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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호 Aug 03. 2021

나의 여름은 호소다 마모루에게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대표작들 <워 게임> <시간을 달리는 소녀>

   Z세대의 어린 시절 추억을 복기하는 만화를 꼽자면 하루를 다 세야 할 정도로 많이 나오겠지만, 개중에 <디지몬> 시리즈를 빼놓을 수는 없다. 90년대생들은 2000년대 초반 TV 앞에 앉아 아구몬의 진화에 열광하고, 레오몬의 희생에 같이 눈물 흘렸다. 묘티스몬이나 어둠의 사천왕 같은 빌런 디지몬을 물리칠 때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통쾌함이 밀려왔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초등학교 하루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매일 투니버스 채널을 틀고 <디지몬 어드벤처>를 보며 선택받은 아이들과 동지애를 다졌다. 특히 시리즈 두 번째 극장상영물인 <디지몬 어드벤처: 우리들의 워 게임!>(호소다 마모루, 2000)(이하 <워 게임>)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다. 당시 어린 나이에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생각해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워 게임>을 보며 노스탤지어를 느꼈다. 초등학생의 내가 영화를 보며 느꼈던 노스탤지어가 스쳐 지나간 (그리고 곧 다가 올) 여름방학에 대한 갈망이라면 성인이 된 지금 느끼는 감정은 유소년기 여름을 향한 향수일 것이다. 이 글은 소년시절에 즐겨봤던 호소다 마모루의 애니메이션 <워 게임>과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7)를 볼 때마다 일렁이는 감정에 대해 쓴 고백문이다.


   대표작인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물론이거니와 상기한 <워 게임>부터 가장 최신작인 <미래의 미라이>(2018)까지 호소다 마모루 작품의 주요한 배경은 언제나 여름이었다. <워 게임>은 여름방학을 맞아 선택받은 아이들이 각자의 삶으로 흩어진 틈을 타고 악재가 발생한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는 (일본어로 나이스 데이라고 불리는) 7월 13일의 시작과 함께 주인공 마코토에게 사건이 잇따른다. 호소다 마모루의 여름은 청명하다. 눈이 쨍할 밝기의 여름해와 활엽수의 무성한 이파리 그리고 그것을 흔드는 남실바람이 그의 애니메이션을 더없이 싱그럽게 만든다. 그의 영화를 보고 나면 여름에 대한 기억이 반강제로 조작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현실의 여름엔 끊임없이 맺히는 땀과 그로 인한 끈적함 투성이지만 호소다 마모루의 여름 속 불쾌란 있을 수 없다. 땀조차도 홑곁의 옷차림과 피부 사이로 파고드는 바람을 더욱 시원하게 만드는 장치로 쓰인다. 실제로는 늦봄과 초여름 사이 혹은 이른가을, 찰나에 누릴 수 있는 상쾌함이다. 호소다 마모루는 모두가 좋아할 법하지만 터무니없이 짧은 계절감을 마치 여름의 전부인 양 둔갑시키는 재주를 지녔다. 그의 여름은 홀가분하고 나른한 것이 꼭 방학의 인상을 쥐고 있다. 방학숙제라곤 뒤로 미뤄둔 채 낮잠과 놀이를 즐기던 방학 말이다.


   푸른 계절감이 소년시절 여름방학을 환기한다면 영화 속 성장통은 미숙했기에 감당해야 했던 성장의 짐을 떠올리게 한다. 파트너 디지몬이 리타이어를 반복해도 다른 세계에서 지켜만 봐야 하는 태일의 무력감. 해결사를 자처하지만 타임리프를 할수록 자꾸만 꼬이는 상황이 당혹스러운 마코토. 주인공들이 겪는 소동이 판타지에서 이루어질지라도 그들이 맞닥뜨린 좌절은 현실보편적이다. 정 붙였던 친구가 나쁜 길로 들어섰음에도 시원하게 말리지 못하던 중학생의 나. 친하다고 믿어 걸었던 장난이 다툼의 시발점이 되어 절연을 초래하곤 했던 고등학생의 나. 두 영화를 보면 서투르게 행동해 문제의 오답만을 족족 골라내던 어린 내가 생각나 절로 고개가 끄덕인다.


   영화와 달리 현실의 여름은 무더위의 연속이고 불쾌함 범벅이다. 주인공들의 극적 위기는 한순간에 해결되지만 실제 성장기 아픔은 짧게는 수일, 길게는 수년을 안고 가야 한다. 당연한 말로 현실과 애니메이션의 괴리는 크다. 그럼에도 호소다 마모루의 애니메이션은 모든 성장형 인간에게 위무를 건넨다. 외로움, 무력감, 불안함, 상실의 슬픔을 온건하게 어루만진다. 시간적(<시간을 달리는 소녀>)으로 혹은 공간적(<워 게임>)으로 박리된 존재들이 다시 잇닿는 과정은 유려한 감동을 만들어낸다. 만남의 장을 마련한 것은 감독이지만 마법 같은 점프를 직접 시도하고 해내는 존재는 주인공들이다. 태일은 디지털 세계를 유영하고 마코토는 시간을 달린다. 태일은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파트너 디지몬과 만나고 마코토는 치아키와 재회한다. 두 영화 속 주인공들이 만화적 상상력으로 시공간을 횡단하듯이 호소다 마모루의 애니메이션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시간의 순행을 잠시 잊게 하고 푸르던 소년시절의 추억을 적시게끔 만든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지만 그렇기에 더욱 아름답게 간직하고 싶은 과거를 아늑하게 그리워한다.


P.S.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신작 <용과 주근깨 공주>(2021)가 올해 '칸 국제영화제' '월드 프리미어 섹션'에 초청되어 전 세계 최초 공개되었다. '할리우드 리포터'는 <용과 주근깨 공주>를 두고 "호소다 마모루의 영화 중 가장 야심찬 작품이 될 것"이라며 호평을 보냈다. 호소다 마모루는 <워 게임>과 <썸머워즈>(2009)에 이어 신작에서도 가상 세계에서 벌어지는 활극을 선보일 예정이다. <용과 주근깨 공주> 국내 개봉은 올해 9월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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