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겨울을 알리는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하루 종일 비 소식으로 당일 계획해 두었던 일정이 모두 취소가 되고, 서울로 올라오던 길이었다. 길을 잘못 들었는지, 고속도로가 아닌 한 마을 속을 헤메게 되었다.
도심을 벗어나 산으로 갈수록 빗방울은 더 굵어졌다. 와이퍼는 게으르게 앞유리를 쓸어내렸고, 지우기도 전에 또 빗물이 번져 와 다시 안쪽을 탁탁 두드렸다. 차 안은 히터 덕분에 따뜻했지만, 창밖 풍경은 점점 축축하게 번져갔다.
구불구불한 산길은 날씨를 핑계로 더 깊게 구부러지는 것만 같았다. 길은 생각보다 좁았다. 네비게이션은 자신만만하게 이 길이 가장 빠르다고 주장하듯, 우리를 큰 길로 안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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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길은 좁지,
찻길은 구불구불하지,
찻길 옆으로 안개는 뿌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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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 위에 올린 오른발에 힘이 저절로 들어갔다. 커브를 돌 때마다, 조심스럽게 속도를 줄였다. 갑자기 어떤 그림자들이 툭 튀어나왔다. 비에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무언가 서둘러 뛰어가는 몸짓들.
두세 마리의 동물이었다. 내 손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동물들은 겁을 먹고, 마구 뛰기 시작했다. 젖은 다리로 미끄러지듯 달아나면서, 자동차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동물들이 다치지 않길 바라면서, 속도를 더 늦췄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불과 몇 초 사이였는데도, 시간은 길게 늘어진 것처럼 느리게 흘렀다. 그렇다. 그때 나는 그 동물들이 무서웠다. 야생 동물 특유의 예측 불가능함,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방향, 그 순간의 낯섦이 몸 안쪽을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아마 그들은 우리를 훨씬 더 무서워했을 것이다. 비 오는 날, 조용하던 산길에 갑자기 커다란 쇳덩어리가 웅~웅~ 거리는 소리를 내며 나타난 거니까. 이 산길이 그들에게는 집 앞마당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 입장에선 갑자기 들이닥친 것을 맞닥뜨린 셈이다. 도망치지 않는 쪽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우리는 차 안에서 놀랐고, 그들은 산길 위에서 놀랐다. 나는 그 동물이 두려웠고, 그 동물은 아마 우리를 두려워했을 것이다. 서로를 잘 모르는 존재들이 동시에 느끼는, ‘저쪽이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공포.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어느새 찻길 밖으로 사라졌고, 우리는 다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묘한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여행을 할 때마다, 나는 종종 비슷한 종류의 두려움을 느낀다. 낯선 도시, 처음 보는 사람들, 익숙하지 않은 언어, 한 번도 밟아본 적 없는 길 위에서 나는 늘 약간은 긴장감이 감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이내 편안해지곤 하지만.
우리는 왜 이해할 수 없는 낯선 존재를, 조금 과장해서라도 무서워하는 쪽이 더 안전하다고 믿을까. 비 오는 산길 위에서 마주쳤던 그 동물들은 결국 나를 해치지 않았다. 나도 그들을 해치지 않았다.
우리는 각자의 방향으로 도망치듯 사라졌고, 그 이후로 다시 만날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만큼은 서로가 서로에게 공포였다. 마주친 지 몇 초 만에 아무 말 없이 서로를 회피하던 우리들.
아마 앞으로도 나는 낯선 길을 갈 때마다 조금은 겁을 먹을 것이다. 낯선 사람 앞에서 말수가 줄고, 낯선 도시에서는 지도를 자주 확인할 것이다.
혹시 모른다. 어딘가에서 나만큼이나 겁먹은 눈빛이 또 한 번 나를 스쳐 지나갈지도.
괜찮아,
나도 사실 너만큼 무섭거든
운도령 고개 정보 메모
그 날, 그 길의 이름은 운도령 고개다. 이름만 들어도 어딘가 안개와 구름이 걸려 있을 것 같은, 조용한 산길이다. 운도령 고개는 강원도 쪽 깊은 산을 가로지르는 길로, 화려한 관광지라기보다는 고요한 숲과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세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도로에 가깝다.
도심의 번잡함과 멀어질수록 차창 밖으로는 작은 마을과 논밭이 드문드문 나타나고, 어느 순간부터는 오로지 산과 나무, 그리고 길만 남는다. 그게 이 길의 매력이자, 동시에 긴장감을 주는 포인트이기도 하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의 운도령은 비교적 차분한 편이다. 도로 폭이 넓지는 않지만, 속도를 많이 내지 않고 천천히 가다 보면 차창 밖으로 계절이 바뀌는 풍경을 감상하기 좋은 코스다. 특히 가을에는 산 전체가 물들어, 커브를 돌 때마다 다른 색의 엽서가 한 장씩 펼쳐지는 느낌을 준다. 다만 구불구불한 커브가 많고 직선 구간이 짧아서, 운전자는 계속해서 긴장을 유지해야 하는 길이기도 하다.
비가 오는 날의 운도령 고개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노면이 젖으면서 브레이크 거리가 길어지고, 구름과 안개가 내려앉으면 시야가 훅 좁아진다. 특히 커브 직전에 갑자기 시야가 흐릿해지는 구간이 있어, 전조등과 안개등을 켜고 속도를 충분히 줄이는 게 중요하다. 와이퍼가 아무리 규칙적으로 앞유리를 쓸어도, 빗물과 안개가 뒤섞이면 ‘한 박자 늦게 보는 세상’을 통과하는 기분이 든다. 여유롭고 낭만적인 풍경은 맞지만, 적어도 운전석에 앉은 사람에게는 꽤 신경이 곤두서는 구간이다.
그래서 운도령 고개를 지날 계획이라면, 날씨와 시간대를 꼭 함께 고려하는 편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