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터리스트의 과학 이야기 2.
밥과 샬롯은 일본 도쿄에 여행 온 미국인입니다.
같이 온 건 아니고 도쿄의 한 호텔에서 우연히 만났죠.
미국인인 이 둘은 머나먼 일본 도쿄에서는 철저하게 이방인입니다.
문화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기에 이래저래 어려움을 겪죠.
낯선 곳에서 함께 '소외감'을 느낀 이 두 남녀는 서서히 가까워집니다.
같이 여행하고 얘기하고 많은 시간을 보내죠. 그리고 다시 각자의 길을 갑니다.
스칼렛 요한슨과 빌 머레이가 주연을 맡은 2003년도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대략적인 줄거리입니다.
썩 재밌는 영화는 아닌데 나름 아카데미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작품이죠.
이 영화를 보면요(관람을 추천하진 않습니다. 그닥 재밌진 않아요)
일본인들과 이들의 관계가 꽤 흥미롭게 그려진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일단 미국인인 이들은 일본인들의 영어 발음을 좀 웃기고 한심하게 여기죠.
물론, 이방인인 이들 역시 일본인들 사이에서 종종 바보 취급을 당합니다.
그러니까, 전혀 다른 문화권에 속한 이들이 서로를 좀 한심하게 여기는 뭐 그런 건데요.
전 이 영화에서 이런 부분들을 특히 인상적으로 보았습니다.
서로 다른 말을 사용하는 서로 전혀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
적절한 통역이 이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여러 일들, 그리고 그때그때 각각이 마주하는 감정들.
뭐 그런 것들 말입니다.
그런 몇몇 부분이 흥미롭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땐 썩 재밌는 영화가 아니었기에 전 한동안 이 영화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이 영화를 다시 떠올린 건 이 영화를 본 지 한 10년도 더 지났을 때였죠.
떠올린 이유는 과학,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과학책 작업 때문이었습니다.
10년도 더 지났을 때, 그때 전 출판사에서 과학책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말씀드렸듯 전 문돌이 출신이지요.
사실, 저만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출판사란 곳은 그 어느 곳보다도 문과 출신 비중이 높은 그런 곳이거든요. (제 경험상 출판사 편집자들의 얼추 95% 이상은 문과 출신이었습니다)
문과 출신들이 모여서 과학책을 만든다. 이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저희 회사 역시 그랬습니다. 그렇다고 그냥저냥 대충 표지 이쁘게 뽑고 마케팅으로 밀어붙이는, 뭔 말인지 이해도 안 되는 그런 책을 만들 순 없었기에 회사는 일단 저희 과학책 담당 문돌이팀의 과학 교육부터 준비해야만 했죠.
훌륭한 선생님들을 많이 모셨습니다. 대학교 교수님, 일타 학원 강사님, 그리고 각 과학 분야의 쟁쟁한 연구원분들까지.
많은 선생님들을 섭외하고 그분들에게 틈틈이 과학 이야기를 청해 들었죠.
유익하고 만족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과알못 문돌이인 제가 과학에 대해 그래도 꽤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죠.
하지만 사실 개인적으로, 지식의 얻음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웠던 부분은 따로 있었습니다.
"과학에 대해, 자연에 대해, 여러 호기심을 품어볼 수 있다는 것"
전 그게 정말로 즐겁고 좋았습니다.
의문을 품어보는 것 자체가 주는 만족감이 대단했지요 (끝내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경우에도 말입니다)
아무튼 말이죠.
제가 스칼렛 요한슨과 빌 머레이를 오랜만에 떠올린 것도 바로 이 즈음의 일이었습니다.
응? 과학 이야기 듣고 하다가 갑자기 그 영화는 왜요?
과학 이야기를 듣고 여러 과학 지식을 습득하면서,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제 안의 호기심을 발견하면서, 그리고 그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질문을 던져보고 공부하면서 전 알게 되었거든요.
일본인과 미국인 사이에 존재하는 문화적 간극보다도 훠어얼씬 더 큰 어떤 간극이 과학인과 비과학인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평생 과학을 공부하고 연구해 온 분들(이분들이 보통 과학책 저자가 되시죠), 그리고 과학을 잘 모르지만 용기 내 과학책을 집어드신 분들(이분들은 보통 두 번 다시 과학책을 안 집게 되시죠) 사이에는요. 정말로 거대한 간극이 있습니다.
"과학 이야기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내가 느낄 것인가? (혹은 전달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 있어서 바로 이 간극이 등장하곤 하죠.
문돌이 : "선생님, 와 진짜 신기하네요. 그럼 이게 이런 의미가 있는 건가요?"
선생님 : "의미라..글쎄요..이 방정식을 보세요. 완벽하죠. 아무 오류가 없습니다. 계산은 끝났어요. 그게 다입니다"
문돌이 : (전 수학을 못 하는데...) "아..네!ㅎㅎ^^"
약간 과장을 하면 이런 식이었습니다.
제 경험상, 과알못과 과학 장인들은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이 좀 많이 달랐습니다.
저 같은 과알못 문돌이들은 자꾸 무언가의 의미가 궁금하고 그런데 과학 장인들은 과알못들이 저걸 왜 궁금해하는 건지, 왜 자꾸 의미를 찾고자 하는 건지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러다 보니 답답함이 쌓여가고 그런 경우도 많았지요.
(물론 여러 과학 지식을 습득하게 된 건 좋았지만 말입니다)
여러분이 학창 시절 과학 수업 시간에 높은 확률로 들어보셨을
"오케이? 자~ 이해 안 되면 그냥 외워라~" 라는 말 역시, 아마 그래서 나온 말이었을 겁니다.
과알못과 과학 장인은 알고 있는 지식도, 생각하는 방식도 꽤나 다른데..
그래서 이들 사이에는 친절하고 인내심 넘치고 재밌게 말하는 그런 통역사가 꼭 필요한데..
그런 통역사는 별로 없고, 시간은 부족하고, 어쨌든 시험은 다가오니까.
이해 안 돼?? 그럼 외워.
이렇게 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해 안 되면 그냥 외워야 하는 건 일단 당장 시험을 봐야 하는 중고등학생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지요.
앞으로 제가 해드릴 과학 이야기에는 시험도 없고 숙제도 없습니다. (가끔 쉬운 퀴즈 정도는 낼 수도 있겠네요)
그러니 굳이 마음 급하게 '에이씨 그냥 외워야지..' 할 필요가 전혀 없지요.
그냥 외우라는 말을 하지도, 복잡한 수식을 때려 박아가며 말하지도 않겠습니다.
그저 천천히 긴 호흡으로 하나하나, 친절하고 또 되도록 재미있게.
과학 이야기를 그렇게 저만의 방식으로 열심히 통역해 드리겠습니다.
과학도 통역이 되나요?
네, 잘 됩니다. 걱정 마세요 :)
(레터리스트의 과학 이야기 3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