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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tterist Dec 15. 2024

남극크릴새우는 무슨 낙으로 사는가.

'우리의 바다'를 보고 나서 (2)

남극크릴새우의 생태에 대한 버락 오바마의 설명을 들으면서 내가 메모장 어플에 ‘남극크릴새우 총 질량 검증’ 이라는 말을 써두었단 이야기를 일전에 한 바 있다. 헌데 사실 저게 전부는 아니었다.


그날 내가 같은 메모장에 적은 말 중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근데 남극크잉새우 무슨 낙으로 살지?’(내 핸드폰은 아이폰인데 아이폰은 오타가 잘 난다. 그리고 메모장 어플의 내용은 어차피 나 혼자 보는 것이기에 오타를 굳이 수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남극크릴새우의 생물체량에 대한 글을 쓰기 이전에 원래 다뤄보고자 했던 주제도 바로 이것이었다.


남극크릴새우... 쟤네는 대체 무슨 낙으로 사는 걸까..?


나는 그게 궁금했다.


셀 수 없이 많은 남극크릴새우들의 거대한 무리를 본 뒤 나는 이와 같은 궁금증을 가졌고 옆에서 함께 다큐를 보던 아내에게 “근데 쟤네는 대체 무슨 낙으로 사는 걸까?” 라는 질문을 건넸으나 아내는 딱히 남극크릴새우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해주지는 않았다. (아내는 보통 귀엽게 생긴 생명체에게 자신의 감정을 후히 이입해주는데 남극크릴새우는 귀엽게 생긴 편은 아니다. 객관적으로 봐도 말이다)


때문에 나는 그냥 나 홀로 남극크릴새우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당신도 한번 생각해 보라. 당신은 남극크릴새우다. 당신은 작고 미약하다. 평생 당신이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곤 해조류 찌끄레기, 그리고 당신보다도 작디작은 플랑크톤뿐이다. 반면, 당신을 먹고자 하는 이들은 세상에 그야말로 그득하다. 펭귄과 온갖 물고기는 물론이고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존재인 흰긴수염고래마저도 당신과 당신 벗들을 섭취하려 한다. 당신에 대한 세상의 관심은 늘 그런 식이다. 당신은 펭귄의 아침 식사이자 물고기의 점심 식사고 고래의 성대한 만찬 메뉴다. 이런 당신을 보고 인간이라는 종의 학자들은 당신이 바다 생태계에서 무척이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야기한다. 칭찬인지, 조롱인지 모르겠다. 아니 칭찬이나 조롱이라면 오히려 나을 수도 있겠다. 칭찬이나 조롱을 한다는 건 어쨌든 그들이 당신을 하나의 생명체로 대하고 있다는 증거니까 말이다.


심지어 얼마 전부터는 당신으로 만든 오일이 인간의 건강에 좋다는 소문까지 퍼지고 있다. 당신, 정말 큰일 났다.


당신은 분명 생명체고 모든 생명은 존엄해야 하건만 안타깝게도 세상 대부분은 당신의 존엄성에 거의 관심이 없다. 아니 사실, 세상이라는 게 뭔지도 당신은 알 수가 없다. 당신의 세상이라는 것은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또 다른 남극크릴새우일 뿐이다. 당신 앞에도, 위에도, 아래도, 뒤에도, 대각선 방향에도 말이다. 심지어 당신 삶의 거의 모든 시간이 그러하다. 당신은 당신과 함께 하는 수많은 남극크릴새우에 둘러싸인 채 평생을 이리저리 함께 휩쓸려 다니다가 누군가의 아침, 혹은 점심, 혹은 저녁, 혹은 건강기능식품이 된다. 그게 당신의 평생이다.


자신과 똑 닮은 자식을 낳아 길러내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인 다른 수많은 종과 마찬가지로 당신도 자식을 낳기는 하지만 그 자식의 대다수는 당신보다도 먼저 생을 마감할 것이다. 하지만 너무 슬퍼할 필요는 없다. 사실 이 비극을 당신은 제대로 파악할 수조차 없을 테니까 말이다. 당신의 자식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것은 분명하지만, 대체 어떤 남극크릴새우가 당신의 자식인지 당신은 알 방법이 없다. 당신의 세상이란 건 이미 말했듯, 어차피 다 남극크릴새우일 뿐이니까 말이다. 물론, 어딘가에 있긴 있을 당신 자식의 세상, 당신 자식의 자식의 세상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귀엽지 않은 생명체에게도 감정을 후히 이입해보는 능력이 내게는 있기에 나는 이렇게 남극크릴새우의 삶을 상상해 보았다. 무슨 수를 써도 바다라는 세상에서 결코 주연일 수 없는 삶, 주연은커녕 그저 만인의 식량, 모두의 맛집 취급 밖에는 받지 못하는 그런 삶. 이건 대단히 명백한 코스믹 호러였다.


여기까지 생각한 후에 나는 앞서 쓴 글(남해가 남해가 아닐 수도 있다)을 본격적으로 작업하기 위해 남극크릴새우에 대한 이런저런 정보를 긁어모으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나는 몹시 흥미로운 정보 하나를 추가로 얻을 수 있었다.


그건 바로 나와 비슷한 시각으로 남극크릴새우를 생각한 사람이 이미 있다는 것, 그리고 심지어 그 사람은 남극크릴새우에 대한 이런 생각을 애니메이션 영화로 만들어낸 뒤 전 세계에 성공적으로 개봉시키기까지 했다는 것이었다. 


그 대단한 사람이 바로 영화, '매드 맥스' 시리즈의 아버지라 불리는 영화감독, '조지 밀러' 되시겠다. (물론, 남극크릴새우가 매드 맥스 시리즈에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남극크릴새우는 조지 밀러 감독의 또 다른 시리즈인 ‘해피 피트’, 그중에서도 2편에 등장한다.)


이 정보를 입수한 나는 곧바로 해피 피트 2편을 보기 위해 쿠팡플레이 측에 1,300원을 지불하고 그 내용을 확인했는데 해당 부분의 내용인즉슨 이러했다. 


해피 피트 2에 등장하는 윌과 빌은 남극크릴새우인데 둘이 친구다. (여담인데 여기서 대박인 건 윌 역의 성우가 브래드 피트, 빌 역의 성우가 맷 데이먼이라는 점이다. 그야말로 초호화 캐스팅이다) 윌은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의 남극크릴새우고, 빌은 윌에 비해 수동적이고 순응하는 성향을 가진 남극크릴새우다. 윌은 남극크릴새우 무리 속에서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빌에게 함께 무리의 끝 부분에 가보고자 제안한다. 윌의 제안을 들은 빌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끝이란 건 없으니 헛수고하지 말라고 하지만 진취적인 윌은 그런 빌에게 자신의 꼬리를 내보이며 이 꼬리가 나라는 존재의 끝인 것처럼 세상 모든 것에는 결국 끝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식의 철학적인 대화가 은근 수준 높게 등장한다) 결국 윌과 빌은 남극크릴새우 무리의 끄트머리에 도달하고 이내 무리를 벗어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순간, 남극크릴새우 무리를 쫓아온 거대한 고래의 식사가 시작된다. 윌과 빌은 거대한 고래가 자기 동족 무리를 무차별적으로 먹어치우는 모습을 무리 바깥에서 그저 바라본다. 이 모습을 본 빌은 충격에 휩싸여 울음을 터뜨리고 윌은 나지막하게 이야기한다.


‘이게 우리의 존재 이유였어. 우린 그냥 누군가의 점심거리였던 거야’ 


라고 말이다.


가운데 두 마리가 각각 맷 데이먼과 브래드 피트다. (출처 : 해피 피트 2)


이 내용을 본 나는 ‘아 역시 세상에 나 홀로 떠올리는 생각이란 없구나, 아깝다. 내가 조지 밀러보다 좀만 더 빨랐으면 내가 성공했을 텐데’ 라는 생각을 가장 먼저 했으나 이 해피 피트 2라는 작품이 제작비도 온전히 건지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이내 그 생각을 철회했다.


적은 돈이긴 하지만 어쨌든 1,300원을 지불한 것이 아쉬워 나는 뒤의 이야기도 적당히 빨리 감아가며 모두 보긴 보았는데 앞서 언급한 윌과 빌의 이야기 외에 딱히 눈여겨볼만한 내용은 없었다. 왜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는지를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나는 해피피트 2를 끄고 다시 남극크릴새우, 그리고 ‘우리의 바다’ 다큐멘터리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 비단 남극크릴새우만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곱씹어보니 ‘쟤네는 대체 무슨 낙으로 살까?’ 라는 생각은 비단 남극크릴새우뿐 아니라 다큐에 등장한 거의 모든 동물들에게 적용 가능한 생각이었다. 턱끈펭귄, 큰부리바다오리, 울프피쉬, 웨들물범, 점박이팔물고기, 그리고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수컷끼리 박치기로 싸워대는 좀 못생긴 물고기 등등... 비록 종은 다르지만 이들의 생태는 대체로 다 비슷해 보였는데 그 비슷한 삶의 모습들 속에 딱히 ‘낙’이라 할만한 것은 없어 보였다.


수컷끼리 박 터지게 싸운 뒤 이긴 수컷이 암컷과 번식을 하고 알이나 새끼를 낳는다. 알이나 새끼는 다른 동물들에게 아주 좋은 먹잇감이기에 위협이 많다. 그 많은 위협에 목숨을 걸고 맞서 싸운다(이건 암컷이 싸우기도, 수컷이 싸우기도 한다). 그러다가 결국 새끼와 함께 죽기도 하고 새끼만 죽기도 한다. 이걸 반복한다. 물론, 새끼와는 무관하게 그냥 본인 자체에 대한 위협도 늘 돌발 이벤트처럼 등장한다. 이것 역시 꾸준히 경험한다. 버텨내면 이런 삶이 이어지고 버티지 못하면 그대로 삶이 종료된다.


물론 범고래나 북극곰 같은 먹이사슬 최상위권의 포식자들의 경우는 일단 그래도 장성하기만 하면 삶에 대한 위협이 현저히 줄어든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들에 비해 상황이 조금 낫다고 할 순 있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 삶이 모습이 즐거워 보이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거대한 범고래 네댓 마리가 조그마한 게잡이 물범 한 마리를 사냥하기 위해 몇 시간을 뺑이치며 수영을 해대는데 그게 어찌 즐거운 모습일 수 있겠는가)


생각이 이에 이르자 다른 종들의 모습을 거실 소파에 누운 채 넷플릭스를 통해 편히 감상했던 나의 지난 시간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른 종들의 모습을 우리 멋대로 상상해서 만든 애니메이션을 단돈 1,300원만 지불하면(심지어 동물들에게 지불하는 것도 아니고 쿠팡플레이에 지불하면) 역시 편히 누울 있다는 사실도 몹시 민망스러웠다. 


어쩌면 우리 인간이 ‘아 뭐 재밌는 거 없나’ 라 말하며 계속해서 도파민을 추구해대는 건 우리가 세상 모든 즐거움을 이미 홀로 꽉 끌어안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남극크릴새우를 비롯한 수많은 동물들의 삶에 딱히 낙이 없어 보이는 것은 사실 어쩌면 다 우리 때문일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을 하는 건 자칭 만물의 영장이 범하는 또 하나의 오만인 것일까? 아니면 어느 정도의 사실인 것일까?


나도 안다. 나의 이러한 생각이 충분히 건방진 생각일 수 있다는 것을, 비록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각각의 종에게는 다 저마다의 즐거움, 또 저마다의 목표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나의 마음에 저런 오만한 동정심이 깃드는 것은 저들의 즐거움이란 결국 어렴풋한 추측의 영역에 있으나 저들 덕에 내가 느낀 즐거움은 명백한 사실의 영역에 있기에, 그렇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남극크릴새우의 삶에 그들의 행복이 깃들길 진심으로 바란다.



2024. 12. 15.

추운 겨울날, 창밖의 새소리가 노랫소리인지 울음소리인지 헷갈려하며.

레터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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