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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푼 비빔밥에 수저가 세 개 있으면 이상한가?

by 친절한금금

화제가 되고 있는 <폭삭 속았수다>에서 가장 많이 나온 음식이 무엇일까?


내 눈에는 비빔밥이었다.

통계적인 수치보다 마음이 가는 음식이라 눈에 띄었다.


관식이가 애순이의 양배추를 팔아주었던 북적한 시장 한편에서 세 이모들이 먹는 비빔밥이 계속 생각났다. 양푼 비빔밥 하나에 각자의 수저를 들이밀고 먹기 바빴던 시절이다. 어색함은 일도 없었다. 여러 가지 나물이 한데 모여 비벼진 만큼 수저들이 양푼 하나를 향해 가는 것이 당연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식탁에서는 위생을 생각하여 각자 개인 그릇에 음식을 떠먹고 있다. 가족끼리 먹을 때는 안 그런 경우도 있지만 남들과 먹을 때는 필수 사항이 되었다. 마을주민들과 함께하는 독서 모임에서 무엇을 먹든 공용 수저를 놓고 서로의 타액이 묻지 않게 하기 위해 애쓴다. 찌개와 국을 먹을 때는 당연하게 생각지만 뚝배기에 나온 계란찜을 먹을 때도 공용수저로 먹어야 했을 때는 내가 위생에 너무 안일하다 느끼게 했다.


여고시절 친구들과 저녁마다 먹은 것은 급식이 아닌 참치 비빔밥이었다. 급식비를 빼돌려 동아리 방에서 햇반, 참치, 참기름, 고추장만으로 저녁 만찬이 차려졌다. 양푼 하나에 한데 모아 비벼 둥글게 모여 먹었던 참치 비빔밥.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시절에 누가 더 한 숟가락이라도 많이 먹을까 한 번 더 얼굴을 쳐다 보기도, 수저가 부딪치는 소리가 음악처럼 들리며 눈 깜짝할 사이에 밑바닥을 보였던 추억의 음식이다.


이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식사의 형태라고 생각했는데 드라마의 영향인지 친분이 두터운 사이여서 가능한 일인지 양푼에 수저 세 개를 놓고 오늘 점식으로 양푼 비빔밥을 먹었다.


그림책 모임으로 돈독한 사이가 된 언니들과 갑작스럽게 우리 집에서 밥을 먹게 되었다. 소금 간이 많이 된 애호박 볶음과 과하게 데쳐져 익어버린 시금치나물 이야기를 하다 점심으로 비빔밥을 해 먹자고 한 것이다. 식사하기 전 들린 빵집에서 사장님은 우리 집 점심 이야기를 듣고 반색했다.


"요즘 집에서 같이 밥 먹기 쉽지 않은데, 사이가 좋으시네요."

"양푼에 비벼드시는 건가요?"


양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개인 그릇에 밥을 넣고 나물을 정갈하게 나열한 후 반숙으로 프라이 한 계란을 올려 취향껏 고추장을 넣고 비벼 먹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양푼이라니. 오랜만에 고등학교 때 추억과 함께 나도 <폭삭 속았수다>의 세이모가 되고 싶었다. 마침 인원도 세 명이 아닌가!


갓 지은 밥 냄새가 솔솔 나는 흰밥을 주걱으로 설기설기 저어 한 김 뺀 뒤 양푼에 세 주걱을 담았다. 바닷물을 삼킨 것 같은 애호박볶음과 굳이 가위로 자르지 않아도 될 만큼 익어버린 시금치를 넣었다. 단연 아삭함이 돋보이는 빨갛게 무친 콩나물까지 넣으니 제대로 된 비빔밥 차림이었다.


양푼에 수저를 세 개 올리고 물어보았다.


"혹시 개인 그릇이 필요할까요?"


물어보는 것이 실례인 줄 알면서도 물어보게 되는 건 기분에 취한 탓이라고 해야겠다.


고추장 넣는 양을 조절하지 못한 탓에 안 그래도 짭짤했을 비빔밥에 염도가 초과되었다. 집고추장이라 시판 고추장보다 맵고 짠맛의 정도가 진하다는 것을 간과했다. 손님들에게 음식을 내는 입장에서 내 입맛에 따라 너무 짜게 내놓은 것은 아닌지 계속 실없는 소리가 나온다.


"물을 많이 드셔야 할 것 같아요"


맛있다고 먹어주는 지인들 덕분에 양푼은 금세 바닥이 드러났다. 집에서 갓 지은 밥에 나물 가득 넣은 비빔밥을 먹을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어느 누구도 위생을 생각해서 한 곳에서 밥을 먹냐는 이야기는 없었다.


달라진 것은 무엇일까. 으레 비빔밥은 한 그릇에 넣고 달려들어 먹었고 그게 정이었는데. 물어보는 것이 미안해지고 실례인 것. 밥그릇에 수저하나로 우리의 정을 깊다 표현할 수는 없지만 본디 정이라는 것이 밥 한 끼에서 쌓이는 법 아닌가. 아무려 우리가 한 그릇에 함께 밥을 떠올렸으니 오늘 뜨끈한 정이 폭삭 들은 것 같다.


든든한 점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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