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새소리는 상당히 거슬리는 혹은 매력적인 아침 알람 소리다. 아침의 새소리를 듣고 일어나는 일은 어쩌면 축복이지만 때로는 짜증 나는 소음이다. 아직 일어나야 할 시간이 아니지만 아들은 새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다행히 아들에게 새소리는 매력적인 아침 알람이었던 모양이다. 아들은 푹 자고 일어난 아이들만이 지닐 수 있는 뽀얀 얼굴로 일어나 집안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닌다. 뭘 그리 찾는지 한참을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던 아들은 금세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나에게 쪼르륵 달려온다.
"아빠, 없어!"
아들의 목소리에는 다급함과 울먹임이 섞여있다. 나는 아이를 진정시켜야 한다. 나는 아버지니깐. 사랑스럽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 무릎을 굳힌다. 그리고 아들과 눈을 맞춘다.
"아들, 무엇이 없는지 말해줄 수 있어?"
아이들의 화법은 언제나 그렇다. 아이들은 사건을 먼저 말한다. 지금 아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은 '없어졌음'이라는 사건 이리라. 그렇기에 아이와 대화할 땐 되물음이 필요하다. 때로는 이런 아이들의 화법에 짜증을 내는 어른들이 있다. 왜냐하면 어른에겐 사건보다는 대상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어른들은 사건에 경악하기보다는 대상에 경악한다.
엘리트 의대생의 사망사건은 경악할 일이지만 학비를 벌기 위해 노동하는 현장 노동자의 죽음은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한다. 사망이라는 사건이 아니라 대상의 차이에서 발생되는 판단의 기준이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아이들은 사건에 집중한다.
아들은 이제 거의 물고 있다. 아들의 울먹임은 아들의 언어를 집어삼켰다. 나는 아들을 품에 안았다. 등을 쓸어내려 주며 다시 물었다. 아들은 자신의 슬픔을 해결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짜내어 나에게 말했다.
"돌멩이"
아들은 돌멩이를 좋아한다. 특히 화석(?)과 비슷한 것들을 수집하는 것을 너무나 좋아한다. 아들에게는 일종의 보물이다. 그러나 어른들에게 그것은 그냥 돌멩이일 뿐이다. 어쩌면 아들도 그럴 것이다. 다만, 아들에게 소중한 돌멩이는 자신이 상당 시간을 투자해 발견하고 수많은 돌멩이들 중에서 고르고 고른 자신의 돌맹 이리라. 아들에게 소중한 것의 기준은 자기 자신인 셈이다.
그러나 어른에게 소중한 것은 그 물건의 객관적 기준이다. 객관성이란 일종의 숫자적인 것이다. 모두가 직관적으로 가치의 기준을 판단할 수 있는 것, 그것이 객관적 기준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객관적 기준은 가격으로 매겨진다. 다시 말해 가격이 저렴하거나 혹은 돈 주고 사지 않을 것은 무가치한 것이 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대체로 쓰레기통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아마도 이 사달의 주요 참고인은 아내일 것이다. 분명 아이가 잠든 후 집을 정리하며 돌멩이들을 발견했으리라. 그리고 이 돌멩이들은 쓰레기통으로 직행했으리라. 주요 참고인은 소환된 후 증언을 했다. 그리고 사건은 예상대로 이루어졌었다.
아들과 나는 쓰레기통을 뒤졌다. 그리고 돌멩이들을 발견했다. 아들은 해맑게 웃었다. 아들은 전혀 유용하지 것들에서 행복을 찾았다. 그리고 그 행복감, 즉 무용함의 급진성은 대상에 대한 정밀한 관찰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아들은 돌멩이들을 늘어놓고 나에게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특징들을 아들은 하나 한 설명하며 세상 세상 행복한 미소를 나에게 선물해 주었다.
유용함과 무용함, 우리는 유용함의 힘을 믿고 산다. 그러나 진짜 힘은 무용함에 있다. 유용함은 객관적 기준에 의해 선별되지만 무용함은 주관적 기준에 의해 선별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준에 대해 통찰하고 진술한 철학자는 많이 있다. 그들 중에서 나는 키에르케고어를 사랑한다.
키에르케고어는 자신의 강화집 <이방인의 염려>를 통해 가치의 주관성을 주장한다. 그는 가난에 대해 이야기하며 성경을 인용한다. 성경은 "새와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키에르케고어는 이 구절을 통해 가난이라는 것에 대해 진술한다.
키에르케고어는 말한다. 새는 가난하다고. 그러나 가난하지 않다고. 새는 가난하다. 매일매일 먹을 것을 찾아다녀야 한다. 새는 창고도 없이, 모아놓은 재산도 없이 매일 일용할 양식 찾아다녀야 한다. 그렇기에 새는 가난하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자연 만물이 새의 창고다. 그렇기에 새는 부유하다. 그러나 우리의 기준에서 새들은 여전히 가난하다. 하지만 그들은 가난의 염려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가난하지 않다. 그들은 왜 가난의 고민이 없을까? 그것은 그들에게 가난의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어는 이렇게 말한다.
"새는 가난의 염려가 없다. 새를 소환한다면, 주민 센터는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새가 기초생활 수급자에 걸맞은 자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새를 다시 날려 보낸다면, 그는 가난하지 않다. 복지과 담당자가 최종적으로 판단할 권한이 있다면, 새는 확실히 가난해진다. 새가 생계에 대한 너무 많은 질문들로 시달리다 못해,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이방인의 염려, 49)
키에르케고어다운 표현이다. 역시 그는 위트 넘치는 철학자다. 그는 위트 속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회적 기준이 당신을 평가하게 만들지 마시오!라고.
복지과 담당자는 일종의 사회적 기준을 의미한다. 공무원은 자기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매뉴얼에 따라 판단한다. 즉 복지과 직원이 의미하는 것은 객관성이다. 그러나 염려는 철저히 주관의 영역에 있다. 사회가 정해 놓은 기준에 따라 스스로 염려의 구렁에 빠지지 말라고 키에르케고어는 말하고 있다.
아들의 돌멩이의 가치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가치도 없어 보이는 돌멩이들, 그러나 그 돌멩이에 가치를 부여하는 권리를 사회에 양도하지 말고 스스로 가치를 부여할 때, 돌멩이는 보물이 된다.
사회는 우리에게 바쁘게 살 것을 강요한다. 그러나 스스로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멈춰 섬에서 비롯된다. 아이가 멈춰 서서 돌무더기를 디지고 세밀한 하나까지 관찰하는 것! 그것이 나의 삶의 가치를 스스로 만드는 방법이다. 나는 아들이 객관적인 삶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기 바라며 돌들을 모아 전시한다. 남의 기준이 아닌 자신이 기준이 되는 삶, 주인의 삶을 살길 바라며 다음 이야기를 또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