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친절한금금 May 28. 2024

엄마가 응급실에 간 후 남은 아이들의 일상 변화

게실 출혈 입원기(2)

변기에 쏟아 낸 것이 변이 아닌 선지와 같은 혈 덩어리와 피가 전부였던 날, 위험을 감지하고 일요일 밤 11시에 응급실에 갔다. 금세 돌아올 줄 알았으나 입원까지 하게 되었다. 직장 내시경으로 게실에 의한 출혈이라는 원인까지 밝혀졌고 클립으로 지혈하는 적절한 치료까지 이어졌다.


월요일 아침 의사 선생님 회진에서 퇴원 소식을 들을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금요일까지 입원을 생각하고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입원하실 때 헤모글로빈 수치가 14였는데 현재 7까지 떨어진 상태입니다"


"하지만 헤모글로빈 수치가 출혈 후 바로 반영되지 않기 때문에 이보다 더 떨어지셨을 수도 있어요. 지금 굉장히 어지럽고 무력한 상태이실 텐데 괜찮으세요?"


피를 어지간히 쏟아내긴 했다. 한번 갈 때 수도꼭지에서 콸콸 쏟아지는 기분이었으니 의사가 말한 수치가 납득되었다. 집에 당장 돌아갈 생각에 무력감 따위는 먼 이야기라 여겼다. 당장 아이들 가방을 싸서 밥을 먹이고 유치원에 데려다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내 몸에 피가 빠져나갔어도 지친줄 몰랐다. 하지만 어제 출혈 후 불편한 병원 침대에서 날이 새도록 잔 걸 보면 의사의 말 따라 피가 부족했던것 같다.


수혈을 2팩 하기로 했다. 둘째를 낳고 출혈이 멈추지 않았을 때는 굉장히 응급한 상황이라 쇄골 근처에 주사 바늘을 꽂아 수혈을 받았었다. 멘털을 붙잡고 있던 그때에도 괜스레 목 근처로 주사 바늘이 들어가니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눈물이 흘렀었는데 이번에는 팔에 수혈을 맞았다.


혈액 입자가 크기 때문인지 주사 바늘이 두꺼웠다. 찌를 때도 아프더니 수혈이 들어갈 때도 간질거리면서도 통증이 느껴지는 생생한 기분에 고통스러웠다. 더군다나 움직이지 않고 똑바로 누워 수혈을 받으라고 했다. 그것도 한 팩당 4시간이었으니 8시간을 침대에 등 붙이고 있으려니 좀이 쑤셔서 견디기 어려웠다.


하지만 제일 고통스러웠던 건 주사 바늘이 막혔을 때였다. 혈액은 응고하기 쉽기 때문에 내가 자세를 잘못해서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으면 뭉쳐서 들어가지 못했다. 이때 주사에 식염수를 넣어서 길을 뚫어주거나 주사 자리에 고무 부분을 눌러 주는데 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건 뭐 예고 없이 찾아오는 통증에 외마디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주사가 막히지 않게 하기 위해 저녁도 미루고 미라처럼 누운 자세로 수혈을 마쳤다. 8시가 다 된 시간, 간병을 도와주시는 분이 따뜻하게 데워준 밥을 먹으며 한시름 돌리던 찰나 전화가 왔다. 토끼 같은 두 딸이 보러 왔다는 남편의 연락이었다.


떨어질 듯 말 듯 처마밑에 고인 빗물 같은 눈물을 그렁그렁 눈에 달고 온 막내는 울음을 밖으로 쏟아내지 않았다. 울면 안 된다는 아빠의 말을 철석같이 듣는 건지 전화상에서 엄마가 보고 싶다며 울던 막내는 어디 에도 없었다. 의젓하게 엄마의 손을 잡은 앙증맞은 손바닥이 겹쳐졌다.


일요일 밤 집을 나설 때는 분명 금방 돌아올 것처럼 말했는데 월요일에도 오지 않는 엄마를 원망하듯 왜 오지 않냐고 물어보는 딸들이었다.


"엄마, 내일은 올 거지?"


월요일에는 당연히 그럴 줄 알았는데 수혈을 하게 될 줄이야. 더군다나 의사가 금요일까지 지켜보자고 한 상황이라 확답을 주지 못해 미안할 뿐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가라고 하면 집에 갈 수 있어. 엄마 금방 갈게"


못 미더운 말이지만 엄마가 집으로 돌아올 거라는 말에 기운을 내는 딸들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때까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이들을 담았다. 눈앞에 아이들이 어른거렸지만 피를 쏟아냈던 날부터 병원에서 베개에 머리만 닿으면 신생아처럼 잘도 잤다. 잘들어 갔냐는 인사도 못한 채 쓰러지듯 잠들었다.


수요일 아침이 다가왔다. 의사 선생님을 애타게 기다렸다. 과연 퇴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수혈을 했더니 피수치가 9까지 올라왔습니다. 내시경에서 지혈도 확인되었고 이 정도 피수치면 일상을 생활하는데 지장을 주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돌아가셔서 안정을 취하세요"


금요일까지는 누가 뭐래도 집에서도 병원 같은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퇴원을 했다. 철분제와 변비약을 한 아름 안고 집에 가면서 변비에 좋다는 야채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갔다.


집에 돌아오니 주인이 없었던 게 티가 났다. 살림을 잘하는 남편이지만 빨래는 못하는 사람이라 당장 세탁기 가동이 시급했다. 급한 대로 세탁기를 돌리고 아이들이 오기 전까지 침대에 누워 어지러운 몸을 누였다. 그리고 하나 둘 돌아온 아이들을 맞이하는 순간, 엄마 품보다 싱크대로 먼저 달려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방에서 물통과 수저통을 꺼내 야무지게 싱크대에 넣는 아이들이었다. 평소 유치원에 가기 전 아이들 가방을 뒤져 설거지 한 수저를 키친타올로 닦아 겨우 보내왔는데 웬일인지 스스로 수저통을 가져다 놨다. 그리고 끌어 안긴 아이들은 말했다.


"앞으로 엄마 힘들게 하면 안 된다고 아빠가 그랬어. 유치원 갔다 오면 꼭 수저통 가져다 놓을게"


입버릇처럼 제자리에 옷을 가져다 놓으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옷걸이에 외투를 걸고 있다. 자기 전에는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학교와 유치원 가방을 스스로 싸고 심지어 학원가방까지 챙겨 문 앞에 놔둔다. 내일 입을 옷까지 가지런히 갠 후 이불로 들어오는 딸들. 아침마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건 어떤 옷을 입을지 가방에 놓고 가는 것은 없는 촌각을 다투는 시간에 할 일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수고가 사라졌다.


아내가 없는 3일 동안 남편은 아이들의 민낯을 보았다. 그동안 티 안 나게 해 왔던 아이들의 진짜 모습에 기가 차기도 했다고 했다. 아침마다 분주했던 엄마의 하루를 여실히 직면한 것이다. 가방을 싸야 하는데 수저통도 없고 어떤 옷을 입을지 10분이 넘게 고민하는 딸들을 보며 분주한 아침 시간을 개선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그런 수고를 떠안고 힘들게 살았던 나와는 참 다른 모습이었다.


명목은 앞으로 엄마가 힘들지 않게라고 얘기한다. 결론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진작 독립적으로 해야 할 일들을 아빠 손을 빌려 해내고 있다.


퇴원하고 며칠이 지났지만 스스로 해나가는 루틴은 이어지고 있다. 엄마는 언제든 집에 없을 수 있다. 갑자기 입원을 할 수도 있고 지금처럼 새벽에 일을 나올 수도 있다. 끌어안고 살며 아이의 손과 발이 되어준다면 위기 상황에 아이는 허둥지둥 아무것도 못할 수도 있다.


아직 어리지만 독립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할 때가 왔다고 본다. 어리다고 마냥 예뻐하며 다 해주던 엄마였지만 이제는 남편이 하듯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방법을 따라야겠다.


게실증은 언제든 출현이 재발할 수 있다. 오늘처럼 새벽에 먼 거리 일을 가는 경우에도 엄마는 집을 비울 것이다. 엄마는 반드시 집에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응급실에 가서 갑자기 입원할 수도 있으니 스스로 해 나가는 아이들의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이어나가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두 번째 찾은 응급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