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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호 Sep 19. 2020

사실 연애는 둘이 하는 것이다 <먼 훗날 우리>

[오늘 밤엔 넷플릭스-9월 3주] <먼 훗날 우리> 리뷰

연애는 둘이 하는 거라는데 어째 로맨스 영화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그리는 경우가 많다. 꼭 모든 로맨스 영화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저장된 로맨스물 중 다수가 주인공 한 사람의 기억과 관점으로 연애담을 조립한다. 이러한 영화는 보통 주인공 1인의 상황과 감정에 집중한다. 덕분에 관객은 자신의 경험을 되뇌며 극 주인공에 쉽게 이입할 수 있다. 한 캐릭터를 향한 선택과 집중은 세심한 감정 포착과 더불어 깊은 내면 묘사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봄날은 간다>(허진호, 2001)와 <이터널 선샤인>(미셀 공드리, 2004)이 빚어내는 다양한 정념에 그토록 이입할 수 있는 주된 요인은 영화가 철저히 주인공 상우(유지태)의 시선과 조엘(짐 캐리)의 기억에 의존하여 극을 진행한다는 사실에 있다.


'1인 중심 구성(A)'은 주인공이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제시한다. 주인공의 인간적 특성, 주인공을 둘러싼 환경, 주인공이 극에서 겪었던 감정 등은 영화의 큰 맥락에 녹아들어 관객에게 스민다. <건축학개론>(이용주, 2011) 속 자꾸만 주저하는 승민(이제훈)이  어수룩하다고 해서,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구파도, 2011)의 커징텅(가진동)이 철부지 같다고 해서 마냥 욕을 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가 한 시간이 넘도록 정성 들여 쌓아 온 주인공의 서사를 그리 매몰차게 내버리기란 결코 쉽지 않은 법이니까.


한편 위 부류와 궤를 달리하는 영화들이 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 말이다. <만추>(김태용, 2010), <캐롤>(토드 헤인즈, 2015), <마티아스와 막심>(자비에 돌란, 2019)이 아마 이 카테고리에 속할 것이다. 이러한 영화는 두 사람 사이에서 피어나 진솔하게 가꾸는 감정과 그것을 공유하는 행위에 힘을 싣는다. 앞선 부류와 다른 점은 관객의 감정 이입에 필요한 효율적 서사 운용을 포기하더라도 두 인물의 이야기를 병행에 가깝게 존속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2인 병행 구성(B)'은 애정이 교차하는 지점(대개 영화의 미들 포인트쯤)에 다다르기까지 구간 동안 장르적 재미와 몰입도가 덜할 수 있다. 두 캐릭터가 각기 처한 상황을 이리저리 오가며 지켜봐야 하기에 자연스레 집중도가 낮아지는 것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먼 훗날 우리>(유약영, 2018)는 B의 방식에 가깝다. 이 영화는 현시점으로부터 10년 전, 팡샤오샤오(주동우)와 린젠칭(정백연)의 20대 초반 연애담을 두 인물의 관점에서 균형감 있게 주조한다. 다만, 앞서 "B의 방식에 가깝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먼 훗날 우리>는 A의 방식도 일부 수용한다. <먼 훗날 우리>는 두 사람의 시선과 감정을 균등하게 배치하되 그것의 발단이 되는 상황과 사건을 각자에게 맡기지 않는다. 달리 말하자면 이 영화 서사의 큰 줄기는 '팡샤오샤오와 린젠칭이 같이 경험한 사건'들의 연쇄이다. 우연한 만남, 지척의 고향 집, 연애 전부터 시작한 동거 설정은 모두 둘의 이야기를 한 데 묶기 위함이다. 두 인물이 공유하는 단일 사건 연속이 서사의 중심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이야기의 외연을 확장할 필요가 없다. <먼 훗날 우리>는 두 인물의 전사(前事)나 비화를 설명하는 데 관심이 없다.


<먼 훗날 우리>는 때로는 같이, 때로는 달리 하는 연인 사이 감정의 궤적을 무던히 추적한다.


대신 그들이 함께한 사건의 연쇄 마디마다 파생한 감정선의 흐름에 집중한다. <먼 훗날 우리>는 때로는 같이, 때로는 달리 하는 연인 사이 감정의 궤적을 무던히 추적한다. 정념을 맹폭하는 인위적 장치에 기대는 법이 없다. 사랑의 양감은 누빔 소파 위에서 자라기도 하지만 애먼 대화에 바스러지기도 한다. 일상적인 설렘과 다툼,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가 으레 그러하듯 여의치 않은 현실적 여건. 지극히 보편적인 상황에서 기인한 감정의 추이가 이 영화의 감성을 풍요롭게 한다.


자칫 단조로워질 수 있는 영화를 굳건히 지탱하는 축은 역시 정백연과 주동우 두 배우의 연기이다. 린젠칭으로 분한 정백연은 숨길 수 없어 미세하게 흘러나오는 (팡샤오샤오를 향한)연모의 감정을 아름답게 현시한다. 애정 어린 눈빛과 망설임 짙은 입꼬리, 애써 쿨한 척 하는 목소리가 자아내는 불협화음은 짝사랑의 복잡다기한 심경과 같다. 또한, 부유하는 자신의 꿈(게임 개발)과 밀착한 현실 여건 사이 간극으로 자존감이 마모되는 과정을 유려하게 표현한다. 선물을 들고 고향을 방문하는 시퀀스에서부터 감지되는 린젠칭의 분열을 표현할 때 정백연은 무의식적 나약함과 의식적 자기방어를 훌륭히 소화한다. 두 범주를 오가는 정백연의 연기는 상당히 자연스럽고 부드러우며 어떤 때는 동시에 중첩되기도 한다.  


정백연의 연기가 미끈한 모양새를 갖추었다면 주동우의 팡샤오샤오 연기는 강인함에 가깝다. 겉으로 천진한 구색의 팡샤오샤오는 '베이징에 자기의 주거를 마련하겠다'라는 일념 하에 갖가지 방안을 모색한다. 연애 전 린젠칭의 질투 섞인 핀잔에 위트로 대꾸하는 모습에서 무해한 방식으로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는 팡샤오샤오의 인물됨이 잘 드러난다. 영화 전반의 팡샤오샤오가 천진한 캐릭터로 다소 편평한 모습을 보였다면 후반의 팡샤오샤오는 주동우의 반듯한 연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영화의 반환점을 돌며 팡샤오샤오의 강인함은 린젠칭과의 관계를 지탱하는 축으로 자리 잡는다. 린젠칭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무너지는 그를 다시 추스르는 것은 팡샤오샤오의 단단함이다. 주동우는 천진한 캐릭터를 사려 깊은 캐릭터로 멀끔히 바꾸면서도 팡샤오샤오의 원류인 강인함을 고수하는 데 성공한다.


유려함과 강인함이 교감을 이룰  영화는 차분히 공진을 이룬다. < 훗날 우리> ' 사람의 연애담' 찬찬히 복기하고 그동안 관객은 자신의 기억  사랑의 흔적을 더듬을  있다. 과거에 감정이 발하고 남은 흔적은 유려함의 결과일 수도, 강인함의 결과일 수도 있다. 이는 보는 이마다 다를 것이며  사람의 역사에서 경험마다 다를 수도 있다. 영화가 중요하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린젠칭과 팡샤오샤오 어느 한쪽에 이입하라' 아니다. 그보다는 '연애는 둘이 나누는 사랑'이라는 사실 자체이다. 10년이 지나 서로의 기억을 함께 조립하는 흑백 장면이 필요한 이유도 여하다. 어느  인물에 의해서 기억이 재구성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 훗날 우리> '둘이서 나누는 사랑의 과정' 훼손되지 않게 오롯이 재현한 영화이다.




감독: 유약영

출연: 정백연, 주동우 등

장르: 로맨스, 멜로

시청가능플랫폼: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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