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스럽게 10시가 되자마자 잠을 청했다. 다음 날은 딸의 소풍이기에 김밥을 싸야 하는 중대한 미션을 지니고 있었다. 오지 않는 잠을 청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나 보다. 그리고 번뜩하니 정신이 들어 환하게 밝혀진 핸드폰 액정을 찡그린 눈으로 겨우 살펴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3시 30분, 더 자야 했다. 나의 목표 기상시간은 새벽 6시였다. 남편이 출근 준비를 해서 '덜그럭' 소리가 나도 민폐를 끼치지 않으며 김밥이 쉬지 않는 이상적인 시간이었다.
핸드폰을 끄고 눈을 감았으나 쉬이 잠 속으로 빠져들지 못했다. 어제 못 봤던 웹툰이나 볼까? 한 두 개 웹툰을 봐도 시간은 새벽 4시였다. 어정쩡하게 잠이 들 바에 깨어 있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브런치 스토리 앱을 열어 글을 썼다.
지난주 엄마가 버스로 보내주신 오이소박이를 찾으러 가면서 느꼈던 감정이 잊히지 않아 새우처럼 등을 구부려 누운 자세로 작은 핸드폰 액정 속에 나의 마음을 줄줄이 써 내려갔다.
이래서 새벽 기상을 하는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조용한 새벽녘에 마음을 다해서 쓰는 글은 거침없이 써내려져 갔다. 오이소박이를 찾으러 갈 때의 설렘, 보자기매듭에서 느껴지는 엄마의 마음, 비릿하지만 감칠맛 느껴졌던 갓 담근 오이소박이의 향기까지 글에 넣을 수 있었다.
한 편의 글을 적고 보니 시간은 5시 30분이었다. 주방에 불을 켜고 일을 시작하기엔 무리수가 있었다. 일찍 자면서 하지 못했던 설거지부터 시작해야 하므로'소풍 도시락 싸기'는 많은 소음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폈다. 술술 읽다 보니 드디어 작업을 개시할 수 있는 6시가 다가왔다. 한 챕터를 마무리 짓고 일을 시작하려는데 소풍 가는 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스스로알람을 6시에 맞춰두더니 그 소리를 지나치지 않고 벌떡 일어난 것이다. 8시에 깨우면 더 자고 싶다고 발버둥을 치던 아이가 자발적으로 6시에 일어나는 기적을 만드는 소풍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책을 읽고 있는 품 안으로 딸이 파고들었다. 평소 동생에게 양보하느라 엄마품이 고팠을 큰 딸을 안으며 책을 마저 읽었다. 한참 엄마 품 안에서 부비적거리던 딸은 제대로 누워서 안기고 싶었는지 "엄마 밖으로 나가서 이불에서 책 읽으면 안 돼?"라고 물었다. "어떡하지, 엄마 이제 김밥 싸야 해"라고 말하니 투정 한 번 부리지 않고 다시 잠을 청하러 돌아간다. 도시락을 위해서라면 엄마의 품은 거뜬히 양보할 수 있을 만큼 자란 아이의 의젓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코로나로 인해 밖으로 나간 적 없었던 딸에게 이번 소풍은 특별했다. 초등학교 입학 후 친구들과 떠나는 첫 나들이였기 때문이다. 소풍 가기 한 달 전부터 어떤 곳에 갈 것인지, 도착해서는 어떤 활동을 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싱글벙글하던 아이의 모습을 통해 '설렘'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아이에게 힘을 보태고 싶었다. 소풍이 대수냐고 치부하려던 나는, 소풍 전 날 마트에서 다급하게 새로운 도시락과 물통을 샀다. '예전에 쓰던 도시락은 사이즈가 너무 작지... 물통을 이제 바꿀 때가 되었어...'라는 얄팍한 핑계를 대면서 소풍 간 곳에서 도시락을 보고 환하게 웃는 딸의 모습을 기대하며 카트에 새것들을 실었다. 어쩌면 소풍을 가는 딸보다 내가 더 두근거리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새벽녘에 일어나 잠이 들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새로 산 도시락을 깨끗이 씻어내고 검색창에 '초등학교 소풍 도시락'을 검색했다. 유부초밥, 꼬마김밥, 비엔나소시지는 사놓았으니 이것들을 이용해서 만들 수 있는 최선의 것들을 찾았다.
역시 아이들 도시락은 캐릭터로 완성된다. 검은깨만 있으면 못 할 것이 없었다. 소시지만 넣고 말은 김밥에 검은깨 두 개 만 붙여도 그럴싸 한 '스마일 김밥'이 되었다. 유부초밥에 문어를 붙이고 김으로 만 뒤 검은깨 두 개를 붙이니 '문어 유부초밥'이 되었다.
뭉뚝한 손톱 끝으로 유부 초밥 세트에서 검은깨를 발라내어 붙이는 일이 최대 난제였지만 이 정도면 요똥으로서 성공적이었다. 자랑스럽게 나는 딸에게 김밥을 들이밀었다. "어때?" 속으로 아이의 과한 탄성을 기대했으나 돌아온 것은 "어... 귀엽네" 김 빠진 사이다 같은 답변이었다.
아이는 잿밥에 관심이 있었다. 새로 산 도시락과 물통을 가리키면서 어서 뚜껑을 닫자며 서둘렀다. 설레는 마음으로 도시락을 새로 사길 잘했다는 마음이 들었다. 내용물에 자신이 없다면 도시락으로 승부를 보면 되는 것이니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평소 8시 33분에 집을 나서는 딸이 7시 54분에 집을 나섰다. 새로 산 도시락과 물퉁을 기분 좋게 둘러메고 떠나는 발걸음에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것처럼 경쾌한 소리가 나는 듯했다.
'그렇게 좋을까'
소풍 가는 딸 못지않게 설렜던 나는 아이가 버스에 타는 모습까지 전부 지켜본 후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6시부터 전쟁을 치렀던 주방에는 여러 잔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별 것 없는 저 도시락 하나를 위해서 새벽 4시부터 일어나 잠들지 못하고 무엇을 했나 싶다가도 한편으로 뿌듯했다. 시나모롤, 마이멜로디 같은 산리오 캐릭터 도시락을 싸지는 못했지만 소풍에서 기분 좋게 먹는 딸의 모습이 상상됐다.
"엄마, 도시락 진짜 맛있었어"
도시락을 처음 쌌을 때 듣지 못했던 호평을 소풍에서 돌아온 딸에게 들었다. 친구들이 신기해했다며 서로 나눠먹었다는 이야기까지 들으니 새벽에 일어났던 수고와 걱정에 대한 보답이 되었다.
한 번 해 봤기 때문일까? 다음 주에는 막내의 소풍이 기다리고 있다. 딸에게 캡처된 사진을 보여주면서 '엄마가 산리오 도시락 만들어 보려고 하는데..'라고 말했다. 잘 먹었다고 인사했던 큰 딸이 갑자기 화를 낸다.
"내가 무슨 오징어 게임의 부하야! 나한테는 문어를 싸주고 막내는 산리오를 해주는 게 어딨어!!"
미안,, 요리 못하는 엄마라... 엄마도 소풍 도시락은 처음이라 그래...오징어 게임의 부하라는 말에 웃고 있으면서도 먼저 연습해보지 않고 싸 보낸 문어 유부초밥이 머쓱해지는 순간이었다.(두 번째 소풍 가는 날에는 네가 원하는 더 예쁜 도시락 만들어 줄게...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