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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hamo Jeong Oct 03. 2016

[남자 찾아 산티아고 13] 폭풍우 치는 그밤의 미친놈

▲ [남자 찾아 산티아고 13] 폭풍우 치는 밤의 미친놈ⓒ 정효정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의 90%는 사랑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거 같아." 

부르고스에서 타파스 바를 순례하던 밤이었다. 뜬금없이 카일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그가 만난 사람들 대다수가 사랑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이 길을 걷고 있었다는 거다. 그는 10년 전 결혼을 했지만, 최근 이혼을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쉽게 헤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아이들 때문이지." 

그는 자신의 팔을 걷어 보여줬다. 두 아들의 이름이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너도 사랑에 대한 고민이 있어?"      


▲ 사랑에 대한 메시지가 가득한 돌 적혀있는 사연들은 대부분 사랑에 대한 사연이다 ⓒ 정효정


나는 선뜻 대답을 못했다. 엄밀하게는 '사랑에 대한 고민이 안 생겨서 고민'이긴 한데... 하긴, 그것도 사랑에 대한 고민이긴 하다. 대충 얼버무려 대답하고 릴리에게 질문을 넘겼다. 

"릴리, 너는 그래도 행복한 고민이잖아?" 

미국에서 온 그녀는 길을 떠나기 전 남자친구가 청혼을 했다고 했다. 그녀는 이 길을 다 걷고 나면 청혼에 대한 대답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같은 산티아고 순례길이지만 그녀가 걷는 길은 나와 달리 꽃길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선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나왔다. 

"어쩌면 청혼에 대답을 못할 수도 있겠어." 

그녀의 남자친구는 몇 년 전 사별을 했고, 11살이 된 남자아이가 있다고 했다. 부모님이 반대하냐고 묻자 그것도 아니란다. 한참 후에 나온 그녀의 고민은 내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내가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아이를 끝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 전깃줄에 매달린 신발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미스테리다 ⓒ 정효정


그녀는 사진을 몇 장 보여주었다. 릴리와 아이는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다. 실제로 사이가 좋다고 한다. 하지만 남자친구의 아이와 친하게 지내는 것과 그 아이의 어머니가 되는 건 다른 문제일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난 '계모'가 되는 거잖아. 동화책에 나오는 그 '계모'말야. 내가 무언가를 못하면 '계모니까'라는 말을 듣겠지. 잘한다면 '계모치고는'이란 말을 들을 거야. 계속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아이를 지금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상상도 못해본 고민의 무게에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와인잔을 뱅글뱅글 돌리며 대답할 말을 찾고 있는데 카일이 다시 한 마디 했다. 

"것 봐,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의 90%는 사랑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거라니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길이 끝나면 이 고민도 끝이 나는 걸까? 만약 해결법을 못 찾으면? 마음속에 의문이 가득 떠올랐지만 어두운 표정의 카일과 릴리를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헝가리에서 왔다는 그 사람 좀 이상하지 않아?"      


▲ 부르고스 대학 도시를 나가는 길에 보인다 ⓒ 정효정


그날은 오닐로스 델 카미노(Hornillos del Camino)에 도착한 날이었다. 부르고스에서 카메라 수리센터에 들르느라 나는 오후에 출발했다. 늦게 출발한데다 중간에 소나기까지 만났다. 결국 온몸이 젖어서 도착한 시간은 오후 6시, 이 작은 마을안의 알베르게는 모두 순례객으로 꽉 차 있었다. 하지만 마을 끝에 있는 공립 알베르게의 체육관에서 잘 수 있다고 했다. 

체육관에 도착한 순간, 환호성이 들렸다. 아침에 헤어졌던 다비드, 지블란, 미첼, 릴리였다. 다비드는 날 데리고 온 호스피탈레로 나쵸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내 손을 잡고 겅중겅중 춤을 췄다. 어안이 벙벙했다. 대체 이들은 아침 일찍 출발했는데 왜 나랑 같은 지점에 있는 걸까. 알고 보니 중간에 비도 왔고, 비온 김에 맥주 마시면서 노닥거리다가 이들도 오후 늦게 이 마을에 도착했다고 한다.      

▲ 자전거 순례자들 부르고스를 떠나고 부터는 계속 들판이 이어진다. 메세타평원이다.ⓒ 정효정

▲ 부르고스를 떠나 걷는 길 광야와 양떼 사이를 가로질러 가야한다ⓒ 정효정


어쨌든 이날 밤은 이 체육관에서 매트리스를 깔고 묵어야 했다. 다행히 알베르게에 있는 샤워실과 부엌을 쓸 순 있었지만, 비도 오고 추운 날에 차가운 바닥에서 자는 건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친구들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나는 남아서 짐을 풀고, 친구들은 요리를 하러 알베르게로 갔을 때였다. 그때 헝가리 순례자 이안이 체육관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내게 다가와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네가 내 매트리스에 손댔지?" 

난 당황해서 얼어버렸다. 불과 5분 전까지만 해도 내 발이 괜찮은지 걱정해주고, '파스타 많이 만들었으니까 먹으러 오라'는 알베르토의 메시지까지 전해줬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어느 순간 돌변했다. 신기한 것은 그의 영어 억양도 평소와 달라졌다. 처음 들어보는 경직된 발음이었다. 이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그때 릴리가 체육관에 들어왔다. 그러자 그는 이번엔 릴리에게 다가가 소리를 질렀다. 

"네가 내 매트리스에 손댄 거야?" 

릴리는 움찔했지만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니거든? 무슨 소리하는 거야?"

그러자 그는 다시 소리를 질렀다. 

"안 그런 걸 다행으로 알아!" 

릴리는 내게 눈짓을 하고 우리는 조용히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체육관 안에서 이안은 여전히 다른 사람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누가 내 매트리스 가져간 거야? 이런 일은 이 길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 체육관 바닥에 누운 순례자들 숙소가 다 찼을 때는 체육관에서 묵을 수 있게 해준다ⓒ 정효정


아무도 그의 매트리스에 손대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그의 매트리스도 아니다. 이 체육관에 비치되어 있는 매트리스였다. 그러니 설사 누가 가져갔다고 해도 다른 매트리스를 깔면 될 일이었다. 체육관 바닥에 널린 게 이 스티로폼 요가 매트리스다. 그때까지도 나는 질려서 한 마디 말도 못하고 있었다. 릴리는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것 봐, 내가 쟤 이상하다고 했잖아." 

참담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헝가리에서 온 순례자 이안. 그는 확실히 좀 이상했다.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일 때도 있지만, 아주 나빠 보이기도 했고, 가끔 이쪽을 보며 히죽히죽 웃고 있거나, 눈이 빨개져서 성당에서 혼자 울고 있을 때도 있었다. 나는 그냥 '감정기복이 심한 타입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본격적으로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건 미국과 캐나다에서 온 순례자들에게서였다. 

"그 사람 이상하지 않아? 그 헝가리에서 왔다는 사람."
"그러게. 그 사람 좀 정서적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알콜중독같기도 하고. 가끔 쳐다보는데 좀 소름끼쳐."  
"원래 동유럽계들이 좀 성격이 강하지 않어? 아, 지금 이 방에 동유럽계 없지? " 
"그치, 동유럽 사람들이 캐릭터가 세긴 하지." 

그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사실 북미출신 여행자들이 자주 다른 민족에 대해 뒷담화를 하는 게 마음에 안 들기도 했다. '저 호들갑스러운 북미인들이 또 엄한 사람 잡는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낙관적인 판단과는 다르게 일은 터져버렸던 것이다.      

▲ 온타나스 마을 이런 곳에 마을 이 있을까 싶은 곳에 마을이 숨어 있었다 ⓒ 정효정



폭풍우치는 그 밤에... 과도를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릴리와 나는 호스피탈레로에게 이안의 상태를 전달했다. 다른 친구들도 팔짱을 끼고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체육관의 다른 순례자들도 알베르게 부엌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안이 더욱 광분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우리는 대책을 논의했지만 뚜렷한 방법이 없었다. 오늘밤 우리가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은 그 체육관밖에 없다. 결국 이안이 잠들기를 기다려 우리는 손전등을 켜고 조심조심 불이 꺼진 체육관으로 들어갔다. 이안은 잠을 자는지 조용히 누워있었다.  

정말 최악의 밤이었다. 공기는 축축하고 체육관 바닥은 차가웠다. 바깥에선 바람이 거세게 불고 체육관 문은 연신 덜컹거렸다. 다들 침낭 속에 들어가서 잠을 청하는데, 누군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 오늘밤 잠들 수 있을까."

'그러게...' 나는 속으로 말을 받았다. 그때 말은 못했지만 나는 정말 울고 싶을 정도로 공포에 질려있었다. 손전등을 켜고 이안의 옆을 지날 때 어둠속에서 그의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우리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엄밀하게 본 것은 아니다. 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생각만으로도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는 잠들지 못하고 광분한 이안이 한밤중에 자고있는 우리들에게 칼을 휘두르는 상상을 했다. '내일 체육관 문을 연 호스피탈레로는 죽어있는 우리를 발견하겠지...' 한 번 시작된 나쁜 상상은 끝이 없었다. 나는 만약을 대비해 가방에서 접이식 과도를 꺼내 주머니 안에 넣었다.      

▲ 산볼 알베르게 아무 것도 없는 벌판에 알베르게가 하나 서있다ⓒ 정효정

▲ 호스피탈레로 나쵸의 여정이 찍힌 순례자 여권 그 역시 순례자였으나 이곳에서 호스피탈레로로 봉사활동 중이었다. ⓒ 정효정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환히 밝아진 체육관에서 눈을 떴다. 시계를 확인하니 오전 8시. 체육관 안에는 이안을 비롯한 다른 순례자들은 모두 떠나고 우리 일행만 잠을 자고 있었다. 세상에, 그 와중에 꿀잠을 잔 것이다. 아... 나는 대체 뭘까. 

친구들을 깨우니까 다들 멋쩍어하면서 깬다. 다들 자신들이 꿀잠을 잤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눈치다. 알베르게로 가니 호스피탈레로 나초만 남아있었다. 이왕 늦은 거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느긋한 시간을 보냈다.

이곳의 호스피탈레로 나초 역시 순례자다. 그의 여정은 로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곳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다시 걸어 산티아고까지 가고 또 걸어서 로마까지 돌아갈 거라고 했다. 그는 행복을 나누어주는 컵이 여행을 하는 동화를 쓰고 있었다. 떠나기 전, 그는 우리에게 노래를 한 곡 불러줬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If I can dream'이라는 노래였다.

"우리는 거센 비가 오는 구름 속에 길을 잃고
우리는 고통이 끊이지 않는 세상 속에 발이 묶였지.
하지만 우리가 계속 꿈꿀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영혼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거야. 

마음 속 깊은 곳에 떨리는 질문이 있어.  
하지만 분명 답은, 답은 어떻게든 내게로 찾아올 거야" 
- 엘피스 프레슬리 < If I Can Dream> " 

그의 매력적인 중저음과 함께, 어제의 걱정과 근심은 날아가고, 다시 빛나는 날이 찾아왔다. 길은 탁 트인 평원이 이어졌다. 바람을 거슬러 걷느라 힘은 들었지만 어쩐지 속은 후련했다. 길을 걸으며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떠올렸다. 이혼을 고민 중인 카일도, 결혼을 고민 중인 릴리도, 마음속 어두움에 빠진 이안도... 모두 모두 길을 걸으며 답을 찾게 되길. 

이제 산티아고까지는 467km남았다.      


▲ 모두에게 평화를 주는 순례자 나초와 함께 간밤의 이안같은 인연도 있었지만, 순례길의 대부분의 인연은 이렇게 늘 좋은 사람들이었다. ⓒ 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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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에 괜찮은 남자가 많다'는 말만 듣고 800km를 걸어버린 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태그:산티아고순례길CAMINO카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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