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게, 할머니는 '왜 그렇게' 빨리 죽었을까
딸 : 미미는 왜 죽었어?
나 : 음.... 할머니가 너무 좋아서 천사가 먼저 하늘로 데려갔나?
딸 : 왜 그랬지? 서아는 미미 만나본 적도 없잖아.
나 : 음.. 그러게. 할머니가 사실은 아주 많이 아프다가 하늘나라에 가셨어.
딸 : 왜?? 아프면 병원에 가면 되는데 할머니가 병원에 안 갔어?
말문이 트인 아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을 꼽아보라 그러면 단연 '왜'일 거다. 모든 현상에 '왜'라는 단어를 들이미는 아이들에게 지치지 않고 답을 하는 것이 좋은 부모의 덕목이라 여겨질 정도이니깐. 가끔 설명하기 힘든 것들을 물을 땐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궁리하게 되는데 본인 외할머니의 죽음에 대해 '왜'를 붙이는 아이에게 마땅히 해줄 설명을 못 찾았다.
"죽다 : 생명이 없어지거나 끊어지다"
사전적 의미를 잘 에둘러 설명해 봐도 아이는 이렇게 물을 게 뻔했다. '살고 있는 게 더 좋은데 왜 죽냐고.'
성인인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요즘의 나는 담담하게 말한다. 유방암에 걸리셨었고, 만 6년을 넘게 수술이며 항암이며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나름 건강하고 즐겁게 보냈었다고.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반년은 꽤 힘드셨지만 원하던 대로 연명치료를 하지 않고 마지막 날까지도 또렷한 정신으로 계시다가 돌아가셨다고.
그런데 아이가 물어오는 '왜'에는 이유를 설명하기가 버겁다. 가장 중한 병이 '독감' 혹은 '장염' 정도인 아이에게 '암'이라는 설명은 가당치 않다. 어쩌면 아이가 궁금한 건 더 본질적인 '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어느 날 들었다. 예를 들면, 다른 친구들은 다 외할머니가 있는데 왜 자기는 없을까 하는 의문. 혹은 아빠의 엄마는 살아있는데 왜 엄마의 엄마는 살아있지 못한 걸까 하는 의문. 왜 자기는 외할머니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 그런 생각이 문득 든 날이면 울음이 울컥울컥 올라오려 했다. 평생을 고생하다 인생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 때가 비로소 찾아왔는데 왜 엄마의 생명은 야속하게도 그때 끊어졌는지. 이렇게 예쁜 외손녀랑 친손자까지도 생겼는데, 왜 외할머니가 되지도 못하고, 친할머니가 되지도 못해서 딸이랑 아들을 이렇게 불쌍하게 만들었는지 억울한 마음마저 올라오는 것이었다.
이모가 자기의 손자를 데리고 엄마가 있는 추모공원에 다녀온 이야기를 쓸쓸하게 꺼낸 적이 있었다. 할머니의 여동생이 죽어서 여기에 있다고 했더니 손자가 너무 놀라 했다는 것이었다. 동생인데 왜 먼저 죽였냐는 것이 순수한 아이의 질문이었다.
내가 딸의 무해한 질문에 벙찌듯이, 비슷하게 그랬을 이모를 생각하니 나는 무턱대고 슬퍼졌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왜 죽음에는 순서가 없는 것인지. 왜 다 방법도 다른 것인지, 이런 건 다 누가 정해주는 건가 싶은 마음이 울적하게 올라온다.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일들, 이유를 찾아서도 안 되는 일 한가운데로 내쳐졌던 20대의 내가 참 안쓰럽다고 30대 후반의 나는 생각한다. 엄마의 죽음에 붙는 '왜'에 덤덤해질 수 있는 20대는 얼마나 될까. '왜 우리 엄마에게 이런 병이 왔을까'로 시작했던 질문은, 시간이 지나니 어느덧 '왜 나에게 이런 불행이 왔을까'로 바뀌어 있었다.
이유를 찾을 수 없어 괴롭던 날들에 위로하듯 나에게 꽂힌 드라마 장면이 있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라는 드라마에서 배 속의 아이를 떠나보낸 부부에게 산부인과 의사가 남긴 메모였다.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산파 교과서의 첫 장에 이런 글이 있네요. "때때로 불행한 일이 좋은 사람들에게 생길 수 있다."
그래 이 말이다 싶었다. 이 말을 이정표 삼아 계속 올라오려 하는 청승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걷어차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구태여 찾아본 이유조차 해맑은 딸의 질문에는 무너지기 마련이다. 아직 아이는 너무 어리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생길 리 없다는 동화를 믿는 아이에게, 반대의 이야기를 건네기가 쉽지가 않다. 그래서 내 설명은 여전히 두루뭉술하다. 엄마의 두루뭉술한 설명에도 아이는 어물쩍 넘어간다. 금세 다른 관심사를 찾아 떠난다. 아이가 조금 더 커서, 진짜 살을 맞대고 정을 나눴던 조부모님 중 누군가의 죽음을 맞닦뜨리는 날엔 죽음이 또다시 다른 의미로 다가오겠지. 그때 나는 죽음을 조금 더 그럴싸하게 설명해 볼 수 있으려나 싶다.
사람은 아파서 죽을 수도 있고, 나쁜 일을 하나도 하지 않은 사람이어도 오래 살지 못하고 하늘나라에 갈 수도 있다고. 할머니가 너를 만나지 못하고 일찍 하늘나라로 간 건 모두에게 퍽 슬픈 일이었다고. 그중에서도 제일 슬픈 건 엄마였는데, 네 덕분에 그날들을 너무 괴롭지 않게 활짝 웃으며 지낼 수 있었다고. 그러다 어느 날엔, 너무 행복한 나머지 죽은 할머니에게 미안한 날들도 있었다고. 아마 외할아버지도, 외삼촌도 그런 비슷한 날들을 분명 겪었을 거라고 말이다.
이유를 찾고 싶지 않은 일을 늘 의식하고 살아간다는 건 꽤나 마음 소모가 큰 일이다. 쑥쑥 커가는 아이를 보며 한없이 기쁘다가도 나는 가끔 엄마의 죽음에 '왜'를 붙이며 울적해한다. '왜, 뭐가 그리 급해서 그렇게 먼저 가버렸냐'는 엄마의 친구이자 사돈인 우리 시어머니의 슬픈 목소리를 떠올리며 짧게 슬퍼한다. 그러다 후다닥 눈물을 훔친다. 아이를 키우는 데 하등 도움되지 않는 슬픔은 재빨리 밀어버리고, 깊은 밤을 서둘러 문 닫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런 밤들을 앞으로도 몇 번 더 보내고 나면, 덤덤하게 아이에게 할머니의 죽음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반복하면서 나는 조금씩 세상사에 무던해지는 어른이 되어가는 듯하다. 자식을 낳아 기르는 일은 얼마간의 인내심을 키워줄 뿐이고 정작 진정한 어른을 만드는 건 '부모의 로-병-사'를 겪으며 내 존재의 원형이 소멸을 향해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보는 일이라 했던 어느 작가의 말은 정말 틀린 바가 없다. 그리고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딸아이가 물었던 '할머니는 왜 죽었냐'는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내리지 못할 거다. 그걸 애달파하며 엄마를 만나러 가게 될 것이 뻔히 그려져, 훗날의 늙은 내가 벌써부터 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