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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tterist Dec 15. 2024

남해가 남해가 아닐 수도 있다.

'우리의 바다'를 보고 나서 (1)

내가 대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다.


첫 전공 수업의 첫 수업 시간.

술집과 엠티 자리에선 마주한 적이 몇 차례 있지만 강의실에서 뵙는 것은 처음이었던 우리 과의 전공 교수님은 나를 포함한 햇병아리 전공생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더랬다.


"여러분, 우린 남해 바다를 남해 바다라고 부르죠. 그런데 남해가 남해인 건 우리가 사실 여기, 한국의 본토에서 이걸 보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이건 사실 제주도에 사시는 분들 입장에서는 좀 애매한 말인 겁니다. 우리가 별생각 없이 말하는 남해가 누군가에게는 북쪽에 있는 바다, 북해일 수도 있는 것이죠.

(중략)

여러분이 왜 사회학이라는 돈도 안 되는 전공을 선택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사회학은요. 대충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는 그런 연습을 계속하는 뭐 그런 학문입니다. 잘 오셨습니다."


토씨 하나까지 정확하게 워딩이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첫 전공 수업의 첫 수업 시간에 내가 들은 이야기는 저게 전부였다. 남해가 남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시간은 많이 흘렀고 멋진 목소리와 분위기로 저 이야기를 해주셨던 교수님도 이미 정년퇴직을 하셨지만 ‘남해가 정말 남해가 맞느냐?’라고 의심해 버릇하는 나의 못된 습관은 여전하다. 이건 내가 하필 저런 전공을 공부한 탓도 있겠으나 기본적으로 나의 성미 자체가 원체 좀 독불장군이기도 하고, 또 그런 내가 나와 무척이나 비슷한 성격을 가지신 나의 아버지 밑에서 오랜 기간 자란 덕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 난 남의 말을 곧이곧대로 잘 믿지 않는다.


설령 그 말이 넷플릭스에서 막대한 돈을 쏟아부어 만든 걸작 다큐멘터리 속의 말일지라도, 그 다큐멘터리의 나레이션을 전직 미국 대통령이 맡았을지라도 말이다.


오늘의 이야기는 나의 그러한 성미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의 바다"


뭐 좀 볼 거 없나 넷플릭스를 훑어보던 내 눈에 들어온 이 멋진 다큐멘터리는 장장 5일에 걸쳐 내 저녁 시간을 사로잡을 만큼 대단히 훌륭했다.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 북극해, 남극해. 이렇게 다섯 개의 큰 바다를 한 에피소드에 하나씩 다루는 이 5회짜리 다큐멘터리 속에는 듣도 보도 못한 바다 생명체들의 경이로운 생태가 아주 잘 담겨있었다. 이런 걸 대체 어떻게 영상으로 찍어냈을까? 와.. 진짜 신기하다.. 하.. 역시 굳이 책만 성역일 필요는 없다니까? 이 다큐보다 유익할 수 있는 책이 뭐 몇 권이나 있겠냐고.. 대박.. 와.. 근데 회 먹고 싶다.. 등등. 중구난방의 감상을 내뱉으며 나는 이 다큐에 푹 빠져있었다. 5일 동안 말이다.


나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내가 저런 식의 감상을 내뱉는 동안 나의 아내 역시 본인의 감상을 종종 내뱉곤 했는데 감상의 다채로움 측면에서는 내가 아내보다 몇 수는 위였다.


"어떡해..." (체력이 약해서 어미를 잘 따라가지 못하는 새끼 북극곰을 보며),

"어떡해..." (범고래 무리에게 지능적으로 공격당하는 게잡이 물범과 웨들 물범을 보며),

"어떡해.." (절벽에서 뛰어내렸으나 바다에 입수하지 못하고 땅에 떨어져 그대로 생을 마감한 큰부리바다오리 새끼를 보며).


아내는 이처럼 어떡하느냐는 말만을 계속 반복했는데 딱히 나의 답이 필요한 말은 아닌듯하여 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각자의 감상 방식은 달랐지만 아무튼 나와 아내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다큐를 매우 풍부하게 잘 소비했는데,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이 다큐를 통해 글 한 편을 뽑아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내 마음에서 싹튼 것은 이 다큐의 5회 차, 그러니까 '남극해' 편을 보고 있을 때였다.


싹튼 욕심이 만들어낸 첫 번째 생각은 평범했다. 여기 신기한 동물들이 엄청 많이 나왔으니까 걔네들에 대한 이야기를 감상문 식으로다가 슥 풀어도 글 한 편은 충분히 되겠는데? 정도의 나이브한 생각, 그냥 그 정도였다. 하지만 평범한 것은 자극적인 것에게 늘 뒤처지는 법. 나의 저 평범한 생각은 이내 떠오른 두 번째 생각에 의해 금방 묻혀버렸는데 그 두 번째 생각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냥 감상문 쓰는 건 재미없지. 뭐라도 좀 깔 거리를 한번 찾아보자.’


이 생각은 남의 말을 잘 믿지 않고 일단 의심부터 해대는 나의 평소 성미와도 아주 궁합이 좋은 생각이었기에 그때부터 나는 혹시라도 뭐 꼬투리 잡아볼 만한 게 없나 하는 못된 마음가짐을 품은 채 남은 다큐를 보았다. 그리고 다큐의 나레이션을 맡은 버락 오바마는 나의 저러한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이 아주 딱 적절한 타이밍에 새로운 동물 하나를 소개해 주었는데 그게 바로 남극크릴새우라는 동물이었다.


남극크릴새우,

당신은 이 동물을 아는가? 이 동물은 무척이나 작은 갑각류다(막 안 보일 정도로 작은 건 아니고 대충 우리가 먹는 새우젓 중에서 ‘육젓’이랑 비슷한 정도의 크기다). 내가 방금 이 동물에 대해 ‘무척이나 작은 새우다’라고 하지 않고 ‘무척이나 작은 갑각류다’라고 한 것은 실제로 이 동물이 이름은 새우지만 학술적으로는 새우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담인데, 난 이런 것이 꽤 불만스럽다. 누가 봐도 새우처럼 생겼는데 과학자들의 어떤 분류 기준에 의하면 이건 새우가 아니란다. 과학도 결국 사람 좋자고 하는 것일진대 이게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런 분류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어서 난 이런 걸 썩 좋아하진 않는다. 물론, 내가 무식해서 하는 소리일 것이다.


어쨌든, 이 누가 봐도 새우지만 새우가 아닌 남극크릴새우라는 동물은 ‘새우’라는 단어만 제외하면 자신의 이름에 무척이나 충실한 그런 동물이다. ‘남극’크릴새우답게 남극해 부근에 서식하고 역시나 남극‘크릴’새우답게 무척이나 작다(크릴이란 단어는 노르웨이어로 ‘작은 치어’ 따위를 뜻한다). 이 작디작은 갑각류는 작디작은 생명체 대부분이 그러하듯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데 그 무리의 규모는 실로 대단해서 이 남극크릴새우 무리가 있는 곳은 바다 자체가 온통 핑크빛으로 보일 정도다.


핑크색이 다 남극크릴새우다.


다큐에서 오바마는 이 작은 갑각류를 보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 남극크릴새우는 비록 하나하나의 크기는 무척이나 작지만 엄청나게 많은 개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종’ 전체의 질량을 놓고 따져보면 지구상에서 가장 으뜸 가는 종이라고, 이들 전체의 질량은 대략 4억 톤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이다.


이 말을 듣고 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가장 으뜸이다’라는 말은 꼬투리 잡아볼 만한 게 뭐 없나 벼르고 있던 나에게 아주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난 곧바로 얼추 계산을 해보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사람으로 한번 해보자, 지구에 사람이 대충 80억 명, 한 명당 몸무게를 대충 50키로라고 잡아보면... 이것도 대충 4억 톤 정도겠네? 비슷비슷하네? 비슷한 거면 써먹기 좀 애매한데... 사람 말고 딴 거 계산해 볼 만한 거 뭐 있지?


오바마의 말을 검증해 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어떤 종의 대략적인 개체수, 그리고 그들 개개인의 대략적인 몸무게였으나 아쉽게도 ‘인간’ 말고 다른 종에 대해서는 내가 저 두 가지 정보를 대략적으로도 알지 못했기에 그날의 검증은 저 정도 수준에서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메모장 어플을 켜서 ‘남극크릴새우 총 질량 검증’이라 적은 뒤 남극해 이야기를 마저 시청했다. 못된 마음가짐을 다시 내려놓은 채 말이다.


다음날, 나는 짬을 내어 관련 정보를 자세히 알아보기 시작했다. 어떤 ‘종’ 전체의 질량을 의미하는 단어가 우리말로는 생물량(혹은 생물체량), 영어로는 biomass라는 것도 이날 처음으로 알 수 있었다. 남극크릴새우, 생물체량, 바이오매스, 최대 등등의 단어를 이리저리 조합하며 정보를 찾던 나는 오바마의 말이 사실이 아님을 외국의 한 논문을 통해 금세 알 수 있었다. 남극크릴새우는 생물체량 측면에서 굉장히 상위권에 속하는 동물은 맞았으나 결코 으뜸은 아니었다. 생물체량으로 지구에서 으뜸가는 동물은 바로 '소'였다.


혹 이것도 잘못된 정보는 아닐까 하는 마음에 조금 더 관련 논문들을 살펴본 뒤, 나는 본격적으로 글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제목을 뭘로 할까, 오바마 말이라고 다 맞는 건 아니다? 너무 노골적이라서 촌스러운데? 생물체량을 아시나요? 단어 어감이 썩 끌리지 않는데? 고민을 하던 나는 제목은 나중에 지어도 되니까 일단 글을 한번 풀어보자 마음을 먹었고 조금씩 이런저런 글을 풀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걸. 글은 평소보다 훨씬 더디게 풀려나왔고 그나마 힘겹게 나온 글들도 모두 채 5분을 넘기지 못하고 내 변덕에 의해 폐기 처분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건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 몹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저 시점의 나는 매우 짜증을 냈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글이 술술 풀려나올 만큼 내 생각이 풍성치는 못했나 보다' 생각한 나는 일단 끄적여보기를 멈추고 다시금 넷플릭스를 켰다. 그리고 남극크릴새우에 대한 오바마의 설명을 새초롬한 표정을 한 채 재차 듣던 나는 이내 속으로 아이고! 아뿔싸!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섣부른 욕심 때문에 내가 참으로 큰 실수를 할뻔했구나' 깨닫고 내가 가슴을 쓸어내린 것은 다시 시청한 넷플릭스 속의 오바마가 남극크릴새우에 대해 정확하게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Antarctic Krill....블라블라...the greatest mass of any WILD animal...블라블라.."


WILD animal, 그러니까 ‘야생’ 동물.


다큐 속의 오바마는 남극크릴새우가 야생 동물 중에서 생물체량이 가장 큰 동물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고 ‘소’는 야생 동물이 아닌 가축이기에 오바마의 저 말은 틀림없이 맞는 말이었다. 나는 헛된 희망과 못된 마음가짐을 붙잡고 이 부분을 다시 몇 차례 돌려봤지만 오바마는 매우 분명한 발음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W I L D Animal 이라고 말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나는 글의 방향을 전면적으로 수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건 결과적으로 그리 나쁜 일이 아닐 것이다. 라는 생각으로 마저 글을 써보자면 오바마와 나와 남극크릴새우 사이에 있었던 이 작은 해프닝은 나로 하여금 ‘진실’이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붙잡을 수 있게 해 주었다.


'남극크릴새우는 생물체량이 가장 큰 동물이다' 라는 말은 진실이 아니지만 '남극크릴새우는 생물체량이 가장 큰 야생동물이다' 라는 말은 진실이다. ‘야생’이라는 단어 하나가 덧붙거나 빠지는 것에 따라 진실이 진실로 남을 수도, 남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삿짐을 싸고 옮기고 다시 풀다 보면 왜인지 모르게 꼭 사라지는 물건이 있는 것처럼 말 역시도 그러한 법인데, 그리고 또 말이란 그렇게 옮겨지는 과정 속에서 때론 덧붙기도 하는 법인데 이러한 누락과 덧붙음에 따라 처음엔 분명 진실이었던 문장이 때론 진실이 아니게 될 수도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 덕에 나는 남극크릴새우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있었다.


그렇구나. 말과 글을 옮긴다는 건 늘 위험을 동반하는 일이겠구나. 옮겨지는 횟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 위험은 더욱 가열차게 증폭되는 것이겠구나. 헌데 말과 글이란 본질적으로 결국 옮겨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진대 이를 대체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생각이 이에 이르자 나는 글을 쓰는 것이 참으로 두려워졌다. 그리고 두려움을 느껴서인지 괜히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는데 나의 화는 크게 말 하는 이와 널리 글 쓰는 이들을 향해 있었다.


말과 글의 이러한 특징을 안다면 크게 말 하는 이와 널리 글 쓰는 이들은 모두 자신들의 말과 글이 자신을 떠나간 뒤에 마치 탈진할 것만 같은 피로를 느껴야만 마땅할진대 그들 대부분이 딱히 그래보이진 않는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일까? 내 식견이 여전히 모자란 탓일까? 아니면 그들의 체력이 기가 막히게 좋은 덕일까? 조금 건방진 말일 수도 있겠으나 아마 둘 다 아닐 것이다. 이는 분명 크게 말 하는 이와 널리 글 쓰는 이들 대부분이 말과 글의 저러한 특징을 미처 모르거나, 알고도 애써 외면하거나 혹은 적극적으로 외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적극적으로 외면하는 이가 물론 가장 악질이겠으나 미처 모르는 것 역시 참으로 통탄할 만한 일이기에 나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들지 못했다.


‘속보’와 ‘단독’이라는 단어의 무게는 이 단어를 누구보다 많이 사용하는 이들의 무책임함으로 인해 깃털보다 가벼워진 지 이미 오래고 '충격', '폭로', '특종'이란 단어의 저릿함도 이들이 그저 누군가의 도파민 한 줌을 더 뽑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남용된 탓에 이미 슴슴해진지 역시 오래다. 레거시 미디어라 불리는 이들과 뉴미디어라 불리는 이들의 차이는 이처럼 저들이 각자 즐겨 사용하는 단어가 무엇이냐 하는 것에만 얄팍하게 남아있을 뿐, 어차피 저들 모두의 단어는 이미 가볍디 가볍고 슴슴하디 슴슴해졌다는 점에서 대단히 평등하기에 세상은 이리도 시끄러운 것일지 모른다.


그런 시끄러운 세상이기에 사실 이제는 ‘무엇이 진실인가?’라는 물음조차도 섣불리 글로 옮기기가 나는 어렵다. '무엇이 진실인가?' 라는 문장은 무엇이 진실인지 아직은 모르겠으나 어쨌든 진실이 있긴 있을 것이란 헛헛한 전제를 두고 있는 것 같기에, 나는 섣불리 내 글에 저 말을 담을 수가 없다. '무엇이 진실인가?' 보다는 ‘진실이란 무엇인가?’라는 말부터 곱씹어봐야만, 그래야만 비로소 나는 이 글을 마저 쓸 수 있을 것이다.


남해가 남해가 아닐 수도 있다 말씀해 주신 교수님과 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표어를 가진 대학의 교정에서 사제의 연을 맺었으나, 세상의 상황이 이러할진대 ‘진리’라는 단어는 감히 이를 상상해 보기조차 민망스럽다. 지금으로서는 말이다.


작디작은 갑각류에서 시작된 글이 세상 무거워진 것은 아마도 그 작디작은 갑각류가 전체 종의 생물체량으로는 야생 동물 중에서 가장 무겁기 때문일 것이다.



2024. 12. 15.

남해가 남해가 아닐 수도, 새우가 새우가 아닐 수도 있는 세상에서.

레터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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