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약속 있으세요?

01. 다시 열린 점심

by 민금술사
나는 점심 약속을 잘 잡지 않는 편이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 보면

수많은 접점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하게 된다.


회의실에서, 행사장에서, 복도에서.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이어지는 전화와 화상회의 속에서.


서로 다른 생각과 기대가 만나는 자리에서

여러 목소리를 듣고, 조율하고, 설득한다.

때로는 밀고, 때로는 당기며

보이지 않는 균형을 맞춘다.


그리하여 하루가 지나고 나면

머릿속에는 내가 아닌 사람들의 말이

겹겹이 남아 있는 날도 있다.


생각해 보면

사람을 많이 만나는 일은

사람을 많이 만나는 일이 아니라

많은 말을 마음에 남기는 일이다.


그 말들이

내 마음까지 깊이 눌러앉지 않도록,


그래서인지

점심만큼은 되도록 비워 두는 편이었다.



점심은 종종

다른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직급과 영향력을 끌어와

전략적인 네트워크를 챙기는 시간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위트 있는 사람들과 앉아

날것 그대로의 넋두리를 풀어 놓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점심은 그렇게 흘러간다.


하지만 나는

점심을 그렇게 쓰고 싶지는 않았다.


한동안 내가 찾던 점심은

사람을 더 만나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잠시 빠져나오는 시간이었으면 했다.


그래서 어떤 날은

책상에 앉아 잠깐 눈을 붙이고,


어떤 날은

편의점 도시락으로

조용히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메신저에 짧은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혹시 오늘 점심 약속 있으신지요.”


업무적으로 엮일 일은 거의 없는 분이었다.

같은 회사에서 일하지만

직접 함께 일할 기회는 많지 않았던 동료였다.


같은 조직 안에서

직접 마주칠 일은 많지 않았지만,

내가 운영하던 몇몇 프로그램과 과정들 속에서

종종 얼굴을 보던 분이었다.


말을 많이 나누지는 않았지만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는 모습이

은근히 인상에 남아 있었다.


멀찍이서 서로를 알아보는 정도의 사이.

그 정도의 거리였다.


그래서였을까.

그 짧은 메시지는

뜻밖이라기보다

오히려 불편함 없이

어딘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답장을 보냈다.


“아직 없습니다.”


잠깐 후

다시 메시지가 왔다.


“그럼 같이 점심 드실까요?”


“좋습니다.”


이내 이어진 또 한 줄


“좋아요. 12시에 로비에서 뵈어요.”


그렇게

한 번의 점심이 시작됐다.


몇 번 점심을 함께하다 보니

한 가지가 분명해졌다.


이 사람과의 점심은

신경을 써야 하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


메뉴를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고

어디를 갈지 따로 준비할 필요도 없다.


그저

“근처에 가볍게 갈까요.”


이 정도면 충분했다.


어느 날은

농담처럼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우리 오늘 말 거의 안 했네요.”


그러자 그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대화는 한 것 같은데요.”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다.


말 없이 대화하는 법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이들은

대화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침묵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점심 이후로

나는

사람들과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한동안 혼자 두었던 시간을

조금씩 다시 열어 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오래

닫혀 있던 시간이기도 했다.


몇 번의 점심을 지나며

문득 처음 받았던 그 메시지를 떠올렸다.


돌이켜보니

그 한 줄의 말은

마음에 둥근 화살 하나를 남긴 것 같았다.


날카롭게 파고드는 화살이 아니라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어쩌면 그 메시지 한 줄이

내 점심 시간을 다시 열어 준 셈이었다.

그래서 이 연재를 시작했다.


점심 메뉴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점심 자리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기록.


말이 많지 않아도 편한 사람들.

특별한 약속이 아니어도

함께 앉을 수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과 나눈

작은 점심 이야기들.


- To be continued.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