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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금금 Sep 08. 2022

남편이 초파리 제거제를 선물했다

문 앞에 택배가 놓여있다. 물건을 사면 항상 공유하던 남편인데 별안간 예고도 없이 무언가를 샀다. 궁금증과 함께 거칠게 박스테이프를 뜯어 안을 살펴보니 분무기 2개 들어있다. 겉면에 쓰여 있는 이름이... 초파리 제거제?




하루에 주방을 거치는 횟수는 하루에 50번도 넘을 것이다. 쌓여있는 설거지를 보고도 그냥 지나친 횟수가 150번이 넘었다. 신기하게도 싱크대를 채운 그릇은 3일 동안 더 늘어나지도 줄지도 않은 채 같은 상태를 유지했다. 주말 동안 <깨진 유리창의 법칙>적용된 나의 주방을 보며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살림이 깨끗한 상태로 유지되는 기간에 비해 어지러운 상태로 지낸 기간이 항상 길었다. 치우자마자 곧 어지러워지니 치우기를 포기한 건 아닐까? 우매한 생각에 잠겨보다 원인 파악에 나섰다.


먹은 뒤에 바로 설거지를 하면 가장 좋지만 즉시 설거지가 힘들었다. 저녁을 먹기 전 쌓인 설거지를 하고 나면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식사 준비를 했던 냄비와 식구들이 먹은 그릇들이 켜켜이 산처럼 쌓인다. 설거지를 바로 하기보다는 아이 둘을 씻기는 게 급했다. 그릇은 당장 안 씻겨도 병에 걸리지 않지만 아이들은 혹시나 세균이라도 침입할까 봐 매일같이 샤워를 시켰다. 드라이까지 완료해서 아이들이 잘 준비를 마치면, 그날 내가 꼭 해야 하는 집안일을 마쳤다는 생각에 설거지는 다음 날로 미뤘다. 더 이상 살림에 손 하나 올릴 기력과 의지가 바닥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잠을 청하기에는 서운한 하루다. 밥을 차리고 아이들을 챙기느라 애쓴 나를 위해 글쓰기, 일기 쓰기와 같은 일들을 야심한 밤까지 이어갔다. 필수는 아니지만 부족하면 병이 생길 수 있는 비타민 같은 일들로 살림만 하며 허기진 한쪽 가슴을 채웠다. 어쩜 설거지 정도는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 내일 해도 괜찮은 일이라 여겨왔.


생각해보면 이렇게까지 살림을 미루지는 않았다. 블랙 앤 화이트 콘셉트를 유지하던 심플한 신혼집에 온갖 유아용품이 널리게 됐다. 새하얀 벽은 형형색색의 대형스티커로 채워졌다. 둘이서 채워도 남아돌던 옷방에 사촌으로부터 받은 옷과 사는 옷들이 차고 넘쳤다. 오붓하게 식사를 마치고 뒷일이 없어서 바로 설거지가 가능하던 때에는 설거지가 쌓일 것이라는 상상을 못 해봤다. 식구가 늘어나는 것은 전업주부로써 치워야 할 것과 보살핌의 시간이 늘어나는 일이었다.


아이가 하나에서 둘이 되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는 분주함이 있다. 샤워를 하면 나오는 수건이 4장, 밥과 국을 먹으면 발생되는 최소 그릇이 8개, 신발이 개인당 2개 이상이라 신발장은 언제나 포화상태,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트렁크를 정리하다 맥이 빠진다. 나는 아이 둘을 키우면 대부분 나 같은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돌봄이 필요한 어린아이를 키우며 완벽하게 살림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어느 날 유튜브를 보다 살림을 우아하게 하는 분을 보았다. 나처럼 아이 둘을 키우는데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같았다. 이번 생에 저런 집을 꾸미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나도 저렇게 여유롭게 살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 생겼. 그가 하는 것처럼 설거지를 할 때마다 앞치마를 걸치고 하지는 못하지만, 설거지 거리 없는 개수대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가 하듯이 그럴싸한 와플 케이크를 아이들에게 만들어줄 수는 없지만 일정한 시간에 저녁을 직접 차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선한 영향을 받고 며칠 뒤 년 전만 해도 자주 하던 서랍장 정리를 오랜만에 시작했다. 몇 년 동안 손이 안 갔던  주방 물건을 버리고 싱크대 위를 싹 치웠다. 더불어 일주일 동안 매일 설거지 완료 미션을 스스로 클리어 해나 갔다. 설거지 쌓아두기를  유지하는 게 쉬웠던 나에게 매일 그날 설거지는 힘든 미션이다. 하지만 깔끔한 주방이 이 상태를 유지해달라고 소리 없는 외침을 하는 것 같아 매일 노력 중에 있다.


다이어터보다 힘든 게 유지어터라고 한. 오늘은 애벌 설거지하고 내일로 미루면 안 될까? 고민하던 나는 오늘도 개수대를 깨끗하게 정리했다. 10분도 안 되는 일을 미뤄서 24시간을 어지러운 상태로 마음에 짐을 진 채 사는 것을 미뤄내려고 애써본다. 설거지가 쌓여서 '초파리 제거제'를 선물하는 남편에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오기가 발동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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