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이 아닌 죽음으로 치닫는 일관성
무라카미 하루키의 초기 단편세계를 엿볼 수 있는 『반딧불이』를 읽었습니다. 『반딧불이』에는 '반딧불이', '헛간을 태우다' 등의 여섯 편의 단편이 등장합니다. 그중에서도 '반딧불이'는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의 원작에 해당하는 단편 작품이며, '헛간을 태우다'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의 원작으로 유명한 작품입니다. 소설 『반딧불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30대 초반에서 후반에 해당하는 시기에 쓰인 단편들로 묶여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서 주로 채용되는 테마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초기 단편집인 『반딧불이』는 물론이고 중기, 후기를 통틀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서 주로 채용되는 테마는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바로 '불확실한 세계', '섹스', '죽음(자살)'입니다.
1. 불확실한 세계
- 초기작: "언젠가 다시 한번, 이 불확실한 세계의 어딘가에서 너를 만날 수 있다면, 그때는 더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안녕." - 무라카미 하루키 『반딧불이』, (p. 42, 반딧불이)
- 후기작: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녀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곳에서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일들이 차례차례 일어나고 있다. 조금 전까지 세계는 그녀의 손안에 들어 있었다. 이렇다 할 파탄도 모순도 없이. 하지만 그것이 지금은 조각조각 흩어지려 하고 있다." - 무라카미 하루키 『1 Q84 - 1권』, (p. 191)
2. 섹스
- 초기작: "그날 밤, 나는 그녀와 잤다. 그렇게 한 것이 옳았는지 어땠는지 나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 말고 어떻게 해야 했을까?
여자와 자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녀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어째서 그와 자지 않았는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묻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 몸에서 손을 떼고 등을 돌린 채 창밖의 비를 바라보았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웠다." - 무라카미 하루키 『반딧불이』, (p. 39, 반딧불이)
-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에 등장하는 ‘섹스 횟수’:
1회: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1985)
2회: 양을 쫓는 모험 (1982)
2회: 스푸트니크의 연인 (1999)
2회: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2013)
3회: 댄스 댄스 댄스 (1988)
3회: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1992)
4회(+@): 해변의 카프카 (2002)
5회: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 (1987)
5회(+@): 1Q84 (2009)
출처: Letter from Kyoto(hatenablog)”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성 묘사를 세어 봤다”, 2017.05.13
3. 죽음(자살)
- 초기작: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 삶은 이쪽에 있고, 죽음은 저쪽에 있다. 그러나 친구가 죽어버린 그날 밤을 경계로 나는 더는 죽음을 그렇게 단순히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다. 죽음은 이미 내 안에 있다." - 무라카미 하루키 『반딧불이』, (p. 29~30, 반딧불이)
- 후기작: "그만한 용기도 실행력도 없었지. 하지만 그 뒤에 면도칼을 갈아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나름의 매듭을 지을 수 있었어. 그런 의미에서 나는 삼촌이 결코 나약한 인간은 아니었다고 생각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삼촌에게는 인간성을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거야." - 무라카미 하루키 『기사단장 죽이기 2』, (p. 111)
이처럼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서는 '불확실한 세계', '섹스', '죽음'이라는 테마가 자주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테마가 각각의 독립적인 위치를 점하는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서로 연결되고 접속되어서 계열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론을 알 수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세상은 말 그대로 '불확실한 상태'이면서도 개인은 극복할 수 없는 '부조리' 그 자체입니다. 이러한 인식에 의해서 허무와 패배의식이 싹트게 되고 거대한 장벽에 둘러싸인 개인은 내면으로 침잠하며 세상을 두발로 굳게 서지 못한 채 부유하기만 할 뿐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직시하고 밖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내면으로 침잠합니다. 이렇게 내면으로 침잠한 개인은 '타자와의 마주침'을 이루지 못하고, '타인'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쿨하게' 섹스하고 '세련되게' 뒤돌아서는 허무한 섹스만 반복하다가 죽음 충동에 시달리며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결국 자살이라는 그 자체, 섹스에 대한 탐닉 그 자체를 사건으로서 해석하는 것은 중요성을 잃습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인식론'이 그 사람의 삶을 결정짓게 됩니다. 현대 물리학으로 보게 되면 우리는 거시적으로는 '일반 상대성 이론'이 지배하며, 미시적으로는 '양자역학'이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때문에 확률로서 설명할 수 있는 중첩된 상태로 존재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불확실성'이며, 혼돈(카오스) 그 자체입니다. 사회구조적으로 보더라도 개인은 어찌해볼 수가 없는 '부조리'함으로도 가득한 것으로 보입니다. 때문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보는 세계는 '부조리'하면서도 '실체'가 아닌 상태입니다. 이런 인식론에서는 '불확실성' - '섹스' - '죽음'이라는 삼중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불확실성을 긍정하고, 타자와의 마주침을 통해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은 채 '생성'을 이루어내는 가능성의 장으로 우리들을 탈주시켜주는 사유를 할 수는 없었을까요? 이와 같이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론 하나만으로도 우리와 같은 개별자들을 '죽음의 축'으로 향하게 할 수도 있고, '의미 생성의 축'으로 향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작품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에 더해서 우리는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여기 '불확실한 세계'인 카오스를 긍정하며, 그 안에서 환경과 리듬을 도출해낸 생성과 긍정의 철학자 '질 들뢰즈'가 있습니다. 이러한 생성과 긍정의 사유가 개인들에게 뿌리내린 사회는 어떤 모습을 그릴지 기대가 됩니다.
"카오스로부터 <환경>과 <리듬>이 태어난다. (...) 카오스도 방향적 성분을 갖고 있으며, 이것이 혼돈 자체를 황홀하게 만든다. (...) 환경이란 개념 자체가 통일적인 것이 아니다. 생물체만이 끊임없이 하나의 환경으로부터 다른 환경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들 또한 상호 이동을 반복하며 서로 소통하고 있다. 환경은 카오스에 열려 있으며 이 카오스는 환경을 소진시키거나 침입하려고 위협한다. 그러나 환경은 카오스에 맞게 반격에 나선다. 그것이 바로 리듬이다. 카오스와 리듬의 공통점은 “둘 사이(entre-deux)”, 즉 두 가지 환경 사이에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로부터 “카오스리듬”, “카오스모스 (Chaosmos)”가 나온다. ‘밤과 아침 사이’, 인공적으로 구축된 것과 자연적으로 싹튼 것 사이, 무기물이 유기물로, 식물이 동물로, 동물이 인류로 변이 하는 사이. (...) 이 둘 사이에서 카오스는 리듬으로 바뀌는 것이다. (...) 카오스가 필연적으로 리듬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리듬으로 변할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카오스는 리듬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환경 중의 환경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코드 변환에 따라 하나의 환경에서 다른 환경으로의 이동이 일어나거나 또는 몇몇 환경이 서로 소통해 서로 다른 시간-공간이 운동할 때 리듬이 생긴다."
- 『천 개의 고원』(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 새물결 · 2001 · 원제 : 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enie, 1980년) p.593~5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