝나는 지점을 정해놓고
나의 난임 극복 시도는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