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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이 Dec 28. 2019

1. 게으름을 탈출하고 싶었던 이유


안녕하세요, <진짜 게으른 사람이 쓴 게으름 탈출법> 의 저자 지이입니다.


https://tumblbug.com/lazystop


텀블벅에서 이런 전자출판 펀딩을 진행했었고,

펀딩을 보신 [마인드빌딩] 출판사에서 좋은 제안을 주셔 곧 정식출간하게 됩니다.


1월 말~ 2월 초 쯤 책 정식 출간을 앞두고

브런치를 살려보려 참 오랜만에 브런치에 돌아왔어요... 왠지 모르게 약간 민망하네요. ㅠㅠ



아무튼,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제가 게으름을 탈출하게 된 출발점, 왜 게으름을 고치고 싶었는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마다 게으름을 고치고 싶은 이유는 다 다르겠지만, 저는 성공적으로 게으름을 탈출하기 위해선 ‘자기 만족’이라는 동기를 가지고 지속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에게 더 만족하고,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을 이루기 위해서 게으름을 고쳐야 하는 거죠. 스스로 필요성을 체감하지 못한 채 다른 사람들의 압박 같은 외부적 요인에 떠밀려 시도한 변화는 저 같은 경우엔 그리 오래 가지 못했었어요.


그렇다면 저는 어떤 점이 그렇게 불만족스러웠기에 게으름 탈출을 결심하게 되었을까요?


저는 일을 하다가 조금만 힘들면 바로 회피할 만큼 천성부터 게을렀던 반면, 아이러니하게도 결과에 대한 욕심은 많았습니다. 시험 성적을 잘 받으면 기분이 좋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싶고, 어떤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고 싶은 욕심은 남들 못지 않게 있었죠. 학창 시절의 공부까지는 제가 했던 노력에 비해서 결과가 잘 나왔고, 그래서 스스로에 대해 눈속임을 하며 발전 없이 머물러 있을 수 있던 것 같아요.



나는 이 정도의 노력만 투입해도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런 세월들이 지속되다 보니 점차 열심히 하는 법을 잊었고, 또 노력의 가치가 점점 희미하게만 느껴졌습니다. 

노력해서 백 점을 얻는 것 보다는 대충 해서 팔십오 점 얻는 게 더 현명한 결정처럼 느껴졌죠. 

그러다 보니 능동적으로 관심을 갖고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만 잘하고 즐길 수 있는 세상의 많은 것들 – 일, 시험에 필요하지 않은 공부, 각종 운동과 악기, 취미 등 – 을 하나 하나 포기하고 쉽게 싫증내버리고, 내가 이것엔 재능이 없는 것 같다고 합리화를 했습니다. 

그런 시간들이 길어지며, 결국은 뭔가 하나를 진득이 잡고 결과가 나오기까지 노력하는 일은 저에게서 완전히 멀어졌어요.


하지만 스스로를 속일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죠. 

열심히 하지 않으니 내가 기대하는 결과와 실제 결과에서 차이가 생길 수 밖에 없었고, 

그 갭들이 긴 시간 축적되며 제 모습은 천천히 부실해졌습니다.


그리고 이걸 절실하게 느낀 건,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진로를 찾아가고 취직을 할 때부터였습니다. 

친구들이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실력을 쌓으며 점차 성숙해지는 동안, 

저는 힘든 일은 피하고 어려운 일은 미루기만 했었습니다. 

힘든 문제를 풀어나갈 때 저절로 따라오는 성장을 전혀 맛보지 못했던 거죠.


친구들은 단단한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려 느리더라도 단단한 집을 지었다면, 

저의 집은 대충 겉보기만 비슷하게 지어놓고 바람 불면 훅 무너질 거 같은 집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조차도 그 눈속임에 속고 있다가, 

정말 더 이상은 진로 결정을 미룰 수 없을 때가 되서야 집이 무너져가는 소리를 듣고 깨달은 겁니다.



나는 게으름 때문에 많은 걸 놓쳐왔고,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산다면 내 손에 남는 건 하나도 없을 거라고.



이십 여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그 시간 동안 삶을 풍성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줄 수 있었을 수많은 지식, 기술, 언어들을 익히는 대신 게으름을 피우느라 아무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절절히 체감한거죠.


어릴 때 내가 바라던 내 모습은 이런 게 아니었고, 앞으로도 이렇게 지낸다면 내가 바라던 이상은 점점 멀어지기만 할거라고.





존재의 불안과 부재의 불안


목표를 가지고 노력하며 살아온 친구들은 점점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게 보였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성과가 많든 적든, 그들은 자신이 공부하고 싶은 것을 주도적으로 찾아나갔고, 자신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을 만큼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골몰하고 고민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고 거기에 열정을 다하는 모습이 근사해 보였어요.


물론 그 친구들도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을 거에요. 

하지만 그 어려움은 무언가를 해나가고 직면하면서 거기서 발생하는 어려움, 결과로 유형 무형의 무언가가 남는 괴로움이지, 

무언가를 피하는데 온 에너지를 쏟느라 정작 하는 건 별로 없으면서 스트레스만 받는, 혹은 무언가를 해도 대충 해서 남이 열을 얻어갈 때 셋을 얻어가는 때 느끼는 덧없는 괴로움이 아니었을 겁니다.

대학 시절, 상담 선생님이 해 주신 말씀으로, 게으르게 살 때와 적극적으로 부지런히 살 때 어떤 점이 가장 다른지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불안을 느낄 수 밖에 없어요. 불안에는 두 가지 종류, 존재의 불안과 부재의 불안이 있어요.

존재의 불안은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존재라면 누구나 느낄 수 밖에 없는 불안이에요. 사람을 만나고 공부를 하고 직장을 구하고 일을 하며, 거기서 비롯되는 불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반면 부재의 불안은, 존재로서의 불안을 느끼기 싫어 그 과업들을 회피했을 때 - 사람 만나는 걸 피하고, 공부를 회피하며, 일하는 것을 피하며 느끼는 불안이에요. 

존재의 불안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걸 극복하며 서서히 발전할 수 있는 불안이지만, 부재의 불안은 해결하기가 참 어려워요. 왜냐면 뭘 안 하거든요. 그렇게 견디기도 극복하기도 힘든 텅 빈 불안이 부재의 불안이에요.]





시간의 밀도


그러니까 제가 게으름을 탈출하고자 했던 이유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한 번 주어지는 인생을 좀 더 활기차고 즐겁고 가치 있게 살기 위해서.


라고 할 수 있겠네요.


시간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만능 재료이고,

그것으로 무엇을 어떻게 만드는지가 결국 삶에 대한 만족도를 결정하는 거 같아요. 

제가 일을 미루고, 도피하고, 공상을 하며 보냈던 시간에 뭐라도 하나를 잡아 제대로 집중했다면 삶이 여러 모로 더 풍성해졌겠죠.


제가 멍하니 스마트폰을 하며 보냈던 시간 동안 무어 하나라도 열심히 했다면, 

더 많은 선택지와 가능성을 얻었을 겁니다.

취업에 집중해 준비한 친구들은 원하는 기업에 들어가기 수월했을 것이고, 관심 가는 분야의 공부를 즐겁게 했던 친구들은 지적 깊이가 더 깊어졌을 거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모임에 참석하며 신나게 논 친구들은 즐거운 시간과 인간관계를 얻었겠죠.


반면 저는 그 긴 시간 동안 스스로 만족할 만한 유형/무형의 무언가를 거의 얻지 못했습니다. 그 시간 동안 게으름을 피운 것으로 해낼 수 있는 생산적인 성과는 기껏해야 <게으름 탈출법> 을 쓰는 게 전부인 것 같습니다… (심지어 그것도 게으름을 탈출한 뒤에야 쓸 수 있었습니다.)


시간을 쓰는 데는 무얼 하는지 뿐 아니라 어떻게 하는지도 중요합니다. 

다 똑같이 강의실에 앉아 전공 수업을 들어도, 

수업시간에 몰두해 듣고 수업이 끝나고 관련 논문을 찾아본 친구들은 흥미를 느끼고 대학원을 진학하거나 관심 분야의 취직을 준비한 반면, 

멍하게 수업시간에 딴 짓만 한 저는 그 분야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으니 

흥미를 느끼고 세부 분야를 파고 들어가기도 어려웠습니다.


게으름을 피우는 것의 또 하나의 문제는, 제대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그만두지도 못한다는 겁니다

어떤 일에 제대로 몰두해 본 적이 없으니, 이게 아니다 싶어도 계속 못다한 미련이 남더라구요. 

‘내가 노력만 한다면 이 일을 해낼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말이죠.

또한 과감하게 포기하는 대신 관성적으로 그 일을 계속하느라 다른 선택지를 모색할 수 없으니, 

자신에게 안 맞는 무언가를 계속 붙들고 있게 됩니다.

이렇게 무언갈 과감하게 포기해본 적이 없으니, 손에 든 걸 놓기는 점점 두려워집니다. 

주도적으로 포기하고 또 주도적으로 새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약해지는 비효율적인 악순환이 되는 거죠.


 제게 깊이 와닿았던 인용구로 이 단락을 마무리할게요.


“삶은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 다시 말해서 경험이다. 그런데 경험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시간은 아주 귀중한 자산이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경험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할당하고 투자할 것인가를 지혜롭게 결정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몰입의 즐거움 中




부지런히 살면 뭐가 좋을까?


게으름을 탈출한 뒤, 부지런히 능동적으로 살았을 때의 좋은 점으로 이 글을 마무리짓고자 합니다. 

관심 분야의 지식을 쌓고, 원하는 일들을 더 성실하게 수행해낼 수 있고, 적극적이고 성취하는 삶을 살 수 있고, 보람 있고 뿌듯하고…… 이런 건 앞에서 다 말했으니 좀 다른 면의 얘기를 해볼게요. 

우연한 일을 통해 직접 겪어보지 못했더라면 깨닫지 못했을 사실이요.


대학 시절, 저는 헤르미온느처럼 부지런하고 야무진 친구와 왠지 모르지만 같이 다니게 되었습니다. 똑부러진다는 형용사가 사람이 된다면 그 친구일 것만 같았습니다. 그 친구는 부지런한 사람들의 생태를 관찰하는 데 좋은 롤모델이 되어주었죠.


어느 날, 전공 과제 제출을 이틀 앞둔 시점, 그 친구와 저는 휴게실에 앉아 함께 놀고 있었습니다. 

저는 늘 그렇듯이 미룰 수 있는 데까지 미뤄놨다가 급하게 선배가 쓴 족보를 찾고 있었고, 겨우 구한 족보를 베껴 쓰는 것도 귀찮아 그것마저 미루고 있었죠. 

그런데 이야기하다보니 놀랍게도 그 친구 또한 과제를 미루어두었던 겁니다.



“ 너 과제 다 했어? “

“ 아니… 너무 하기 싫다. “

“ 나도… 근데 너는 좀 여유로워 보이네… 걱정 안 돼? 난 지금 제 시간에 과제 못 낼까봐 너무 초조해. “

“ 나는 그래도 내가 마감 시간 직전에는 어떻게든 끝내놨을 걸 아니까 마음이 편하네. “

“ …응? ”

“ 늘 그랬듯이 미래의 내가 어떻게든 다 끝내놓긴 했을거야.”



그 때 저는 전광석화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믿을 수 있구나! 제가 학창 시절 내내 벼락치기로 일관하며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가는 동안, 이 친구는 과제들을 규칙적으로 수행해서 미리 끝내고, 일의 배분을 잘해 효율적으로 시간을 썼겠죠. 그리고 그런 일이 수없이 반복되며 스스로를 믿고 신뢰할 수 있게 됐을 겁니다. 그래서 가끔씩 찾아오는 나태함마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자신과 동일시 하지 않을 수 있는 거겠죠.


그 때야 처음으로 깨달은 것 같아요. 미래의 나에 대한 믿음,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은 맨바닥에서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과거에 스스로에게 했던 약속을 얼마나 잘 지켰는지, 그리고 그 시간이 얼만큼 축적되었는지부터 비롯되는 근거 있는 자신감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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