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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터어리 Aug 14. 2024

돌을 쌓자!

다야의 여덟 번째 레터

 연이는 예술 작품을 통해 마음이 정화되고 씻기는 기분을 느껴본 적 있어? 나는 최근 2번 정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어. 한 번은 며칠 전 영화관에서 본 <기쿠지로의 여름>이었고, 다른 한 번은 지난번 얘기했던 경주 여행 때 방문했던 우양미술관의 박현기 개인전, 《사유하는 미디어》였어. 불과 얼마 전 레터를 발행한 것 같았는데 3주라는 시간은 얼마나 느리고 또 빠른지. 회사에서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어 정신없이 달리느라 몽롱한 지경에 이르렀어. 퇴근하면 얼른 씻고 자야 하고, 또 다음 날 아침엔 헐레벌떡 뛰쳐 나가느라 내가 어떤 상태인지 살펴볼 시간도 없는 순간들.


 그런 순간마다 가끔 박현기 작가의 '돌탑' 시리즈를 생각해. 천장이 높은 모노톤의 미술관과 하얀 벽, 고요하게 울리는 전시장 안에서 작품들을 바라볼 때 느꼈던 서늘한 감각. 그 기분은 마치 내 마음을 꺼내서 샘물에 헹구고 절 한켠에 있는 불상을 닦듯 단정한 감각을 주거든. 오늘 소개하고 싶은 전시가 바로 그 전시, 박현기의 《사유하는 미디어》야. 소개하고 싶은 작품들은 많지만,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돌탑' 시리즈에 대해서 소개 해보려고 해.


<사유하는 미디어>  포스터. (출처-우양미술관 웹사이트)



《박현기: 사유하는 미디어》

우양미술관

기간 4.30 - 9.1


《박현기 : 사유하는 미디어》는 박현기(1942~2000)가 사용한 물질과 비물질적 매체를 향해 품고 있는 작가의 자기 고찰적 생각을 발견하고, 작가가 작품에 은유한 자신의 정체성, 나아가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다.


 [ 전시 정보 보러가기 ]



 박현기 작가를 설명하는 키워드를 이야기해 보자면, '돌탑', '대구', '건축', '조형', '미디어아트' 등을 언급할 수 있을 것 같아. 1942년에 태어나 해방 전까지 오사카에서 머무르던 박현기는 해방 직전, 부모님과 한국으로 다시 이주하여 대구에서 정착하여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해. 그가 초등학교 2학년생이던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대규모 피난길에 동참하게 되었어.


돌탑 (출처-한국민속신앙사전: 마을신앙 편)


 피난길에 오른 박현기의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이 쌓아놓은 돌탑 무더기였어. 한국의 민속 신앙에 근접하면서도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이 돌탑들은 추후 박현기의 작품에 큰 영향을 주게 돼.


돌탑시리즈


 박현기에게 돌탑들은, '신들의 무덤'과 같은 신성한 곳처럼 여겨졌어. 돌탑이 현실과 신들의 세계를 이어주는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거지. 돌탑은 이쪽에서 저쪽 세계와 접촉할 수 있는, 다시 말해 현실과 가상을 잇는 촉매제였던 거야. 현실-가상의 관계는 이러한 돌탑의 형태로 구체화 되기 시작했어.


 위에 보이는 돌탑 중에 특이한 점이 보이지? 맞아, 어떤 돌들은 흔히 보이는 '돌' 같지 않지. 그건 합성수지로 만든 인공 돌이기 때문에 그래. 진짜 돌과 가짜 돌로 만들어진 돌탑. 박현기는 이런 식으로 요소의 변주를 통해 진짜와 가짜의 구분, 그리고 그것을 인지하는 우리의 인식 체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듯 해. 진짜와 가짜의 간극, 현실과 가상의 간극에는 무엇이 있을까?



♫•*¨*•.¸¸♪✧



백남준, Global Groove, 1973


 홍익대학교에서 서양회화와 건축을 공부한 박현기는 대구로 돌아와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어.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 불리는 백남준은 잘 알고 있지? 백남준은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었는데, 박현기도 그중 하나였어. 우연히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 <Global Groove>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해. 작품에도 그의 영향이 강하게 미치는, 일종의 분기점이었던 셈이야. (실제로 1984년 백남준이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전세계 생중계 프로젝트를 위해 한국에 방문했을 때 인연이 닿아 만나기도 했어.)


 작곡가로 예술 활동을 시작했던 백남준이 미디어 아트에서도 리듬과 변화, 동적인 움직임을 적극 활용했던 것과는 달리, 박현기는 정적이고 명상적인 자신만의 사유를 녹여냈던 거야. 그래서 백남준에게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백남준과 박현기의 작품은 그 특징이 서로 뚜렷하고 다른 작품이라고 느껴져.



무제(TV돌탑) 시리즈


 돌 사이에 TV가 있고, TV 안에는 돌이 있지. 이걸 돌탑이라고 볼 수 있을까? 가상의 돌과 물질의 돌 사이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돌탑 시리즈를 구성하기 위해 작가가 남긴 작업 노트들도 볼 수 있었어. 메모를 자세히 살펴보니 작가가 의도한 부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어서 더 재미있었어.


'상상의 공간, 의미의 공간, 개념의 사이'


"사이라는 말을 우리는 가끔 쓸 일이 있다. 무엇과 무엇이 관계되어질 때 이유를 유발시켜주는 역할을 적절히 해주는 애매모호한 필요불의 가시적 언어다."


♫•*¨*•.¸¸♪✧



  '돌'이라는 소재를 이용해 현실과 비현실의 간극을 질문하고, 이를 통해 의식의 저 너머에 있을 자기 자신과의 만남까지도 의도했던 박현기의 작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명상'이기도 해. 명상으로서의 작품은 작가 개인의 성찰에서 멈추지 않고 보는 이들에게도 권유하는것 같아. 전시를 보는 동안 나는 그 명상의 동참자였어. 돌들을 보며 현실과 가상에 대해 생각했고 '사이'와 '간극'에 대해 생각했어.


 현실과 가상은 연결되어 있어. 우리 삶은 물질들로 가득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들은 보이지 않을 때가 많지. 현실은 직접적이고 촉각적이지만, 때로 초현실적이고 상징적이기도 해. 현실은 너무 아프고 날카로울 때도, 너무 둔할 때도 있어. 그럴 때 마음 속으로 소원을 빌고 돌탑을 쌓아 본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을거야. 박현기는 '돌탑'이라는 테마를 통해 내면과 소통했고, 또 다양한 방식으로 '미술 명상'의 세계를 펼쳤어. 연이들은 어때? 연이들 고유의 방식으로 명상하고 싶다면, 이 전시가 도움이 될지도 몰라.


 지난주 주영화의 레터에서 그런 얘기가 있었지, 우리들은 너무 바쁘게 사느라 진득함의 미학보다는 순간의 도파민에 점령당해버렸다고. 삶의 고단함에 지쳐 분투하느라 나 자신과의 만남에 소홀했던 연이도, 그리고 그런 만남 자체가 부담스러워 '언젠가 시간이 되면' 하리라 미뤄둔 연이도 있을거야. 언제가 되어도 좋아. 시간이 허락하고 연이의 마음이 허락하는 날, 경주에 들러 우양미술관의 박현기 개인전을 보고오면 어떨까? 나 처럼 마음이 뽀득뽀득 씻기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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