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화의 여덟 번째 레터
연이는 끼니를 어떻게 해결해? 나는 약속이 없으면 하루 두 끼 다 요리해서 먹는 편이야. 사 먹는 것보다 저렴하다는 이유로 요리를 시작했지만, 지금은 스스로 먹이기 위해 레시피를 찾고 장을 보고 썰고 볶고 담는 시간을 즐기게 된 것 같아. 배달 음식이나 레토르트 식품으로 끼니를 때울 때 느껴지는 배덕감은 단순히 영양이 불균형하거나 차림새가 초라하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너무 쉽고 빠르게 먹으면 나 자신을 소중히 대하지 않고 방치하는 듯한 기분이 들더라고.
이 기분은 내가 친구나 가족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야. 내 집에서 그들을 대충 먹이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어. 시간이 조금 들더라도 괜찮은 식재료로 정성스럽게 요리해서 먹일 때의 뿌듯함은 선물을 사줄 때의 기쁨보다 열 배는 더 크게 느껴지지.
오늘 소개할 영화는 <프렌치 수프>! 작년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이 작품은 19세기 후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요리 영화야. 이 장르의 대표 주자인 <아메리칸 셰프>나 <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 <리틀 포레스트 2: 겨울과 봄>이 한 시퀀스에 한 요리를 보여주는 것과 달리 <프렌치 수프>는 풀코스 정찬이 손님상에 도달하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득하게 담아내.
주인공 '외제니'가 새벽녘 텃밭에서 실한 채소를 골라 수확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이른 아침 식재료로 가득 찬 주방으로 이어져. 외제니가 전속 요리사로 일하는 저택의 주인인 '도댕'은 미식가 친구들을 대접하기 위해 정찬을 계획하지. 하녀 '비올레트'와 그의 사촌 동생 '폴린'이 보조를 맞추면서 대장정은 시작돼.
이들 손은 분주하지만 정교하게 움직이고, 주방에서 이뤄지는 하모니는 단 하나의 음 이탈도 허용하지 않을 듯 유려하게 흘러가. 애피타이저부터 메인디쉬를 거쳐 디저트까지…. 다채로운 유럽 요리가 악장을 넘어가듯 줄줄이 등장하는 통에 영화를 보는 내내 침샘이 찌르르 돌더라. 이 시퀀스는 러닝타임 135분 중에서 초반 30분이라는 큰 비중을 차지해. 얼마나 진득한지 느껴지니?
코스 요리 시퀀스는 이후 한 번 더 등장해. 도댕이 외제니만을 위한 만찬을 준비하는 장면이지. 가장 인상적인 음식은 달콤하게 졸인 서양배와 함께 얇게 구운 크레이프를 곁들여 먹는 '푸아르 포셰(Poire pochée)'라는 디저트였어. 외제니를 향한 도댕의 사랑이 담뿍 느껴지는 대목이거든.
도댕은 접시 위에 청혼 반지를 숨길 요량으로 뜨거운 크레이프를 맨손으로 이리저리 구기며 모양을 잡아. 영화는 여러 번의 시도 중에서 실패하는 장면까지 편집하지 않고 온전히 보여줘. 외제니의 몸 선을 닮은 서양배를 고를 때도 도댕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이쪽저쪽 뜯어보지. 긴 시간을 들여 준비한 디저트를 음미하는 외제니의 모습은 행복으로 가득해. 마침내 두 사람은 인생의 가을에 부부의 연을 맺게 되지.
<프렌치 수프>의 카메라는 눅진하게 관찰하는 방식으로 시간의 미학(味學)을 설파해. 오래 공들여야 충만한 삶이 완성된다는 듯 서두르지 않고 인물의 표정과 사물의 변화를 하나하나 포획하지. 마지막 씬에서 계절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바뀌는 주방을 패닝으로 찬찬히 담아내는 카메라는 이윽고 도댕과 외제니의 투샷에서 멈춰 서. 두 사람이 나누는 짧은 대화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대화에 도달하기까지 할애한 시간이 대사의 진정성을 증폭해줘. 급한 속도로 몰아치는 유튜브 영상에 익숙해진 마음이 영화를 보고 뭉근하게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어.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된다'는 당위는 현대인에게 요구되는 덕목이야. 우리는 시간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가지. 그런데 말이야, 돈을 벌기 위해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고 나머지 시간을 도파민을 느끼며 때우는 일상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니? 그렇게 중요하다는 시간을 돈과 도파민이라는 부수적인 가치를 위해 소진하는 셈이잖아. 이런 모순이 해결되지 않고 당연하게 자리 잡은 사회에서 '해 먹는' 일마저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야. 시성비(시간 대비 성능)를 따지면 비효율적인 요리보다 밀키트를 데워 먹는 게 훨씬 낫다는 이성적 판단은 어쩌면 자본주의 체제의 산물일지도 모르지.
현대인은 먹기 위한 노동을 남의 손에 맡겨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하기 위한 노력마저 외주화해 버렸어. 우후죽순 들어서는 결혼정보회사, 조건을 따지느라 정형화되는 무색무취의 연애 양상이 그 예시야. 그 결과 사람들은 시성비 떨어지는 관계를 회피하고 SNS·쇼핑·게임·여행 등에 과몰입하게 되지. 자기효능감을 채울 기회를 냉동식품에 내줬듯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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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먹이는 일은 굉장히 능동적이고 영적인 행위야.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향기롭고 입맛 도는 결과물을 내놓고, 그것이 눈앞에서 금세 사라지더라도 우리 몸과 마음에 남는다는 걸 인지할 수 있으니까.
이런 삶의 태도는 사랑할 때도 똑같이 적용돼. 손해 보지 않으려고 이것저것 재느라 자신의 본심과 상대의 진심을 간편식처럼 때워버리는 관계에서는 시성비를 챙길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사랑의 기쁨을 누릴 수 없어. 중요한 건 시간을 아낄 때가 아니라 끈기 있게 들일 때 그 가치를 온전히 드러내는 법이야. 20년간 호흡을 맞추며 요리사로서 서로 존중했던 도댕과 외제니처럼.
오늘 한 끼는 요리해서 먹어보는 것 어때? 간장계란밥부터 시작해도 좋아. 그러다가 어느 날은 불맛을 내기 위해 간장을 팬에 졸여도 보고, 색감과 영양소를 더하기 위해 쪽파를 송송 썰어넣어도 보는 거지. 밥만 먹으면 퍽퍽하니까 곁들일 김치찌개도 만들어 보고, 손님이 놀러 온 날이면 마트에서 할인하는 앞다리 살로 제육볶음도 시도해 보는 거야. 그렇게 조금씩 시간이 자아내는 미식의 세계로 나아가길 바랄게.
답장함
주영화
zoo young flower
우리는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너무 멋진 글이에요 언니 짱멋있맨
계승이 중요시되는 세상이 오면 세대갈등과 혐오가 줄어들 것 같아서 기대가 되네요
연장자들을 늙은이, 꼰대로 규정짓고 혐오하는 분위기가 사라지고 세대 간 상호존중이 이루어지는 세상 굿
세 자매 중 맏딸로 태어나 언니 역할이 익숙했던 나여서, 사회에서 만난 동생들에게 혹여나 꼰대스럽게 행동하고 있진 않을까 노심초사했었어. 똑똑하고 다정한 너희를 알게 된 뒤부터는 화석이니 세대 차이니 하는 걱정은 사라지고 마냥 아이처럼 노는 내 모습을 발견했지. 그때 깨달았어, 사람을 사람으로 볼 줄만 안다면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해진다고.
선임자의 뒤를 이어받는 것이 계승이잖아. 어떤 방향에서는 너희가 나보다 앞서 있다고 느껴. 보석처럼 내 삶에 날아든 너희가 남긴 것들, 나도 잘 계승해서 다음 후임자에게 넘겨주도록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