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만 원 냉장고를 사고 바뀐 변화

by 친절한금금

딸아이가 냉동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더니 울먹이며 이야기했다.


"엄마, 냉장고가 이상해"


딱딱하게 얼어 있어야 하는 냉동고 안의 아이스크림이 봉지 안에 가득 찬 달콤한 물이 되어 있었다. 신혼가전으로 불편함 없이 잘 사용하고 있었는데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냉장고 수명의 끝을 예감하게 되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최선을 시도해 보았다. 당장 바꾸고 싶은 디자인도 없었고, 굳이 새로 사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에.

냉장고 코드를 뽑았다 켜면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하지 못한 건 수납장 안 냉장고 뒤편에 고이 모셔둔 콘센트를 뽑을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를 보던 남편이 차단기를 내렸다. 유레카! 냉장고가 있는 주방 전체 전기가 차단되었다. 이렇게 똑똑한 남편이었다니! 십 분가량 전기를 끊고 재부팅을 한 덕분에 냉장고는 정상가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2주를 넘기지는 못했다. 냉장고는 다시 고장이 났고 이번에는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냉장고를 바꾸라는 하늘의 계시였을까? 일주일 뒤에 오기로 했던 기사님이 당장 올 수 있다는 연락을 주셨다. 냉장고 문을 열어본 기사님은 단번에 알아차리셨다.


"이거 새로 사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냉장고 안에서 새어 나오는 가스냄새로 보아 컴프레서 이상이 분명했고, 이 부품을 고치기 위해서는 냉장고를 새로 사는 게 이득일 만큼 큰 비용이 들었다. 당장 인터넷으로 냉장고를 검색했다.


<양문형 냉장고 800>


현재 사용하고 있는 냉장고 또한 양문형 800리터였다. 냉장과 냉동에 충실하며 큰 사이즈는 필요 없었다. 신혼 때 문이 4개인 냉장고가 유행했지만 안 그래도 잘 깜박하는 성향인 내가 문이 여러 개면 어떤 게 들어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 고충이 싫었다. 취향은 변하지 않아서 지금도 나는 양문형 냉장고에 4인 가족이 사용하기에 부족함 없는 800리터를 알아보았다.

냉장고 고장으로 냉동실을 비우면서 다시 한번 느꼈다. 쓸데없는 것들은 비우고 딱 필요한 만큼만 사서 쓰자. 냉장고는 냉장과 냉동의 기능만 있으면 될 뿐, 다른 것은 필요 없다는 나만의 원칙이 확고했졌다. 냉장고 용량은 클수록 좋다고 말들 하지만 이미 수납장을 짜 놓은 상태라 더더욱 우리 집에는 안될 말이었다.

첫 고장으로 냉동실을 정리했고, 냉장고 교체를 위해 다시 한번 불필요한 짐들을 버렸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쓰레기를 떠안고 사는지. 바로 먹지 않고 넣어두었던 신선했던 음식들이 시들어 썩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자책도 많이 했다.

인터넷에서 가장 기본 형태인 냉장고를 100만 원도 안 되는 가격에 주문했고, 드디어 우리 집에 새로운 냉장고가 들어왔다. 차곡차곡 물건을 넣으면서 기존에 묵혀두었던 살림에 대한 반성이 집안 곳곳으로 전도되었다. 작은 방, 큰 방, 싱크대 등 안 쓰는 물건을 무작정 꺼냈다. 3년 넘게 사용하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쓰지 않고 자리를 차지할 뿐 인 것들을 과감하게 버렸다. 그렇게 수납할 공간을 만들어내고 나니 미루기만 했던 살림이 하고 싶은 살림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100만원도 안되게 냉장고 하나 바꿨을 뿐인데, 10년 넘게 묵히기만 하던 짐들을 정리하는 매일을 보내고 있다. 비싼 냉장고를 사서 오는 기쁨보다 정리하며 내 삶이 개운해지는 힐링으로 가성비 제대로 뽑은 기분. 겨울이 지나 창문을 열어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는 시기와 어울려 정리된 집안 속 일상마저 쉼표가 늘어가는 하루고 바뀌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