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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Feb 21. 2021

참 오랜만에 당신께 편지를 보냅니다

그때만큼 차가운 겨울이네요


  그러니까 당신과 아주 헤어져 버렸던 날이었습니다. 왜,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잖아요. 정말 영영 이별이구나, 우리는 이 순간부터 곧 죽어도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며 웃어 줄 날에 방문할 수 없겠구나, 하는 아픈 확신이 까끌한 다각형의 형태로 온 혈관을 무식하게 떠도는 것 ᅡᇀ은 느낌 말이에요. 그때 나는 그만 죽어버려야겠단 생각이 극에 치달은 상태였죠. 당신과의 이별도 이별이었지만, 야속하게도 온 마음을 줬던 친구마저 세상을 떠난 직후였거든요. 하늘도 참 무심하셨던 거예요. 물론 이를 핑계로 당신의 동정을 얻고자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겨울이었는데도 비가 억수같이 쏟았습니. 우리가 가장 좋아했던 빗소리며 비 내음이며 하는 것들이 밤낮으로 일렁였어요. 그러다 깡마른 내 손이 점점 시야에서 흐려져 아득해질 즈음, 정말 눈 짝할 새에 구름이 걷히고 쾌청한 하늘이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맞아요.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감미롭고 말끔하게. 그것으로 지난 여름밤 한낮의 열기를 그대로 머금은 서로의 품을 퍽 광적으로 파고들고, 아기의 살갗처럼 보드라운 당신의 손바닥과 비교적 거친 내 손바닥이 서로의 벌거벗은 몸을 한껏 탐하고, 너를 죽도록 사랑해, 하는 말을 입에서 입으로 빠르게 전달하던 순간은 모두 약간 미쳐버린 내가 임의로 만들어 낸 착각 따위에 불과한 일이 되어버렸어ᄋ.  겨울이었지만 봄의 영향이 미약하게나마 코끝을 두드리던 날이었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꼭 여름의 장마철 같기도 했으며, 외로움이며 슬픔이며 하는 감정ᄋ 크기로 미루어 보았을 때 쓸쓸한 가을 같기도 했던, 그러니까 그 위대하다는 사계ᄌ이 하나같이 손잡고  하나를 못 괴롭혀 안달이었던 치사한 날이었습니다.  혹시 관측목이라는 말을 알고 있나요? 말 그대로 보고 헤아리는 나무라는 뜻인ᅦ요. 서울의 여의도에는 커다란 벚나무 한 그루가 관측목으로서 제구실을 다 하고 있습니다. 완연한 봄이 되어 같은 도시 다른 지역의 벚나무에 꽃이 하나둘 피어난다 해도, 이 관측목에 벚꽃이 만개하지 않는다면 공식적인 개화 시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요. 그때의 나는 아마도 고집불통인 관측목으로 완벽하게 으스러진 우리 사랑의 정중앙에 버티고 서있었을 겁니다. 그것도 시각과 촉각을 모두 잃은 채로요. 내가 이 헤어짐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우리를 따로 떨어트려 놓을 수 없다며 괜한 사람들에게까지 으름장을 놓곤 했으니까요.  그때 만약 전날 내린 눈이 주황색 볕에 전부 녹아버렸다면, 내가 발을 내디딘 어느 곳에도 미끄러운 얼음이 얼어있지 않았다면, 그래서 내가 한 번도 넘어지지 않아 저 멀리까지 용케도 스멀스멀 기어간 제정신을 되찾아 오지 못했더라면, 나는 지금쯤 싸늘하다 못해 시커멓게 식어버린 그 사랑의 언저리에서 기괴한 모습으로 늙어버린 고목이 되어있을 테죠.  저것 좀 봐요, 벌써 동이 트려고 해요.  그동안 우리 둘에 관한 거라면 활활 타는 달볕의 심장부에 쏟아부어 은빛으로 전부 태워버렸습니다. 한데 어떤 새벽에 당신이 내 허리를 감싼 왼손에 힘을 세게 준 채로 말했던, 촉촉한 입술을 내게 맞추려다 말고 잔잔하게 흘려냈던 그 젖은 말만은 여태 기억하고 있습니다.  너는 눈이 참 예쁜 것 같아, 눈 밑에는 점도 있네, 그래서 네가 눈물이 많은가 봐, 라고 했던 그 말을 듣고 동시에 터져 나온 웃음과 울음을 기억합니다.  참 오랜만에 당신께 편지를 보냅니다.  그때만큼 차가운 겨울이네요. 비보다는 눈이 잦은 겨울이고요. 그러는 당신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나요. 나는 이제 커다란 슬픔에도 덤덤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어요. 덕분입니다. 그렇고 말고요. 내가 스물여섯 살이 되었으니 당신도 당연히 같은 나이가 되었겠네요.  함께 듣던 노래를 아직도 좋아하고, 하는 둥 마는 둥 했던 운동도 이제는 꼬박꼬박 열심히 하는 편이에요. 비가 갑작스레 쏟는 날이면 우산도 없이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것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익숙한 장소로 산책을 나가는 것도, 그렇게 나선 길에서 거실 화병에 꽂아둘 꽃을 한 아름 사는 것도, 서점에서 책을 산 뒤에는 꼭 단골 덮밥집에 들러 유부우동을 먹는 것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올려다보며 말을 거는 이상한 버릇도 여전히 내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과 아주 헤어져 버렸던 날로부터 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더 이상 당신은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이 아니지 않나요. 그럼 이 겨울의 끄트머리와 봄의 초입 사이에서 편히 쉬었다 가세요. 원하신다면 따뜻한 유자차라도 한 잔 내려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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