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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터어리 Jun 10. 2024

나를 믿는 너를 믿어

주영화의 다섯 번째 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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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아 안녕! 두 번째 유럽 여행기로 돌아온 주영화야. 거창하게 숫자까지 다는 바람에 적어도 3편은 써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3주 텀이 생각보다 길고 귀국한 후에도 영감을 받는 일이 많더라고. 그래서 여행기는 이번 편을 끝으로 마무리할 거야. 앞으로 더 재밌는 레터로 찾아올 테니 부디 아쉬움은 접어두길!



부다페스트 어부의 요새에서 내려다 본 한 부부


  눈치 빠른 연이라면 저번 여행기를 읽고 내 가치관을 파악했을 거야. 물질보다 정신을, 자본보다 낭만을 추구하는 내 신념은 ‘소유‘가 아닌 ’존재’를 지향하는 삶에 가까워. (관심 있는 연이는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읽어보길 바라. 유튜브 채널 ‘너진똑’에 요약 영상이 있으니 그걸 봐도 좋고. 아래 버튼에 아웃링크를 달아놓을게.) 타고난 성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껏 여러 사건을 거치면서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쓸모 있는 인간상은 내가 추구하는 미래와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어. 그래서 많이 벌지도 갖지도 못하더라도 내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들을 이루며 살겠다고 다짐했지. 그렇다고 존재지향적인 삶이 마냥 평탄하지는 않아. 주변에 소유지향적인 사람이 많거나 그런 환경이 조성돼 있으면 믿음이 흔들리기도 하거든.


유튜브 영상 보기


  유럽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나는 이미 지쳐있었어. 인턴직 재계약 문제로 정신적 에너지는 고갈됐고 취준 스터디와 끝나지 않는 집안일로 시간적 여유도 없었거든. 여행 계획 자체도 스트레스였어. 항공권, 숙박, 날씨, 체크리스트... 떠나기도 전에 질려버렸지. 이륙하는 비행기에서 16시간을 내리 졸았어. ‘유럽에서는 아무 생각하지 않고 푹 쉬리라’ 다짐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없었어. 파리에서 언론사 공채에 지원하기 위해 노트북을 켜고 자소서를 써야 했었거든. 



이름도 모르는 파리의 한 카페.


  웃기지 않아? 반 고흐의 그림이 걸린 오르세 미술관을 뒤로하고 카페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지원서를 썼다는 사실이. 며칠 뒤 확인한 결과는 ‘서류 탈락’. 고대하던 여행지에서까지 탈락할 자소서를 쓰는 부족하고 미련한 내가 정말 싫더라. 그 일 이후로 며칠은 울적해 있었어. 1편에서 말했듯 언제나 행복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유럽까지 왔으니 행복해야 한다’ ‘여기에서조차 밤새 자소서에 매달렸으니 붙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나 봐. 어쩌면 강박의 근원에는 ’지금 취업 준비를 할 시기지 한가하게 여행이나 다닐 때가 아니다‘라는 불안이 도사리고 있었을지도. 이때의 피로가 묻어있던 여행기 1편 초고 중 일부를 보여줄게. 



  여행하기 위해서 결국 일해야겠지. 그나마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우유부단한 습관과 싸우며 사회가 요구하는 성과를 내야 할 거고. 벌써 싫다. 근데 그거 알아? 합스부르크 왕가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이렇게 말했대. ‘사람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일해야 한다.’ 외면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지. 낭만으로 점철된 이상적인 삶 대신 현실과 타협하기로 선택했으니까. 

(중략)  

   유럽 여행은 ‘아이패드 병’ 같은 거야. 사봤자 유튜브 재생기밖에 더 되겠냐만 아이패드를 사지 않고서는 그 병을 치료할 수 없는 것처럼, 유럽 여행도 가봤자 맛있는 것 먹고 좋은 것 보고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것 말고 뭐 대단한 걸 얻어오겠냐만 가지 않고는 영영 박탈감에 시달리는 것이지.



  아마 이 버전으로 레터를 발행했다면 연이 너에게까지 울적함이 전가됐을 거야.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초고를 다야와 김러브에게 보여주자 그들은 내게 의외의 피드백을 줬어. 오늘 이 글을 쓴 계기이기도 해.



  “내가 아는 너는 현실보다 이상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 현실과 타협하게 됐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어.“


  “너에게 유럽 여행이 아이패드 병인 것이 아니라, 여행이 너에게 현실 도피의 수단이 될 수 없는 것이라고... 아이패드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그걸 악기나 드로잉 노트로 쓸 여력이 없는 게 아녔을까? 여행은 현실감각을 상실시키기 때문에 여행이라고 하는데, 너는 그게 안 되는 사람이고."



  꼼꼼한 피드백 내용보다도 ’나를 안다‘는 그 말이 어찌나 반갑고 위로되던지. 어쭙잖게 사람의 단면만 보고 판단해서 ‘내가 좀 아는데’라며 거들먹거리는 것이 아니라, 몇 해 동안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나라는 사람의 복잡성을 이해한 이들만이 할 수 있는 말이지. 만약 누가 나에게 ‘내가 너를 안다’고 말하면 ‘니가 뭔데 날 알아? 나도 날 모르는데’라며 거부감이 들 것 같은데, 이들이 말하면 왠지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지는 수준을 넘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구나’ 하는 경탄이 들어. 



  그만큼 이들은 나에게 직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이야. 정확하게 따스한 조언을 해주는 친구가 주변에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라고, 나는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여행기를 연작으로 발행하는 아이디어도 두 사람이 제안했어. 3주가 지나고 여독이 풀리면 생각이 정리되면서 훨씬 정제된 글이 나올 거래. 그래서 한 편에 모든 감상을 담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초고를 갈아엎었어. 그렇게 완성된 글이 ’행복이 그렇게 중요한가요?‘야.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 나오는 LP샵 'ALT & NEU'


  여기서 잠깐 레터어리 결성 트리비아를 풀어볼게. 평소 김러브와 나는 문학과 철학, 밈과 드립이 난무하는 괴상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였어. 팍팍한 인생살이를 겪으면서도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다’라며 애틋한 궁상을 떨었지. 다야와 나는 영화 모임에서 만났는데 그때 내가 다야의 친절함에 반해버리는 바람에 친해지려고 이런저런 노력을 했더랬지. 여기에 감긴 다야와 함께 영화 공부도 하고, 놀러도 다녔어. 어느 날 다야가 내게 뉴스레터를 시작해 보자고 제안했어. 이때 김러브가 딱 떠오르더라고. ‘다야와 함께라면 어떤 프로젝트든 즐기면서 임할 수 있겠다, 그리고 김러브라면 이 발칙한 프로젝트에 흔쾌히 가담할 것이다.’ 그렇게 필진 3명이 모이게 된 거야.


  나는 나 자신을 그닥 믿지 않아. 존재지향적으로 살겠다고 다짐했지만 흔들리지 않고 이 신념을 지켜낼 자신은 없어. 하지만 나는 내가 믿는 이들의 믿음을 믿어. ‘너는 잘될 거야’라며 두리뭉실한 응원을 하기보다는 ’네 글은 이런 점이 좋아. 이번 글을 읽고 나는 이렇게 느꼈어‘라며 섬세한 피드백을 건네는 이들. ’우리 힘내자‘가 아닌 ’중요한 건 지속가능성. 너무 애쓰지 맙시다 우리’라며 뭉친 마음을 조물조물 마사지하는 이들. 명함과 연봉과 씀씀이가 개인의 가치를 결정하는 이 땅에서 따뜻한 이성으로 서로의 꿈을 지지하는 친구들. 그럼 믿음에 둘러싸여 있으면 냉혹한 현실 앞에서도 겁먹지 않고 맞설 수 있어.



피렌체에서 본식 후 디저트로 먹는 빈 산토와 비스코티.  도수가 높은 빈 산토에 달콤한 비스코티를 푹 적셔서 먹으면 정말 맛있단다!



  각자 본업이 있는 우리가 레터어리를 계속할 수 있는 이유도 서로의 지향점을 신뢰하기 때문이지. 예상치 못한 불행에 부닥쳐 한 명씩 무릎을 꿇더라도 옆에서 든든하게 버텨주는 서로가 있어서 다행이야. 최근 여러 힘든 일을 겪는 멤버들에게 한 사람이 건넨 말을 연이 너에게도 소개해줄게. “제가 또 잘 버티고 있을 테니 지금 태풍 안에 있는 분들은 걱정 마셔요ㅎㅎ” 


  연이 너는 어때? 내가 앞으로도 좋은 글을 꾸준히 쓸 수 있을까? 네가 그렇게 믿어준다면, 나는 언제까지고 멈추지 않을게. 여행기라고 썼지만 결국 레터어리 멤버들을 향한 고백이 되어버린 글을 마치며. 주영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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