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을 감지한 순간 응급실을 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장내시경 약을 먹고 쏟아낸 것처럼 하얀 변기가 빨갛게 물든 것을 보고 두 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두 번 정도 피를 쏟았지만 얼떨떨한 느낌이었다. 생리 날짜가 다가왔지만 이런 식으로 변기가 빨개질 리가 없는데 쏟아지는 피를 느끼며 드는 생각은 '미쳤나 봐...'밖에 없었다.
일요일 저녁 아이들을 씻기고 남편에게 애들을 맡긴 채 밤 10시 30분에 근처 응급실로 걸어갔다. 여름낮의 더위는 생각나지 않을 만큼 찬바람에 카디건을 여미며 혹시나 하는 생각에 신고 나온 슬리퍼를 끌고 병원 앞에 섰다.
어떻게 오셨냐는 말에 혈변을 봐서 왔다고 말했다. 사실 변은 나오지 않았다. 오로지 선지 같은 핏덩어리와 피가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것처럼 쏟아졌을 뿐이다. 응급실 내에서도 준응급환자와 응급환자로 분류되는데 나는 응급환자 대기실에 눕게 되었다. 별일 아니겠지 생각했지만 응급실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검사에 심각성을 느끼게 됐다.
하혈을 할 경우 상부인 위에서 출혈이 됐는지 확인을 하는데 이를 위해 긴 관을 코로 삽입하여 식염수를 넣어 위세척을 한다. 많이 아플 것이고 구역질이 날 수 있다는 간호사의 말에 겁을 먹었다. 하지만 겁보다 꿀꺽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삽입되는 관이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게 하는 게 유일한 몸부림이었다. 식염수로 세척한 위는 깨끗했다. 점심을 먹은 뒤 먹은 것이 없었고 출혈의 근원지가 위가 아니었기에 맑은 액들 만이 빈 통에 담겼다.
잘못 먹은 것도 없는데 장에서 천둥번개 소리가 났다. 겨우 참고 있다 화장실을 갔을 땐 집에서 보다 더 많은 양의 피가 쏟아졌다.
"왜 이렇게 많이 나오는 거야"
혼잣말로 속상해했다. 밖에서 대기하던 간호사는 출혈이 많은 나를 부축해 휠체어에 태우고 다시 혈압을 쟀다. 안 그래도 낮은 혈압이 더 저혈압으로 나왔다.
잠시 누워 있은 뒤 CT를 찍었다. 한 달 전 폐결절로 인해 찍으면서도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조영제는 사람의 몸을 불구덩이처럼 뜨겁게 하여 심장을 격하게 두근거리게 하기 때문이다. 어째 이 병원 조영제가 더 센 건지 몸이 안 좋아서인지 두근거림이 더 심하게 느껴졌다.
검사를 모두 마친 후 다음날 내시경을 위해 입원실로 옮겨졌다. 그리고 참았던 화장실에 간 순간 가장 많은 피를 보았다. 차마 혼자 일어 설 힘조차 없던 나는 호출벨을 눌렀다. 세 명의 간병인이 화장실 앞으로 왔다. 겨우 잠금장치를 풀어 상황을 설명하자 두 명이 겨드랑이에 팔을 끼우고 한 명이 다급히 기저귀를 채웠다. 아이들이 어릴 적 수차례 채워주던 기저귀였는데 역으로 내 몸에 차게 되는 순간에 수치심도 없었다. 혼미해져 가는 정신을 붙들어야만 했다. 아이를 낳고 출혈이 많아 기절했을 때와 같은 어지러운 순간이었기에 까딱 눈을 감으면 저세상으로 갈 것처럼 눈앞이 아득했다.
간병아 한 분이 늘어진 내 몸을 둘러업고 두 명이 부축을 한 상태로 침대에 몸이 누여졌다. 갖가지 주사를 맞고 정신이 돌아왔다. 오른쪽 혈압이 측정되는 모니터를 보니 괜스레 눈물이 쏟아졌다.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이대로 보지 못하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에 핸드폰 배경을 모두 아이들로 바꿨다.
엄마 핸드폰을 자기 것처럼 다루는 큰 아이가 귀여운 캐릭터로 바꿔놓았지만 내가 보고 싶은 아이들의 모습으로 모든 화면을 채웠다. 보고 싶고 봐야 하기 때문에 기운을 차리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직장 내시경을 받기때문에 관장을 해야 했다. 자연주의 출산을 했기에 관장이란 걸 처음해 본 나는 로켓이 발사될 것처럼 튀어나오려는 그것을 붙들고 있는 힘을 다해 참았다. 하지만 간호사 선생님이 말한 10분을 참지 못하고 7분 만에 화장실 앞으로 달려갔다. 좀 더 참았어야 했다는 간호사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7분 30초 만에 갔다며 봐달라며 웃어넘겼다.
내시경은 편하다. 수면 내시경이기 때문에 한숨 자고 일어나면 되니 은근히 마취되기 전 상황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에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는 기억이 아득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내가 내시경을 위해 들어갔다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진짜 아파서 정신이 없는 걸까..
내시경 후 의사 선생님은 촬영 사진을 보여주며 진단을 내렸다.
"대장에 있는 게실에서 출혈이 있었으며 출혈양이 많은 두 곳에는 클립으로 지혈했습니다."
3월에 대장내시경 결과에 게실이 있으니 혈변 및 복통이 있을 경우 전문의와 상담하시오라는 문구를 봤지만 이렇게 다량의 출혈로 전문의를 만나 뵐지는 몰랐다.
어쨌든 심각한 병은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이어 나온 죽을 먹으며 지혈이 됐으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회진 시간이 되었다. 월요일에 내시경을 마친 나에게 의사 선생님은 금요일에 퇴원을 해야 할 수도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하셨다. 아니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