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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터어리 Aug 14. 2024

자전거로 연 세계

주영화의 아홉 번째 레터

  푹푹 찌는 무더위와 예고 없이 쏟아지는 폭우로 가만히 있기만 해도 지치는 2024년의 여름. 이 날씨에 자전거 여행을 떠난다는 건 단단히 미친 짓이야. 그런데 말이야, 내가 바로 그 미친 인간이었어.


  오늘은 영화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해줄게. 내가 며칠 전에 국토종주를 떠났거든. 완주에 성공했냐고? 궁금하면 오늘 레터 끝까지 읽어줘!


미친 날씨지만 하늘은 예뻤던 국토종주길


  국토종주길은 이명박 정부가 진행한 4대강 사업에서 파생된 관광 코스야. 한강, 낙동강, 금강 등을 따라 자전거 길이 나 있고, 각 인증센터에서 도장을 찍으면 메달 같은 기념품을 받을 수 있어.


  일반적으로 ‘국토종주’라 함은 아라 서해갑문에서 출발해 낙동강 하굿둑에서 끝나는 인천-부산 코스를 뜻해. 총 633km이고 중간중간 ‘업힐’로 불리는 고개와 ‘다운힐’로 불리는 내리막길이 있어서 다채로운 자전거 여행(이라 쓰고 훈련이라 읽는다)을 즐길 수 있지.


  내가 국토종주를 떠나기로 결심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로드 자전거를 어떻게 타게 됐는지 알려줄게. 바야흐로 코로나19가 창궐하던 2021년 4월. 나는 자전거를 타는 동아리 친구들을 따라 덜컥 중고 로드 한 대를 구매했어. 그러고 며칠 안 가 겁도 없이 한강 한 바퀴를 달렸지. 88km 정도의 첫 장거리 라이딩이었는데 어깨며 다리며 안 아픈 데가 없어서 울고 싶었던 기억이 나. (실제로 한 두 방울 흘렸을지도..)


100km를 넘었던 첫 라이딩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그 고생을 하고도 매운맛이 모자랐는지 친구들이랑 국토종주를 가기로 결정했어. 무턱대고 출발했다가 코로나 밀접접촉자로 분류됐다는 전화를 받고 첫날에 바로 집으로 돌아와야 했어. 나 빼고 종주를 이어가는 친구들의 소식을 들으며 속상한 마음이 들더라. 그때부터 오기가 생겼는지 자전거를 잘 타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


  이후 훈련을 한답시고 남산이며 북악산을 올랐어. 서울을 벗어나 팔당이나 양평 두물머리를 가기도 했지. 당시에는 운동을 못하는 몸이어서 러닝을 뛰면 페이스가 10분 대로 나오고, 하루 운동하면 다음 날은 근육통으로 몸져눕기 일쑤였어. 그런데 있지, 그 어처구니없이 부족한 기록과 괴로운 근육통이 자꾸만 나를 집 밖으로 불러내더라고. ‘어차피 아파 봤잖아. 한 번 더 힘들면 뭐 어때.’ 운동이 주는 고통이 더 이상 미지의 세계가 아닌 내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순간이었어.



♫•*¨*•.¸¸♪✧



  그해 9월 춘천에 갔을 때 투어 라이딩이 주는 매력에 푹 빠졌어. 도시에서는 만날 수 없는 동식물, 시골길이 주는 탁 트인 개방감, 눈 앞에 펼쳐진 몽글몽글한 구름, 정직하게 밟다 보면 언젠가 도착하는 목적지. 여행을 마음먹어야 몇 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했던 춘천을 온전한 내 힘으로 도달했다는 성취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뿌듯했어. 그때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른 거야. 자전거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꿈꾸는 국토종주를 꼭 완주하고 말겠다고.


비가 와도 마냥 신났던 1일차 우리


  이 꿈은 3년이 지난 올해 이루게 됐어. 그간 졸업이며 인턴이며 바삐 지내다가 겨우 일정 맞는 친구들과 시간을 낼 수 있었거든. 다만 한여름 장마철에 떠나게 됐다는 사실이 흠이라면 흠이었지. 실제로 우리는 5일 내내 비와 뙤약볕을 맞으며 하루 100km 넘게 달렸어. 나와 한 친구는 넘어져서 다치는 바람에 병원을 전전하기도 했어. 비와 땀과 피에 젖은 몸에서는 냄새가 났고 쌓이는 피로감에 말이 없어지는 때도 있었지. 부산에 도착할 즈음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어. “거의 다 왔는데 성취감이나 기쁨은 안 느껴지고 그냥 빨리 끝내고 싶다”고. 그 말이 얼마나 웃기고 공감되던지.


  결국 우리는 완주에 성공했어. 이 글을 쓰는 지금 떠오르는 건 죄다 고단한 기억이 아니라 낯설고 신기했던 순간들이야. 라이딩 중에 만난 크로아티아 부자(父子)와 국토종주에 관해 나눴던 대화, 구름재 정상에서 마주한 고요한 강물의 표면, 도로로 불쑥불쑥 튀어나오던 이름 모를 작은 새와 개구리와 고라니, 화이팅을 외치며 짧게 스치는 여행객들. 자전거를 타지 않았다면 절대 알 수 없던 세계였지.


다들 힘들 때 생각나는 사람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극악 업힐 중 하나인 박진고개에서 자전거를 끌고 올라갈 때야. 경남 의령군 낙서면에 위치한 이 고개에는 국토종주를 하는 사람들이 남긴 ‘낙서’가 벽면을 따라 주욱 이어져. 거기엔 ‘죽겄다’ ‘살려줘’ 같은 문구와 비속어가 쓰여 있어서 흐뭇한 동지애가 느껴져. 가장 많은 문구는 ‘사랑해’였어. 이 힘든 업힐을 오르며 다들 어쩜 그렇게 사랑이 넘쳐나는지. 누군가는 가족의 완쾌를, 누군가는 하늘로 떠난 이를 그리며 한 자 한자 새겨 놓은 걸 보니 왠지 모르게 뭉클해지더라. 수많은 이들의 삶과 서사가 박진고개에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고 있었어. 도전은 찰나고, 우리네 인생은 계속 이어지는 법이니까.


  서울에 있는 쾌적한 내 방에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글을 쓰는 이 시간이 너무 소중해서 아마 더위가 꺾이기 전까지는 자전거를 타지 않을 것 같아. 사실 지금은 자전거의 ‘자’자도 보기 싫어. 그래도 종주 수첩의 비어 있는 페이지를 보고 있자니 왠지 몇 년 내로 다시 종주 길에 오를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이미 고생해 봤잖아. 한 번 더 힘들면 어때.


사진으로 안 담기는 아름다운 시골 풍경


  도전이란 마냥 아름답지도 않고, 언제나 성취와 승리를 허락하지도 않고, 매번 포기와 눈물과 패배감을 안겨주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 다른 문을 열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누군가의 서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겠지.


  2020년까지는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자전거 친구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 많은 인생과 이야기를 마주하면서 나의 울타리를 넓힐 수 있었으니까. 그 도전을 함께하는 수많은 여행자에게 삶이란 축복이 가득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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