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 같은 피가 대장에서 쏟아져 응급실을 다녀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대장에 작은 주머니처럼 튀어나온 게실은 이물질이 끼어 염증을 유발하고 맹장염과 같은 치명적인 고통을 주는 게실염이 대부분이다. 게실을 지닌 사람의 5%가 다량의 게실 출혈을 일으킨다. 로또 한 번 당첨된 적 없던 나에게 5%의 희박한 확률이 찾아올 줄이야. 불행 중 다행이라면 게실 출혈은 게실염과 달리 통증이 없다는 것이다. 쏟아지는 피를 보고 패닉상태가 되고 심각한 빈혈이 오는 것 외에는 내가 왜 링거를 꽂고 입원실에 있어야 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게실은 보통 자연적으로 지혈된다고 한다. 응급실과 입원 병동에서 다량의 출혈을 한 후 더 이상 피를 쏟아 내지 않은 이유 또한 어느 정도 지혈이 됐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피가 완전히 멎은 것은 아니니 내시경을 통한 지혈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치료 외에 원인 파악을 위해 했던 직장 내시경에서 출혈 부위를 찾은 것도 갑작스러운 불행 중 찾아온 행운이었다. 어떤 이들은 출혈점을 찾지 못해 고생하는 경우도 있다 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퇴원을 하면서 담담 의사는 변비가 생기지 않도록 채식 위주의 식단으로 조절할 것을 신신 당부했다.
변비로 인해 대장이 팽창해 압력이 차면 게실에 의한 출혈에 빌미를 주는 셈이니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하지만 개가 똥을 끊지, 고기를 좋아하는 우리 식구는 퇴원을 축하한다며 고깃집으로 갔다. 어제까지 죽을 먹었고 아침부터 밥을 먹었기에 고기를 먹어도 되는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엄마 없이 밥도 제대로 못 먹었던 아이들이 노래 부르듯 먹고 싶다는 고기를 모르는 척할 수도 없었다.
결국 나의 선택은 상추는 많이 고기는 조금 먹는 것이었다. 핑크빛이 감도는 다각형의 히말라야 소금에 고기를 콕 찍어 먹는 것을 선호하지만 이제 야채를 한 움큼 싸서 먹어야 했다. 퇴원하자마자 이래도 되나 싶었기에 불안한 마음으로 야채를 더 많이 먹었던 저녁이었던 것 같다.
퇴원 후 일주일이 지나 외래를 보기 전까지 채식을 위한 식단은 계속되었다. 막상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고 보니 먹을 것이 참 없었다. 점심에 간단히 끓어 먹던 라면도 집 앞 분식집에서 사다 먹던 떡볶이도 먹을 수 없으니 죄다 손이 가는 음식들이었다. 상추 하나를 먹으려고 해도 씻어야 하는 번거로움에 며칠 동안은 샐러드를 사 먹기도 했다.
가장 만만한 야채는 오이였다. 후루룩 씻어 썰어서 먹거나 채칼에 썰어 콩국물에 먹으면 여름의 별미가 내 입 안으로 들어왔다. 다만, 짠 것을 좋아하는 탓에 소금을 다량 넣어 콩국물을 차고 넘치게 먹었다는 것을 빼면 간편식으로 이만한 게 없었다.
배변에 좋다는 음식들은 평소에 손이 가지 않던 것들이었다. 도대체 나는 아이들과의 식탁에 무엇을 차려왔던 걸까? 삼겹살, 돈가스, 소시지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반찬이기도 했지만 육류를 사랑하는 나 역시 편하게 자주 차릴 수 있는 식단이었다. 식이 섬유가 부족한 식단은 나이가 들어가는 나의 대장이 허락해주지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생리 전 다가오는 변비가 심해졌었다. 출산을 한 지 7년이 다 되어가도 포물선을 그리는 배는 홀쭉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탄수화물과 육류 위주의 식단을 하다 보니 내부에서 독한 가스가 차서 더부룩한 느낌에 매일이 불편했다. 배출은 원활하게 하지 못하면서 입으로 들어오는 것들은 배변활동에 좋지 않은 것들 뿐이니 결국 이 사달이 난 것이다.
지난 3월 건강 검진에서 게실이 발생했고 5월에는 게실 출혈까지 경험했으니 이쯤 되면 대장 출혈은 식단에 대한 새빨간 경고를 전한 것이다.
빵을 하나 빼고 연어와 야채 위주로 먹었다. 퇴원 후 처음 커피를 온 후 물을 엄청 마셨다.
의사가 했던 말 중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 것은 게실 출혈은 재발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식이섬유 섭취를 많이 해야 한다고 했다.
브로콜리는 세척이 까다롭다고 해서 먹고 싶지 않았는데 초록 파마머리를 한 이 녀석이 배변에 참 좋다고 했다. 막상 찾아보니 어려운 것도 없었다. 그동안 흐르는 물에 씻어 데쳐왔는데, 그전에 식초물에 보글보글한 머리를 담가서 이물질을 제거한다. 뭐랄까. 고문을 위해 브로콜리를 거꾸로 매달아 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식초 물에서 건져낸 후 그릇 안을 보니 엄청난 이물질이 떨어져 있었다. 안심되게 세척한 브로콜리는 간단하게 데쳐 초장을 찍어 먹기만 하면 되니 먹을 것이 없을 때 이만한 반찬도 없었다.
작년까지 앞자리가 5를 벗어난 적이 없었는데 앞자리가 6으로 바뀌더니 운동을 해도 저울의 바늘은 요지부동이었다. 당연한 소리일 테지만 고기와 술을 달고 살면서 아침에 잠깐 걷고 뛰는 활동으로 살이 빠찌는 요행을 바랐다. 하지만 운동을 안 하고 식단을 바꾼 지금 3킬로가 빠졌다. 병원에서 처방해 준 유산균과 변비약 덕분에 먹고 내 보내는 선 순환을 한 덕분일까. 식단을 고 식이섬유로 전환한 덕분일지 한결 몸이 가벼워지고 있는 느낌을 받고 있다.
퇴원 후 외래를 위해 병원을 가는 길에 남편은 꼭 물어봐야 할 것을 당부했다.
"술 먹어도 되는지 물어봐, 너한테 중요한 거잖아"
그렇지. 술을 즐겨하는 우리 부부에게 저녁 식사에서 남편의 소주 한 잔 내 앞에 청량감 넘치는 맥주 한 잔이 낙이었는데 앞으로 마실 수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한 문제였다.
"술이 꼭 연관이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염증을 유발하는 술을 먹어서 게실염에 대한 가능성을 높일 필요는 없겠죠?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시니 조금은 드실 수 있다고 봅니다. 전처럼 과음하시면 안 되지만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결국 마시지 말라는 소리였다. 맥주 외에도 스스로 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커피다. 배변에 물만큼 좋은 없다는데 커피를 물처럼 마시고 정작 진짜 물은 한 입도 대지 않았다. 커피는 탈수 효과가 있어서 커피를 마신만큼 물을 많이 마셔줘야 했는데 그동안 커피를 먹으며 대장에 수분을 빼 온 건 아닌가 싶다. 혹시 마셔야 한다면 그날은 물을 정말 많이 마셔줄 것을 다짐했다. 커피도 고기도 끊을 수 없는 구질구질한 식단의 변화이지만 먹고 싶은 건 먹으면서 입은 행복하게대장은 건강하게 꾸려간다면 괜찮지 않을까? 못 먹어서 스트레스받으면 더 안 좋을 것 같다.
"대부분 환자분들이 재발의 위험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십니다. 하지만 장염이 잘 걸리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환자분은 장염처럼 게실 출혈이 언제든 올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병원에 오셔서 출혈 잡으시고 출혈양이 많으면 수혈받고 안정 취하시면 됩니다. 너무 많은 걱정으로 병을 더 키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변비만 조심하세요"
의사의 한 마디로 삶의 질이 개선되었다. 먹고 싶은 것을 많이 섭취할 순 없지만 술을 제외하고 조금씩 먹으며 식이섬유 위주의 식사로 건강한 삶을 유지해 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