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세계문자박물관이 있는 센트럴파크에 들어서니 나뭇잎들이 싱그러운 여름옷에서 붉은 가을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잎사귀마다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듯 벌레들이 파 먹은 구멍 사이로 뜨거운 볕이 파고들었다. 인천의 명소 센트럴 파크 안에 국립세계문자 박물관이 생기다니, 인천 시민으로서 한 번쯤 와보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연수유람단 덕분에 무거운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전시장에는 문자의 기원부터 인쇄하는 과정까지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약을 처방하는 방법, 불합리한 상황을 호소하는 글 등이 바위, 파피루스, 종이와 같은 다양한 매체와 여러 언어들로 기록되어 있었다. 유리창 너머 보이는 유물들을 보고 있으니 '인간은 왜 기록을 해왔을까?'의문이 들었다.
특별 전시관에서 그림과 문자 사이에서 어떤 것을 선호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평소 문자를 하면서 이모티콘과 글자 중 어떤 것을 많이 사용하느냐는 질문에 단박에 답을 할 수 없었다. 양념 반 후라이드 반처럼 글자와 문자를 절묘하게 섞어서 사용하는 나에게 선뜻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못하는 결정에 무게를 실어준 것은 픽토그램 전시였다. 픽토그램(그림문자)으로 충분히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전시 장면을보고 과연 '문자는 필요한가?' 또 한 번 물음표를 찍었다.
문자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그림이 전부가 아니다. 오디오 북이 발전하는 이 시대에 시각장애인들에게 점자는 이제 더 이상 필수가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자명종을 끄고 시간을 확인하는 것도 핸드폰으로 가능하다. 시각장애인들에게 점자로 익히는 세상보다 핸드폰의 음성과 기능으로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럼에도 점자의 필요성을 알리는 한미서점 김시연 대표님을 통해 점자의 심미화를 배울수 있었다.
늘푸른 어린이 도서관에서 한글 점자를 배우고 익히며 평소 엘리베이터에서 보던 점들과 바닥에 있던 노란 보도블록이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것임은 알았지만, 수박 겉핥듯 아는 수준이라는 것을 알았다. 윤동주 시인의 시를 직접 점자로 찍어보고 원하는 문구를 악보에 점자로 찍어 오르골 음악으로 듣는 과정을 접하면서 점자를 만들고 배우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손끝으로 읽을 수 있는 글자가 있다는 것은 어두운 밤길에 호롱불 같은 존재이다. 음성은 편하지만 듣고 흘러가기 쉽고, '낫과 낮 그리고 낱'처럼 발음에 의해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박두성 선생님이 만든 한글 점자는 볼 수 없는 이들에게 읽을 권리를 주는 6개의 빛나는 별이 아닐까.
'고마워, 잘했어, 사랑해'가 점자가새겨진 엽서에 보석을 붙이는 작업을 했다. 한글점자의 심미화를 통해 아름다운 비밀 코드처럼 알아가는 재미를 배울 수 있었다. 무엇보다 두 번의 수업으로 시각장애인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점자의 필요성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문자 박물관 투어를 마치고 센트럴 파크 공원에서 소감 나누기와 함께 간단한 그림 문제를 풀 때의 일이다. 문자도 그림 안에 글자를 찾는 것이었는데 창의력과 공간지각 능력이 발달하지 못한 나에게는 풀기 힘든 수학문제 같았다. 문제를 풀 바에 센트럴 파크 나뭇잎들이나 구경하자 싶어 바라보니 어느 하나 똑같은 것은 없었다. 어떤 잎사귀는 글자 같기도 하고 어떤 잎사귀에는 그림을 그린 듯 벌레가 파먹은 풍파에 휩쓸린 흔적이었다.
그림은 바라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한글 모음 'ㅓ'조차도 바라보는 모양에 따라 'ㅜ, ㅗ, ㅓ, ㅏ'가 될 수 있다. 뚜렷한 의사를 전달하는 문자야 말로 내가 아닌 남이 보았을 때 분별력 있게 전달되는 수단이 아닐까? 문자냐 이모티콘이냐 사이에서 고민하지만 결국 문자를 택하게 된다.횡단보도, 공항 이정표와 같은 것들을 픽토그램을 사용하여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대화할 수 있어도 섬세한 뜻과 표현은 문자를 따라올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문자! 나만의 문자를 그림과 함께 그려내 실크 스크린으로 인쇄하는 법을 늘푸른 도서관에서 세종문고 강서경 대표님께 배웠다. 그림책 인쇄 방법의 하나로 만 알고 있던 실크 스크린을 직접 한다는 생각에 두근거렸다. 나무틀에 물이 새어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테이프를 두르는 일, 잉크를 바르고 스퀴지를 이용해 누르는 작업을 하면서 전반적인 실크 스크린 작업에 대한 이해를 했다. 문제는 나만의 문자도를 어떤 문구와 그림을 조합해서 인쇄할 것인가였다.
고심 끝에 고른 것은 "carpe diem, 현재를 즐겨라"라는 라틴어 문장과 나비였다. 하늘에 날아가는 나비를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형용할 수 없는 무늬를 둘러싼 두 날개를 펄럭이며 파란 하늘을 유유히 날아가는 나비는 자유로움의 대명사 같다. 하지만 나비가 날기까지 애벌레는 얼마나 많은 잎사귀를 갉아먹고 고치 안에서 오랜 시간을 견디는가. 현재를 즐기라는 말을 욜로와 동일시하고 싶지는 않다. 다시 오지 않는 지금이라는 선물을 감사해하며 최선을 다하기 위해, 현재에 충실하라는 좌우명을 잎사귀에 새겨본다. 애벌레가 찍어 놓은 점들이 모여 하나의 글자가 되고 나비 같은 작품이 되는 것은 오늘을 잘 살아가는 내가 있기 때문이니, 오늘도 하나의 점을 찍는마음으로 열심히 기록하며 살고 싶은 마음을 담았다.
실크 스크린 작업을 하면서 색의 조화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세종문고 강서경 대표님이 준비해 주신 다양한 잉크를 조합하여 실크 스크린 인쇄를 했더니 노랑, 초록, 버거디의 조합이 어우러져 여름 혹은 가을 느낌의 계절이 표현되었다. 실크 스크린은 혼자 하기보단 서로의 도움이 많이 필요했던 작업이었다. 감광기에 필름을 넣는 일, 실크 스크린에 잉크를 바르는 일 모두 함께했던 늘푸른 어린이 도서관 분들이 있었기에 하나의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
스퀴지로 잉크를 누르는 작업을 거쳐 실크 스크린 된 인쇄물을 볼 때마다 박수와 탄성이 터져 나왔던 화기애애한 그 순간이 마음속에 남는다. 고민했던 나만의 문자도가 잘 나온 것도 좋았지만 기록의 역사를 함께한 유람했던 사람들과의 시간이 가슴속에 따뜻하게 남았다.
문자를 만나는 연수유람단을 알게 되어 인류 기록의 시작이라는 콘셉트로 좋은 사람들과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을 방문하고 늘푸른 어린이 도서관이라는 우리 동네 작은 도서관에서 점자와 실크 스크린을 배우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이제는 지나가다 망가져 있는 보도블록을 보고 민원을 넣을 만큼 관심의 폭이 커졌다. 문자의 중요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오늘을 더 열심히 기록하고 싶다.
나만의 문자도에 새긴 의미대로, 애벌레가 파먹은 글자처럼 현재를 잘 산 내가 나비처럼 날아다니는 내일을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