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룡 피규어

by 최정성

“아빠, 이건 왜 버렸어?”


아들은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들의 손에는 쓰레기통에서 건진 공룡 모형이 있었다.


“잘 봐. 카라(우리 집 강아지 이름이다)가 공룡 팔, 다리를 다 씹어 먹었잖아. 그래서 버렸어.”


아들은 공룡 모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수긍한 듯 다시 쓰레기통으로 모형을 던져 넣었다. 하지만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인형, 모형, 피규어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들, 진짜 그것이 아닌 인간의 손에 의해 창조된 모형들을 우리는 통틀어 우상이라고 부른다.


우상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종교적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인형이나 모형들 그리고 피규어들은 종교적 의미의 우상과 별반 다르지 않은 역할을 수행한다.


잘 보이는 장소에 피규어를 정성스럽게 진열하고 때로는 진열장도 만든다. 어떤 이는 조명도 설치한다. 신이라는 개념이 지배하던 시대의 우상과 같이 피규어들은 인간의 돌봄을 받으며 자신만의 공간을 지배한다. 그러나 정작 피규어를 만든 인간에 대한 존중과 존경은 찾아볼 수 없다.


칼 마르크스는 이 우상에 대해 냉철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해 냈다. 그는 고대부터 내려온 우상의 기원에서 그 근원을 설명한다. 우상은 우상이기 이전에는 나무나 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나무나 돌이 숙련된 조각공에 의해서 형상을 부여받게 된다. 그리고 이 우상은 대문 앞이나 마을 어귀나 집의 높은 곳에 놓이게 된다. 이때부터 우상은 조각가의 손을 떠나 반란을 일으킨다. 자신을 조각해준 인간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우상을 만든 인간은 우상에 절을 한다. 이보다 완벽한 반역은 없을 것이다. 피조물이 창조자를 지배하는 존재로 격상되는 반란!


마르크스는 이것을 상품 생산에도 똑같이 발생된다고 말한다. 천 쪼가리에 불가했던 것이 공장의 임부들의 손을 거치면서 옷이 된다. 때로는 신발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노동자의 임금으로는 살 수 없는 고가의 물건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을 탄생시킨 공장의 노동자를 기억하는 이는 없다. 쇼윈도에 걸려있는 이 물건들을 노동자들은 보면서 그것을 욕망한다. 이런 완벽한 반역이 어디에 있을까?


공룡 피규어의 최후를 보며 슬퍼하는 아들, 그러나 아들은 모른다. 이 피규어를 생산하기 위해 누군가의 노력과 땀과 시간이 투자되었는지. 피규어를 만든 이는 사라지고 피규어만이 남아있는 세상. 이런 세상은 인간을 위한 세상일까? 아니면 우상을 위한 세상일까?


이처럼 소외의 늪에 빠진 인간들은 자기 생산물을 바라보며 그것을 욕망하는 역치 속에서 살아간다. 이로서 노동자의 소외는 완성된다.


더 나아가 현대는 분업화를 통해 물건을 생산한다. 분업화는 효율적이다. 그러나 노동자에게는 잔인한 일이다. 노동자는 어느 순간 자신이 노동한 그것의 완성된 모습조차 보지 못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이 들어갔지만 완성을 본 적 없는 그것을 상점을 통해 만난다. 이로서 자기 노동의 가치는 상실된다. 그렇게 노동의 숭고함은 사라지고 생계 수단이라는 도구적 의미만이 남게 된다. 이것은 인간을 더욱 소외시킨다.


소외는 좌절을 낳고 좌절은 꿈을 상실시킨다. 꿈의 상실은 창조성의 상실로 이어진다. 더 좋은 물건을 만들기 위한 창조적 정신, 즉 장인의 정신은 현대에서 구닥다리 정신이 되어 버린다. 꿈이 상실된 시대, 오늘 아들이 쓰레기통에서 건져 올린 팔다리가 잘려나간 피규어는 우리 시대의 모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