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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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에 상존하는 나치 세력을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킨 푸틴이 정작 자신과 자신의 측근들이 마치 히틀러와 나치친위대처럼 행동하는 현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더욱이 나치 문양을 연상시키는 Z(За, 러시아어로 찬성, 지지를 의미)자 모양의 상징은 볼 때마다 공포와 실소를 동시에 일으킨다. 독일 민족의 우월성과 아리안 순혈주의를 내세워 세계 전쟁을 일으킨 히틀러와 러시아 애국주의와 옛 소련의 부활을 앞세워 영토 확장을 시도하는 제국주의 전쟁광 푸틴은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다른 건가?
난 솔직히 그들의 차이점을 잘 모르겠다. 푸틴은 나치 독일을 물리치고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소련의 역사적 이미지를 적극 환기시키며 자신의 명분과 야욕을 정당화하지만, 푸틴이 추구하는 새로운 러시아 제국은 사실상 나치 독일에 가깝다. 그리고 분명한 건 푸틴과 히틀러 둘 다 과대망상과 피해의식에 빠져 자신과 측근들의 야욕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켰고, 허구적이고 이기적인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것이다.
냉전 당시 CIA와 KGB간의 치열했던 공작정치의 세계에서 자신의 경력 대부분을 보냈던 푸틴은 자신들의 처절한 패배와 소련의 몰락을 최전선에서 지켜보며 깊은 절망에 빠졌을 것이다. 이후 보리스 옐친 정권 시절 총리로 재임하며 체첸 사태를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내전 위기에 빠진 러시아를 구해낸 푸틴은 옐친에 이어 대통령으로 재임하며 빠르게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고 경제를 재건시켰다. 이때의 영광과 인기라는 환상 속에 여전히 그는 살고 있고, 그의 인식 역시 냉전 시절 첨예하게 대립했던 공작 정치 세계에 머물러 있다.
나는 전쟁으로 우울해 하는 친구들과 함께 비오는 날 환송회 겸 해서 가볍게 술을 한잔 했다. 이틀 후면 정든 페테르를 떠나게 되는데, 한편으론 고국과 집이 그립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러시아의 현실이 너무 걱정됐다. 우린 친구들이 일하는 카페 인근 펍에서 꿀이 첨가된 맥주와 치즈를 곁들인 흘롑(Хлев, 러시아식 흑빵)을 주문했다. 보통 러시아 음식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들이 흘롑(Хлев), 보르시(Борщ), 샤슬릭(Шашлык), 블린느이(Блины)등인데, 사실 흘롑이나 러시아식 팬케익인 블린느이를 제외하면 보르시는 우크라이나식 스프이고, 샤슬릭은 카프카스식 바비큐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러시아 음식은 스볘클리인데, 이것은 비트를 작게 잘라 마요네즈 등과 버무린 러시아식 샐러드다.
한 시간 남짓 수다를 떨고 가게가 문 닫을 시간이 다 돼서 계산을 하려는데 의사 소통 과정에서 오해가 있었는지 한 친구가 카드를 꺼내 먼저 계산을 해 버렸다. 이들의 주머니 사정을 잘 알기에 순간 머쓱해진 나는 다음에 내가 이 곳에 무사히 돌아오게 되면 그땐 내가 계산할 테니 보드카에 살라(우크라이나식 돼지 비계 말린 요리)를 먹자고 제안했다. 유쾌하게 이 제안에 합의한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지하철 역에서 헤어졌다. 친구들과 뜨거운 포옹을 나누며 나는 상황이 더 이상 악화되지 않아 사랑하는 이들이 있는 이곳에 다시 돌아올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페테르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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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러시아에서 두 가지 뉴스를 접했다. 하나는 이번 달 말이나 다음 달 초쯤에 루한스크와 도네츠크는 물론 자포리자와 헤르손주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동쪽 러시아 접경지에 대한 러시아로의 병합을 공식 선언 및 서명한다는 뉴스이고, 두 번째 뉴스는 푸틴이 이번 징병 사태와 관련해 벌어진 일련의 실수와 혼란들에 대해 사과하고 과정상의 오류와 잘못들을 바로잡겠다고 했다는 뉴스였다.
이 두 뉴스를 통해 나는 전쟁이 어쩌면 더 이상 확전되지 않을 희망이 있을 수도 있으며, 푸틴과 그의 측근들이 최소한의 이성을 가지고 자신들의 신변에 닥칠 위기를 체감했을 수도 있다고 느꼈다. 푸틴은 남한 영토 만한 우크라이나 4개 주를 공식 합병한 이후에 이 지역에서 발생하는 공격은 러시아 영토에 대한 침범이라고 간주하고 자국 수호를 위해 핵무기도 사용할 수 있다는 협박을 한 적이 있다. 그럼 이 사실을 인지한 젤렌스키와 우크라이나 수뇌부는 만일에 발생할 수도 있는 러시아의 실제 핵공격에 대한 공포로 이 지역에 대한 공세를 늦추고 소극적인 영토 방어의 형태로 작전을 변경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는 여전히 우크라이나에 속해 있는 돈바스와 오데사 등 흑해 연안 일부 지역에 대한 공격에만 집중하고, 우크라이나는 이 같은 공격에 맞서 남아있는 영토 수호에 전력을 다하는 지역 분쟁의 양상으로 전쟁이 전개되며 한반도처럼 지리한 소모전이 오랜 시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스위프트 제재 당시 기준 금리를 20프로까지 대폭 인상하고 러시아 내 자본에 대한 해외 유출을 철저히 틀어막음과 동시에 천연 가스와 오일 등을 루블로 결제하게 한 푸틴 정권의 발 빠른 대처를 보며 노회하고 교활한 푸틴 측근들의 준비성과 실행력에 대해 감탄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의 신속한 합병 조치를 보면서 역시 노회한 푸틴 정권의 눈에는 젤린스키와 그의 수뇌부들이 그저 얼치기 어릿 광대에 불과할 뿐이라는 현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만약 이 모든 절차와 과정들이 우크라이나의 강력한 공세와 미국의 지원을 반전시키기 위한 시나리오대로 이행된 것이라면 푸틴과 그의 측근들은 정말 교활하고 순발력 좋은 정치꾼들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참 시기 적절하게도 오늘 푸틴은 러시아 국내외에서 일어나는 소요 사태와 중앙아시아와 카프카스 접경 지역의 분쟁에 대해 서구의 사주에 의한 혁명 시도를 운운하며 옛 소련 부활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만약 정말 핵전쟁에 대한 의도가 없이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 일부를 러시아에 병합하는 선에서 이번 전쟁을 마무리하려는 의도라면, 푸틴은 최소한 정신줄을 놓지 않은 것이 분명하고, 우크라이나는 결국 푸틴과 바이든의 알력 다툼에 놀아나 자신만 희생시킨 게 되고 만다. 결과적으로 바이든은 자신에 대한 국내의 강한 반대 여론을 일부 잠재워 정권 연장의 꿈에 더 가까이 다가갔고, 푸틴은 상처가 더 많은 영광이긴 하지만 이번 영토 확장의 공적을 앞세워 가까스로나마 자신의 정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게 됐으며, 이를 통해 미국 일극 체제에 맞서기 위한 소련 제국의 부활이나 유라시아 경제 연합 확대 등 2024년 대선 전까지 새로운 선전 선동을 위한 명분과 구실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정치 초년병에 불과했던 젤린스키 역시 이번 전쟁을 통해 자국 내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구축하게 됐다.
결국 명분 없는 전쟁이 일어나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힘 없는 양민들만 피해를 입을 뿐, 권력을 쥔 자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살 구멍을 미리 마련해 놓고 철저한 계산에 의해 자신이 속한 이익집단을 위해 작전을 짠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셈이다. 유일한 변수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핵위협을 무릎 쓰고 무모하고 용감한 공격을 이어가 확전의 양상으로 치닫고 이로 인해 궁지에 몰린 푸틴이 결국 핵 버튼에 손을 댄다는 시나리오인데, 어느 누구도 절대적인 승자가 없는 상황에서 자칫 공멸할 수도 있는 최악의 선택을 한다는 것은 정말 제정신이 아니면 내릴 수 없는 결정이기에, 나는 이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 섞인 추측을 조심스레 해 본다.
아마도 바이든, 푸틴, 젤렌스키는 적절한 선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고 권력을 지키는 선에서 지리한 전쟁을 마무리하거나 체제 대결의 형태로 분쟁 혹은 내전을 고착화시키고 이념 갈등을 이어갈 가능성이 높다. 어리석고 분통 터지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인류의 종말을 야기할 정도는 아니기 때문에 나 같은 보통 사람의 입장에선 이것이 현재의 상황에선 차악이자 차선의 출구 전략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실 오늘 텔레그램(러시아에서 개발된 어플리케이션이다. 사실 러시아의 IT 및 해킹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을 통해 우크라이나 4개 주 합병 뉴스를 공유하며 러시아 영토가 늘어났다고 농담 아님 농담을 한 친구는 성장안정(러시아제국)-전쟁(1차대전, 러일전쟁)/혁명(2월혁명/10월혁명)-성장안정(소비에트 연방)-전쟁(2차대전, 독소전쟁)-성장안정(흐루시쵸프)-전쟁(아프카니스탄 전쟁)-성장안정(고르바쵸프)-국가해체/내전(체첸분쟁)-성장안정(옐친~푸틴 과도기)-전쟁(조지아전쟁)-성장안정(푸틴집권초기)-전쟁(크림전쟁)-성장안정(월드컵)-전쟁(우크라이나전쟁)으로 반복적인 등락을 거듭하는 러시아 역사를 한탄하며, 엄청난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늘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조국의 현실에 대한 자조 섞인 푸념을 내뱉었다. 그리고 나아가 내전 가능성을 걱정하며, 징집이 여기서 더 확대될 경우 푸틴이 탄핵될 수도 있다는 예측을 하기도 했다. 나는 이에 동의하진 않았지만, 푸틴 탄핵은 정말 러시아의 미래와 인류를 위한 최상의 시나리오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푸틴은 우크라이나 동부 4개 주 병합을 경축하는 대대적인 기념식을 선전하며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고 있다. 학생 신분인 내 지인도 이 행사에 강제 차출돼 정신 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중이다.
https://youtu.be/IeP4714aGBs?si=W4ifNU7gScNlD3Z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