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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ssis May 10. 2018

[뮤지컬 빨래] 연대의 힘

동양예술극장



탈기표


  뮤지컬 하기 참 힘든 세상이다. 뮤지컬 빅 4 중에 하나인 <오페라의 유령>이 2001년 국내에 들어오면서 라이선스 비용과 제작비 만으로 무려 120억 원이 투입된다. 뮤지컬 <캣츠>는 2017년 12월 16일 대구 공연을 통해서 한국 뮤지컬 최초로 누적 관객 200만 명을 돌파했다. 대극장 평균 티켓 가격을 10만 원으로 책정했을 때 <캣츠>가 지금까지 국내에서 거둬들인 매출은 약 2천억 원 정도다. 뮤지컬 평론가인 원종원 순천향대 교수는 “<캣츠>의 관객 200만 명 돌파는 뮤지컬이 대중화됐다는 방증이자 어떤 지향점을 갖고 가야 할지 방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캣츠’, 한국 뮤지컬 관객 200만 명 시대 연다 >, 한겨레신문, 2017년 12월 15일자)


  한국 뮤지컬계는 국내 뮤지컬 시장이 확대된 점에 고무되며, 이러한 확대 및 성장을 그들의 방향성으로 가져가는 모습이다. 그렇지만 관객들에게 소위 '먹히는' 작품만 라이선스를 통해서 수입해오는 극단들의 행태로 인해서 국내 뮤지컬 시장이 획일화되어 가고 있다. 또한 다른 예술보다 돈이 많이 들어가는 뮤지컬 형식의 특성상 돈이 없으면 뮤지컬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상업 예술의 정점에 다다르며 자본의 힘이 고착화되어 가며 '후기표'를 거듭하던 국내 뮤지컬계에서 완벽하게 '탈기표'를 하며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 작품이 있다.


  그 작품은 바로 뮤지컬 <빨래>이다. <빨래>는 2005년 국립극장 별오름 극장에서 상업 작품으로 정식 초연하게 되었으며 2015년부터는 동양예술극장에서 공연을 이어오고 있다. 지금까지 4,500회의 공연, 누적관객 65만 명을 돌파했다. 작품성은 물론 좋은 성과도 나오고 있는 <빨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학생들의 졸업작품인 순수 국내 창작 뮤지컬이다. 연출/각본을 맡은 추민주 씨는 연극원 연출과 졸업생이며 작곡을 담당한 민찬홍 씨는 음악원 작곡과 졸업생이다. 심지어 여주인공인 서나영의 이름은 200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작품 공연 당시 그 역할을 맡았던 배우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우리 사회 약자들, 그리고 약자라고 말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여기서 살아가기에 안정적인 기반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불안정하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런 의지를 담아내고 싶었어요."(<빨래> 연출 추민주)


  "빨래가 바람에 제 몸을 맡기는 것처럼
  인생도 바람에 맡기는 거야.
  깨끗해지고 잘 말라서
  기분 좋은 나를 걸치고 하고 싶은 말
  다시 한번 하는 거야!"

  - <슬플 땐 빨래를 해>(주인 할매)


  '빨래'라는 단순한 소재에 코웃음을 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오히려 그러한 단순한 소재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빨래'의 힘이다. 특히 이 작품은 '빨래'가 접속구가 되어서 등장인물들이 변두리의 소시민에서 '개별자'로 드러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연대의 힘을 통해서 현대철학이 이야기하는 '공동체의 실현'을 관통하게 된다.


  자, 이제 뮤지컬 <빨래>에서 주목해야 할 점을 세 가지로 구분해서 알아보겠다. 그 세 가지는 바로 '차이의 긍정', '부조리', '연대의 힘'이다.



차이의 긍정


  뮤지컬 <빨래>에는 외국인 노동자, 서점에서 일하는 강원도 아가씨, 폐지 줍는 늙은 할머니, 이혼한 중년 여인, 애 딸린 이혼남 등의 등장인물이 등장한다.  '아무리 내가 사회적 기득권층이 아니라고 해도 나는 저 정도는 아니지'라는 생각과 함께 그들과 나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다. 그로 인해서 나는 '정상'적인 범주에서 그들을 바라보게 되며 그들은 '비정상'적인 범주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참아요 외로워도
  나를 기다리는 가족 때문에
  참다 보면 가끔 잊어요
  우리도 사람이란 사실을

  반말하고 욕하는 사람들 앞에
  주먹 쥐고 일어서고 싶지만
  고향 형제 때문에
  한국 오느라 진 빚 때문에

  참아요 참다 보면 사람들은 잊어요
  우리도 사람이란 사실을
  우리도 때리면 아프고
  슬프면 눈물 나는 사람인데..."

  - <아프고 눈물 나는 사람>(솔롱고)


  하지만 장면이 이어질수록 그들의 '비정상'적인 이야기에 공감하게 되며 극의 1/3이 지난 시점부터는 그러한 '비정상'이 '정상'으로 느껴지게 된다.


  "존재와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차이’는 존재와 사물을 규정하는 근원적 요소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그 자체로서 ‘차이화’의 과정이다. 닮은 것들은 오직 다름(차이)으로 인해 닮으며, 다름(차이)만이 서로 닮음을 인증하는 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 (『차이와 반복』, 질 들뢰즈·민음사·1986년)


  들뢰즈의 차이로서 존재한다는 명제와 함께 보편성에 포획되지 않는 인물 하나하나는 드디어 모두 개별자로 드러난다. 그리고 관객들은 개별자가 된 인물들의 이야기에 가까이 귀를 기울이게 될 수밖에 없다. 몽골청년 솔롱고와 강원도 아가씨 서나영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솔롱고의 셋방 주인이 한마디 한다.


  "너(솔롱고) 불법체류구나, 이거 신고하면 된다. 신고. 우리나라 남자들이 결혼할 여자를 못 구해서 베트남에서 처녀를 사 오고 있는데, 지금 니(서나영)가 몽골이나 만나고 있으면 어떡하냐!!!"(셋방 주인)


  "하지 마세요!! 사람이 어떻게 불법일 수가 있어요! 그리고 여자가 물건이에요? 사고팔게!!"(서나영)


  셋방 주인은 솔롱고를 '몽골', '외국인 노동자', '불법 체류자' 등으로 보편성에 포획시킨다. 하지만, 서나영은 솔롱고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얼굴색이 다른, 말투가 어눌한, 가난한 세입자, 월급이 밀린 공장 노동자, 불법 체류자가 아닌 솔롱고라는 개별자를 바라본다. 보편성에 어긋나는 엄청난 차이가 드러나지만, 서나영은 차이 그 자체를 긍정하며, 솔롱고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비치던 그들은 이내 개별자가 되어서 '긍정'의 대상으로 관객들에게 다가온다.


  (스포일러) 주인 할매의 딸이 오물을 쏟아낸 모습을 보고 역겨워하며 돌아서는 공익근무 요원에게...

  "놀래지 말고 똑바로 봐. 이놈아. 살아있으니까 싸는 거여! 싸니까 냄새도 나는 거고... 니는 냄새 안 나는 줄 알어!! 산 것들은 죄다 지 냄새 풍기고 사는 거여..."(주인 할매)


  우리 삶은 이 차이의 끊임없는 반복이다. 이때 반복은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바로 ‘차이’의 반복이다. 하나의 연극, 하나의 오페라, 하나의 교향곡도 연주할 때마다 연주 시간이 다르고 연주 방식에서도 차이가 난다. 어떤 경우에도 동일한 반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반복은 항상 차이를 전제로 한 반복인 것이다. 종 (種)과 유(類)로서 인류 역시 생명과 죽음을 반복하지만, 동일한 것으로서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머금은 채 반복한다." (『차이와 반복』, 질 들뢰즈·민음사·1986년)



부조리


  고향인 강원도를 떠나 서울로 올라온 지 5년 된 강원도 아가씨 '나영'. 그리고 어떻게 흘려보냈는지도 모를 5년 간의 서울살이. 그녀에게도 꿈은 있었다. 작가는 못 돼도 책은 좀 볼 것 같아 제일서점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지만 기대와 다르게 책 진열만 하고 있을 뿐이다. 어느 날 '나영'은 동료 언니를 부당하게 해고하려는 서점 사장 '빵'의 횡포에 맞서다 자신도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월급은 쥐꼬리
  자판기 커피만 뽑았죠.
  야간 대학 다니다 그만둔 지 오래
  정신없이 흘러간 이십 대
  뭘 하고 살았는지
  뭘 위해 살았는지 난 모르겠어요."

  - <슬플 땐 빨래를 해>(서나영)


  이러한 '나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회, 구조, 세계는 부조리*를 드러낼 뿐이다. 그리고 빠르게 기득권을 획득한 채 다음 사람들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사다리를 차 버린 이들은 실존주의**를 이야기하며 모든 책임을 구조가 아닌 개인에게로 환원시켜 버린다. 이렇게 부조리한 상황에서 내던져진 개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니체의 말처럼 초인***이 되어야 할까? 그렇지 않다면 하이데거의 말처럼 '지위'를 획득해야 하는 걸까?


  "삶이란 시공간 속에 던져진 피투성으로서의 자신이 존재에 대한 이해를 통해 가능적 실존으로 전화해 감으로써 존재 매개의 지위를 획득해 가는 현존재의 실존성의 구조적 운동이다."

-『존재와 시간』(마르틴 하이데거·동서문화사·1927년)


  하지만 이렇게 부조리한 상황에서 뮤지컬 빨래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각자가 '초인'이 되는 것이 아닌 그렇다고 '지위'를 획득하는 것도 아닌 전혀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이들에게 '빨래'는 접속구가 된다. 처음에는 빨래 자체가 접속구였다가 이내 등장인물들은 함께 빨래를 하며 서로에게 접속구가 되어주고, 서로에게 손을 내민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갈 힘을 발휘한다. 부조리한 구조에 맞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다.


  "뭘 해야 할지 모를 만큼 슬플 땐
  난 빨래를 해.
  둘이 기저귀 빨 때
  구씨 양말 빨 때
  내 인생이 요것밖에 안 되나 싶지만
  사랑이 남아 있는 나를 돌아보지.
  살아갈 힘이 남아 있는 우릴 돌아보지.
  빨래가 바람에 제 몸을 맡기는 것처럼
  인생도 바람에 맡기는 거야.
  깨끗해지고 잘 말라서 기분 좋은 나를 걸치고
  하고 싶은 일 하는 거야
  자, 힘을 내."

  -<슬플 땐 빨래를 해>(주인 할매, 희정 엄마)


  빨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부조리한 세계(외부)를 개인의 주관성(내면)으로 극복하려는 사유인 실존주의 철학의 한계성을 감각적으로 아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초인'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지위'를 획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내면이 아닌 외부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연대의 힘


  기성세대와 청년 세대의 중간에 어설프게 끼어있는 나는 위아래를 둘러보며 언제나 스스로에게 되뇐다.


  "우리는 분노가 아닌 투정을 부린다. 부조리한 사회구조 안에 갇힌 우리는 정작 화를 내야 하는 곳에서 침묵하며, 연대를 해야 하는 주변의 동료들에게 투정을 부리며 구조 변혁의 씨앗을 제거한다."


  빨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부조리한 사회구조 안에 갇혀있다. 우리와 같은 모습이다. 그들의 투정은 정당하다. 충분한 숙면을 취한 후 내일도 일터로 나아가야 한다. 폐지를 주워야만 한다. 쥐꼬리만 한 월급이지만 그 쥐꼬리라도 부여잡기 위해서 타인에게 눈을 돌릴 여유는 없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옆집, 윗집에서는 이혼녀 희정엄마와 애 딸린 이혼남 구씨가 밤늦게까지 시끄럽게 애정행각을 한다. 그렇다. 우리의 윗집, 아랫집, 옆집에서 마주하게 되는 흔한 층간소음이다. 이때 우리가 동원하는 흔한 방법은 이렇다.


  "층간소음 갈등 끝에 이웃 살해한 60대, 징역 15년"(연합뉴스, 2017.11.17)
  "층간소음 문제로 이웃 살해한 50대 징역 20년"(뉴시스, 2017.10.13)


  하지만 뮤지컬 빨래에 등장하는 '개별자'들은 다른 방법을 동원한다.


  "밤늦게 계속해서 신음소리가 들리길래, 무슨 일이 있나 걱정했어. 119를 불러야 하나? 수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한참을 고민했어!!" (주인할매)


  그렇다. 이들에게 옆집에서 들려오는 소음은 층간소음이 아닌, '개별자'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 것이다. 사회구조를 정확하게 바라볼 경우 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층간소음'이 아니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쥐꼬리만 한 월급이라도 받은 후 밀린 월세와 카드값을 내야 하는 구조가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연대해야 할 위아래 옆집의 그들은 동료가 아닌 내 출근을 방해하는, 내 생존을 방해하는 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복잡한 구조 안에서도 뮤지컬 빨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주변 동료들에 대한 투정이 아닌 사회 구조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다. 특히 세입자에게 갑질을 할 수 있는 셋방 주인은 인접한 그들에게 권력을 부리는 것이 아닌 공감과 연대의 손길을 건넨다. 그렇다. 우리가 분노해야 할 대상은 우리 주변에 있는, 연대해야 할 그들이 아니다. 우리를 분노시키는 대상은 사회구조이다. 그 구조를 만들어내고 고착화시키는 것은 자본가의 행태와 정부의 정책인 것이다. 애초에 건설사들이 폭리를 취하지 않고 분양가에 합당한 자재를 사용하며 층별 설계구조를 변경하면 층간소음은 발생하지 않는다.


"2017년 각 건설사별 영업이익: 현대건설 9,861억 원, GS건설 3,187억 원, 삼성물산 8,813억 원, 대우건설 4,290억 원"


  또한 층간소음이 발생하지 않도록 의회에서도 입법 활동을 해야 한다. 건설 단계에서부터 층간 소음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건축 관련 법안을 강화해야 하는 것이다. 건설회사에서 각 세대 사이에 바닥 차음재를 의무적으로 설치하게 하고, 층간소음 대책을 위한 실내 설계 이격 한도를 따로 마련해야 하며, 바닥 두께를 24~28cm 이상으로 상향 조정한 상태로 시공하도록 법안으로 강제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법률을 보게 되면 층간소음의 원인이 건설회사의 부도덕함에 있는 것이 아닌 각 개인들의 일탈로 보고 있다.공동주택관리법 제20조(층간소음의 방지 등)와 소음ㆍ진동관리법 제21조의 2(층간소음기준 등)를 보게 되면 소음을 일으키는 주체를 공동주택의 입주자로 한정하고 있는 것이다. 약 7,0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인류 문명은 연대와 협동을 이어왔다. 그런데 어느 날 자본주의가 등장하고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줄 세우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는 서로 돕지 마. 너희끼리 경쟁해. 너희끼리 치고받아서 그중 이긴 놈들에게만 살 길을 열어줄게!”


  300년 동안 유지됐던 자본주의가 자본주의가 단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았던 분할통치, 즉 민중들을 둘로 갈라놓고 피 터지게 싸우도록 하는 그 모습이 재연된 것이다.


  "노동자와 자영업자는 최저임금으로 맞서지 말고 지대 개혁으로 연대해야 한다."(민중의소리, 2018.1.14)


  이러한 상황에 내몰리면 개인들은 정작 수직적으로 싸워야 할 대상인 정부와 자본가들에게는 침묵하며, 수평적으로 연대하고 협동해야 할 대상인 윗집, 옆집, 아랫집과 싸우며 이러한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고착화시킨다. 이러한 문제는 노동 문제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정부와 기업은 뒷짐 지고 뒤에 숨어서, 고용부가 기업을 감싸고, 기업은 어용 노조를 만들어 기존 노조를 무너뜨리며, 노동자들이 와해되고 서로 싸우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노조파괴 의혹 문건 관련…檢, 삼성전자서비스 압수수색" (노컷뉴스, 2018.04.12)
"신세계, 인수기업 노조는 포섭… 신설되는 노조는 철저히 탄압 "(경향신문, 2013.01.22)
"민주 '고용부, 이마트 흑기사 노릇 좌시하지 않겠다.' " (폴리뉴스, 2013.01.29)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수직적 분노를 내보이면서도 수평적 연대를 포기하지 않으며 그들의 동료들에게 손을 내민다.


  "빨래가 바람에 제 몸을 맡기는 것처럼
  인생도 바람에 맡기는 거야.
  시간이 흘러(흘러) 빨래가 마르는 것처럼
  슬픈 니 눈물도 마를 거야.
  자, 힘을 내."

  - <슬플 땐 빨래를 해'>(주인할매)


  빨래에 등장하는 이들이 꿈꾸는 세상은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손을 내미는 세상일 것이다.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이 생각난다. 이들은 감각적으로 '시지프스의 형벌'이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는 홈 패인 공간을 매끈한 공간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홈 파기와 매끈하게 하기라는 조작에서의 다양한 이행과 조합이다. 즉 어떻게 공간은 그 안에서 행사되는 힘들에 구속되어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홈이 파이는 것일까? 또 어떻게 공간은 이 과정에서 다른 힘들을 발전 시켜 이러한 홈 파기를 가로질러 새로운 매끈한 공간을 출현시키는 것일까?" (『천 개의 고원』,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새물결·1980년)


  외국인 노동자, 서점에서 일하는 강원도 아가씨, 폐지 줍는 늙은 할머니, 이혼한 중년 여인, 애 딸린 이혼남 등의 등장인물은 빨래를 하며 개별자가 되었으며 뿐만 아니라 홈 패인 공간을 매끈한 공간으로 만들어낸다. 그렇게 그들은 현재의 움직임을 통해서 미래를 당겨오고 있다.


  "난 빨래를 하면서
  얼룩 같은 어제를 지우고
  먼지 같은 오늘을 털어내고
  주름진 내일을 다려요.
  잘 다려진 내일을 걸치고
  오늘을 살아요."

 - 뮤지컬 『빨래』(서나영)


  "현재는 과거의 '다시당김(retentions)'인 동시에 미래의 '미리당김(protentions)'이다. 그러므로 현재는 '움직임(mouvement)'이다." (『천 개의 고원』,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새물결·1980년)


  자, 이제는 우리의 차례이다. 차이를 긍정하는 개별자로서 천 개의 고원을 만들기 위해 한 발을 내딛는 것이다.






 ..............

  *부조리(不條理, absurdity): 무의미하고 불합리한 세계 속에 처하여 있는 인간의 절망적 한계 상황이나 조건.
  **실존주의(實存主義, Existentialisme):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 문학적 흐름. 실존주의에 따르면 각자는 유일하며, 자신의 행동과 운명의 주인이다.
  ***초인(超人, Ubermensch): 힘에의 의지(Will zur Macht)를 발휘하며, 위험을 피하지 않으며, 어떤 일에도 등 돌리지 않으며, 상황을 원망하지 않고 운명을 사랑하며(운명애, amor fati) 영원회귀를 포용하는 강한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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