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하늘나라에 있는데 어떻게 만나?

네 살 아이에게 죽음을 설명하는 법

by 재주껏빛나는

아이가 말을 할 수 있게 된 이후, 엄마가 계신 추모공원에 가다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됐다.


나 : 서아야! 우리 할머니 만나러 가는 중이야.

딸 : 미미는 어디에 있어? (아이가 말을 막 처음 배우기 시작했을 때, '할머니'를 발음하지 못해 '미미'라고 한걸 우리는 꽤 오랜 시간 쭉 그렇게 불렀다.)

나 : 음... 미미는 하늘나라에 있어!

딸 : 하늘나라? 서아는 날 수가 없는데 하늘에 어떻게 가? 그러면 미미를 못 만나겠네?

나 : 음... 엄마도 날 수가 없어서 미미를 하늘에서는 만날 수 없어. 대신에 미미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곳으로 가. 그렇게 정해준 곳이 있어서 우리는 지금 그리로 가는 거야.

딸 : 거기 가서 '똑똑똑, 서아 왔어요!' 하는 거야?

나 : 응, 거기 가서 그렇게 하자..!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굳이 추모공원 가는 길을 설명했던 건, 그냥 내가 그날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경기도에 살고 있는 나에게 부산 추모공원에 가는 것은 큰 이벤트가 되어버렸다. 그곳에 간다는 행위 그 자체로 너무나 소중한 날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할머니를 만나러 간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그냥 내뱉어본 말이었다. 그 말에, '할머니는 어디에 있냐', '날 수 없는데 하늘에 어떻게 가냐, 그러면 만날 수 없는 거냐'는 아주 구체적인 질문이 돌아올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추모공원에 가서 '똑똑똑' 인사를 해보겠다는 아이의 말이 너무 귀여워 큰 다행이었다. 삐져나온 귀여움이 아니었다면 나는 더 많이 울었을 테다.


'하늘나라'라는 예쁜 이름의 나라는 아이에게 어떤 나라라고 느껴졌을까.

엄마가 분명 할머니를 '만나러' 간다 그랬는데, 엄마는 그냥 사진이 붙은 캐비닛 앞에 서서 말 몇 마디하고 울기만 하는 걸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직 죽음이 뭔지 잘 모르는 아이에게 죽음을 설명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아이는 아직 '사람이 아파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할머니가 하늘나라라는 곳에 있다는 걸 처음 알았던 네 살 때도 그랬고, 여섯 살인 지금도 그런 것 같다. 차라리 어떤 사고가 나서 죽는 건 받아들이는 듯하다. 하지만 사람이 단지 늙었다는 이유로 죽을 수도 있고, 아파서도 죽을 수 있다는 건 조금 이해하기 힘든 개념인듯하다.


아주 구체적인 죽음을 경험한다는 건, 30대 성인들에게도 당연한 경험은 아니다. 주변을 둘러봐도 나는 꽤 이른 나이에 엄마를 잃은 편에 속한다. 나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 떠올려본다. 나에게 죽음은 거친 들숨과 날숨으로 남아있다. 호흡기를 코에 꽂은 엄마는, 이 정도로 깊은 들숨을 쉬어도 되나 싶을 정도의 들숨을 마셨다. 그러고는 꼭 그다음 날숨을 내쉬지 못할 것만 같았다. 엄마의 숨이 멎은 것 같아 심장이 요동치려 할 때 가까스로 짧은 날숨을 쉬어주었다. 그렇게 아슬아슬한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던 엄마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남겼던 말은 '왜 이렇게 안 죽냐'는 말이었다. 죽음은 영화적이지 않았다. 엄마는 '고맙다', '사랑한다', '미안하다'는 말을 힘겹게 뱉어낸 뒤에는 엄습해 오는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했다. 고통을 피해 얼른 죽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지막이라 생각하면 조금 허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생명이 꺼져가는 엄마를 내 눈으로 봤기에 나는 죽음이 무엇인지 안다. 나에게 죽음은 그런 모양새다.


아이가 현재 이해하는 죽음은, '하늘나라에 가면 만날 수 없고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만질 수 없다'는 것 정도이다. 생각해 보면 '죽음'에 이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 싶다. 그래서 너무 보고 싶은 사람이 된다는 것 말고, 덧붙여져야 할 설명은 없는듯하다. 나 역시 죽음이 두려운 다른 이유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이상 못 보고 못 듣고 못 만진다는 것. 아이가 생긴 이후 그 감각이 더 또렷해져 버렸다. 매일 품에 끼고, 살갗을 비비고, 입을 맞추고, 볼뽀뽀를 하고, 몸이 으스러질 듯 안아보기도 하고, 아이는 귓속말로 내 귀를 간지럽히고, 아이의 까르르 거리는 웃음소리를 듣는다. '나 되게 잘 살았다, 이렇게 벅차오르는 기쁨을 느끼고 사랑이 넘치는 눈길을 받을 수 있다니!' 이런 생각이 절로 드는 감각들. 삶의 의미가 절로 흐르게 되는 이 감각이 너무나 또렷한데 그걸 못 하게 된다 생각하며 숨이 턱 막힌다. 죽음을 목격하는 것과, 죽음 후의 나를 상상하는 건 또 한 차원 다른 일이구나 깨닫는다.


아이가 죽음을 직접적으로 체감하는 날이 언제일까. 그건 아마도, 나 혹은 남편의 죽음이 가까웠을 때겠지. 구체적인 경험으로서의 죽음은 아이에게 아주 느지막이 오기를 바란다. 별 일 없이, 언제 가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에 자연스러운 죽음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나는 여전히 내가 엄마를 일찍 잃었다 생각하지만,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안타까워할 정도로 이른 나이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나의 딸에게도 그런 행운이 허락되기를 바랄 뿐이다. 아이와 하늘나라를 이야기한 날에 나는 되뇌어본다. '엄마, 나는 미안하지만 엄마한테 늦게 갈게. 너무 늦게 왔다고 서운해하지 마.'라고.


아주 귀여운 아이의 상상대로, 하늘에 올라가서 엄마를 만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기어코 올라가 볼 텐데. 가능하다면 아이도 데리고 올라가 볼 텐데. 추모공원에서 시댁으로 돌아가는 길에 낮잠에 든 아이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었다.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마무리했던 그날의 대화를 아이는 먼 훗날에라도 기억할까. 말간 얼굴로 자기가 던졌던 질문에, 엄마는 외할머니를 만날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훌쩍 슬퍼했었다는 걸 알기나 하려나.


그런데 아이는 이야기를 잊는 법이 없다. 그 뒤로도 한-참을, 그리고 아주 자주 하늘나라에 있는 미미를 아무렇지도 않게 언급하곤 했다. "할머니는 어차피 하늘나라에 있잖아." 이런 말들과 함께 말이다. 그런 아이가 어느 날 <선녀와 나무꾼> 동화책을 읽고선 신기해했다. 하늘나라가 어떻게 생긴 건지 동화책으로 확인한 것이다. "엄마! 하늘나라는 이렇게 생겼대!"라고 나에게 일러주었다.



그 이후로도 아이는 종잡을 수 없는 때에 하늘나라 이야기를 꺼내곤 한다. 엄마는 자기가 하늘나라에 갈 때 같이 가야 한다고, 그렇게 안 하면 너무 보고 싶어 질 거란 이야기를 아주 시무룩한 얼굴로 뱉어낸다. 그럴 때마다 난 웃는 듯 슬픈 듯 아리송한 표정으로 아이를 껴안으며 말한다.


그래! 서아 100살 때, 엄마는 130살 때
하늘나라에 손 잡고 같이 가서 할머니 만나자!


그러고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그때 하늘나라에 가면 엄마만 젊고 나랑 딸은 늙어있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아이는 이런 식으로 나에게 힘이 된다. 슬픔에 오래 빠져있지 않게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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