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hamo Jeong Jan 19. 2024

우즈베키스탄 안디잔 - 그는 왜 나를 친구라고 불렀을까

환상여행담 첫 번째 이야기 





우즈베키스탄 안디잔 Andijan     
우즈베키스탄의 동쪽 끝, 페르가나 분지에 있다. 옛부터 비단과 과일, 곡식이 많이 나는 풍요로운 땅으로 실크로드의 요충지기도 했다  소련 시절에는 면화와 석유, 공장이 많은 산업 도시로 발전했다. 2005년 5월, 정부군이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의 장기집권 및 정치탄압에 반대하는 안디잔의 반정부 시위대에 총격을 가해 약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은 2016년, 뇌출혈로 사망했다.     





“너는 내 손님(guest)이니까, 돈을 받지 않을 거야”     


그는 내가 건낸 돈뭉치를 다시 돌려줬다.       


“나는 승객(passenger)이지, 손님(guest)이 아니야.”      


나는 답답해하며 다시 돈뭉치를 그에게 건냈다. 하지만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돈에 손조차 대지 않으려 했다.      

아니, 이 돈에 무슨 문제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 사이에는 난감한 침묵이 흘렀다. 그곳은 실크로드 중간에 있는 안디잔이라는 소도시였다. 여름이었고, 어느새 9시가 가까워왔다.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할 시간이었지만 돈을 둘러싼 실랑이는 끝나지 않았다. 돈이 한차례 더 오고 가자, 그는 굳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안디잔에서는 친구에게 돈을 받지 않아.”      


그 말에 나는 대답도 못하고 입만 벌렸다.       


친구. 

우리가 언제부터 친구였을까?      


사실 우리는 그날 오전 타슈켄트 꿀룩 바자르에서 처음 만난 사이였다. 정확히는 내가 시장 한복판에서 한 택시 운전사와 싸우고 있을 때였다. 꿀룩 바자르는 시외로 가는 합승택시가 모이는 곳이다. 합승 택시는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중앙아시아에 흔히 있는 교통수단인데, 보통 3~4명이서 승용차 한 대를 타고 가게 된다. 

일치감치 도착한 나는 안디잔으로 향하는 합승 택시를 찾았다. 이미 안디잔까지의 합승 택시 요금을 알아놨기 때문에 흥정은 쉬웠다. 한 택시기사가 내 배낭을 들어주더니 곧 출발하니까 자기 차에 타서 기다리라고 했다. 합승 택시는 출발 시간이 따로 없이 인원이 차면 차가 출발하는 식이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차에 앉아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그가 오더니 차를 출발시켰다.      


어? 잠깐? 왜 나만 탔는데 출발을 시키지?    

 

쎄한 느낌이 들어서 달리고 있는 차를 멈추게 했다. 하지만 이미 달리기 시작한 택시 운전사는 차를 멈추지 않고, 아까 와는 딴소리를 했다. 안디잔까지 편안하게 혼자 태워줄테니 나머지 3인 분 요금을 더 내라는 것이다. 어느새 차는 꽤 달려서 시내를 벗어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계속 차를 세우라고 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안했다. 이미 차가 달리고 있으니 네가 어찌하겠냐는 식이다. 머릿속으로 경고음이 울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런 일이 처음 겪는 상황은 아니었다. 여러 번 인도를 여행 했던 경험으로 웬만한 돌발 상황은 다 겪어 봤기 때문이다. 거칠었던 20대의 나 자신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하지만 그런 과거와 달리 이번엔 우아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나는 며칠 전 알게 된 우즈베키스탄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현지에 가면 현지 친구를 사귀어 놓는 편인데 다행히 그게 도움이 된 경우였다. 심지어 그 친구는 정부 고위 공무원이었다. 친구와 통화하던 택시기사는 결국 꿀룩 바자르로 차를 돌렸다. 한시름 돌렸다. 


그런데 그는 끝까지 뻔뻔했다. ‘지금까지 너를 태우고 달린 돈을 내라’는 것이다. 인질은 내 백팩이었다. 그가 제시한 금액은 10,000솜. 겨우 10분 남짓 달려놓고 타슈켄트에서 안디잔까지 가는 택시비의 1/5를 받겠다는 거였다. 어림없는 소리였다. 나는 ‘네가 멋대로 차를 출발시켰으니 줄 수가 없다’고 버텼다. 


사실 줘버리면 그만인 돈이다. 하지만 때론 여행지에서 돈은 돈 그자체가 아니라 자존심의 문제가 되곤 한다. 때는 7월, 중앙아시아의 여름은 뜨겁다. 그 더위에 택시기사와 동양인 여자가 길바닥에서 말다툼을 벌이는 기이한 장면을 택시기사들이 둥그렇게 모여 보고 있었다. 택시 기사는 급할 게 없었고, 나는 돈보다 내 자존심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팽팽한 대치가 끝나지 않을 때 갑자기 누군가 끼어들었다. 앳된 인상의 젊은 남성이었다. 그는 자기 주머니에서 ‘척’ 하고 10,000솜을 꺼내 나와 싸우고 있던 택시 기사 손에 쥐어줬다. 그리고는 내 손목을 잡고 그 혼란을 빠져나왔다. 주변 택시 기사들의 야유가 울려 퍼졌다. 그는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푹 숙였지만, 옆얼굴을 보니 뿌듯하게 웃고 있었다. 


그 소란을 빠져나와 그가 가리키는 차를 보니, 세 명의 사람들이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한 명만 더 차면 출발하는 안디잔 행 택시 손님들이었다. 그렇게 그를 처음 만났다. 자신을 안디잔스키(안디잔 사람) 이라고 소개하는 24살 택시 기사를. 


이후 여행은 순조로웠다. 타슈켄트를 벗어나 페르가나 분지로 향할수록 창밖 풍경은 푸르러지고, 청년은 차를 운전하며 시종 콧노래를 불렀다. 나는 뒷좌석에 함께 앉은 20대 여성에게 우즈베키스탄어를 배웠다. 한 문장을 따라 할 때마다 차 안의 모든 사람들이 ‘너 정말 잘 한다’며 칭찬을 퍼붓는 민망한 상황이었다. 우리는 간이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 마치 친한 지인들과 교외로 여행을 온 것처럼 흥겨웠다. 


오후가 되자 청년은 간이 휴게소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는 기도용 카펫을 옆구리에 끼고 내게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해보였다. 무슬림의 오후 기도 시간인 듯 했다. 나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고 다녀오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언어를 모르는 관계로 그냥 고개를 붕붕 끄덕이며 러시아어로 ‘하라쇼(좋아), 하라쇼(좋아)’만 반복했다. 


무슬림 신자들이 기도를 하러 간 동안 나는 주위를 돌아봤다. 도로변엔 커다란 수박을 산처럼 쌓아놓고 파는 상인이 보였다. 중앙아시아의 수박철이었다. 기도가 끝나자 사람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돌아오던 청년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예의 그 뿌듯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의 손엔 수박 한 조각이 들려있었다. 나는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며 다시 ‘하라쇼(좋아)’를 열 번쯤 외쳤다. 


이 화기애애한 여정이 잠시 얼어붙었던 순간은 안디잔이 가까워졌을 때였다. 군인이 총을 들고 서 있는 검문소가 등장했다. 검문소가 가까워지자 다들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청년은 긴장된 표정으로 내게 ‘사진 찍지 말라’ 고 당부했다. 곧 군인이 와서 신분증을 검사했다. 아무도 입도 뻥끗 하지 않고 군인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나만 몸에 밴 예의로 작게 “땡큐”라고 했을 뿐이다. 군인들이 멀어지자 우리 차는  따스한 온기를 되찾았다. 검문소를 몇 번 더 지나고 차는 안디잔에 도착했다. 


사실 그 여행의 목적지는 안디잔이 아니라 근처 도시인 마르길란이었다. 과거 페르가나 분지는 실크로드의 요충지였고, 마르길란은 아직도 수공예로 비단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당시 안디잔은 거점도시일 뿐이었다. 안디잔에 대해 내가 알고 있던 것은 무굴제국을 세운 바부르가 이 도시 출신이라는 것이다. 바부르는 부계로는 티무르의 5대손이자, 모계로는 칭기스칸의 13대손인 혈통 있는 통치가 가문 출신이었다. 페르가나 지역을 통치하던 그는 티무르 제국의 옛 수도인 사마르칸트를 수복하고자 했지만 3번 도전해 3번 다 실패하고 만다. 결국 그는 중앙아시아를 포기하고 북인도에 무굴제국을 세웠다. 인도 델리에 있는 후마윤의 무덤이 그의 아들의 무덤이다.  


또 하나 안디잔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2005년 5월의 ‘안디잔 사태’였다. 당시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의 장기집권 및 정치탄압에 맞선 시위를 벌이고 있던 시위대에게 정부군이 무차별적인 사격을 가했던 사건이다.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사망자는 187명이지만, 현지인들은 최소 1500명에서 2000명이라 주장한다. 카리모프 대통령은 강력한 보도 통제뿐 아니라 외신 기자나 국제조사단의 출입을 금지했기에 정확한 통계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우즈베키스탄의 광주’라는 표현을 썼다. 5월 광주에도 “공산·용공 분자와 간첩의 소행“이라는 딱지를 붙였듯이, 5월 안디잔에도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소행이라는 우즈베키스탄 정부 발표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아픈 역사에도 불구하고 안디잔의 첫 인상은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이 도시는 옛 실크로드의 거점 도시였고, 소비에트 시절에는 면화와 석유를 생산했던 지역이다. 지금은 자동차를 비롯한 각종 공장이 많은 산업 도시로 발전했다.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니 곳곳에 티코, 마티즈, 다마스 등 익숙한 자동차가 보였다. 이곳에는 GM자동차 공장이 있어 한국에 대한 호감도가 높다고 한다. 


안디잔에 도착해도 우리는 바로 헤어지지 않았다. 안디잔스키 택시 운전사는 날 태운 채 도시 구석구석을 소개시켜 주었다. 사실 우리 사이에 번역 어플 없이 통하는 말은 '맛있지?', '예쁘지?', '좋지?' 정도지만 별 문제되지 않았다. 그는 놀이공원에서 관람차를 태워주고, 안디잔의 가장 높은 빌딩에서 도시의 야경을 보여주고, 현지 시장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줬다. 그리고 그는 연신 '안디잔 예쁘지? 좋지?'를 물었고, 나도 한껏 웃음 띈 얼굴로 '안디잔 하라쇼'로 답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뿌듯한 표정이 되어 자랑스럽게 그의 도시를 바라봤다. 

그의 표정이 굳을 때는 군인이나 경찰을 봤을 때였다. 한번은 경찰차가 마티즈여서 나는 귀엽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데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그가 사색이 되어 말렸다. 그는 급히 내 핸드폰의 번역어플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안디잔에서는 군인이나 경찰을 조심해.”      


그들에게 경찰이나 군인이 어떤 의미인지 헤아리지 못했던 나는 그저 ‘응응’ 대답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렇게 저녁나절을 함께 시간을 보내고 숙소로 향할 때였다. 론리플래닛에 나와 있는 숙소 주소를 내미니까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너무 질이 나쁜 숙소라는 것이다. 그러더니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더니 내 예산에 맞는 다른 숙소를 추천해줬다. 그리고 숙소 직원들에게 내 짐을 맡기고 나를 잘 돌봐줄 것 까지 부탁하고 그는 돌아가려 했다. 그가 떠나기 전 나는 급하게 그에게 타슈켄트에서 안디잔까지의 합승 택시 비용을 건냈다. 하마터면 노느라 잊어먹을 뻔 했다. 그런데, 그는 그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하며 우리 사이에는 신경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안디잔에서는 친구에게 돈을 받지 않아.”     


그의 갑작스러운 친구 선언에 놀라긴 했지만, 뭐, 오늘 하루 정겹게 잘 지냈으니 우린 친구인가보다. 그래, 너 내 친구하자. 새 친구는 언제나 환영이니까 그건 좋았다.      


아니, 근데, 친구니까 더 돈을 받아야하는 거 아닌가?      


친구 사이에도 돈 문제는 확실히 해야 하는 대한민국에서 온 나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친구이니까 더더욱 그가 하루 동안 일한 노동의 대가를 그냥 꿀꺽 할 순 없었다. 


난감한 그와 나 사이에는 누구도 건드리지 않으려고 하는 돈뭉치가 남았다. 그게 돈 뭉치인 이유는 당시만 해도 우즈베키스탄에 고액권이 발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목침 대신 쓸 수 있을 정도로 두툼한 뭉칫돈을 들고 다녀야 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실랑이의 마지막은 나의 승리였다. 기어이 나는 그에게 돈을 건넸고, 그는 고집스레 그 돈뭉치에서 지폐를  얼마 덜어 내게 다시 건네주고 떠났다.           





다음 날은 안디잔의 주메 모스크를 방문했다. 한국인이라고 하자 모스크를 지키는 할아버지는 묻지도 않았는데 두꺼운 방명록을 들고 나왔다. 이 모스크는 유명해서 한국인도 많이 방문한다는 거였다. 하지만 그의 자랑스러움과 달리 방명록을 들춰보던 나는 말문이 막혔다. 한국어 내용은 하나 같이 ‘하나님 아버지, 이들은 이들의 죄를 모르니 용서해주시고, 이들의 악한 영이 성전 앞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의 영광이 승리하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머리가 띵 하고 울렸다. 


사실 이런 일은 중앙아시아를 여행하다보면 비일비재하다. 한번은 부하라의 한 광장에서 한 무리의 한국 청년들을 만난 적이 있다.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하기에 연주를 하나 싶었는데, 기도 중이었다. 기도 내용은 이 불쌍한 민족을 구원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저 한국 청년들이 자신들을 불쌍한 민족이라 칭하는 줄도 모르고 천진하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교주가 신도 성폭행 혐의로 감옥에 간 그 교단이었다. 무슬림 국가인 우즈베키스탄에서 이러한 행위는 불법 선교행위다. 추방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같은 한국인의 불법 행위는 현지 교민들에게 피해가 간다. 나중에 타슈켄트의 한인 사장님들께 듣기로는 중앙아시아는 일명 ‘할렐루야 루트’로 불릴 정도로 불법 선교가 판을 치고 있다고 했다. 


복잡한 내 심경을 알 리가 없는 경비원 할아버지는 내게 ‘어서 한 페이지 쓰라’며 펜을 건넨다. 순간, 어제 안디잔스키 택시기사와 있었던 수많은 일들이 생각났다. 


과연 그는 악한 영이었을까. 


어제 열이 뻗쳐서 싸우고 있던 나를 데리고 의기양양하게 자기 차로 향하던 모습, 기도 시간이 되자 미안한 표정을 짓던 모습, 수박을 한 조각 얻어와 건네고 환하게 웃던 얼굴, 내가 가이드북에 나온 싸고 허름한 숙소 주소를 대자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어두운 표정,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내 예산에 맞는 깔끔한 숙소를 찾아주고 호텔 직원에게 날 부탁하던 모습, 조명이 들어오는 분수에서 내가 환호성을 지르자 마냥 뿌듯한 얼굴이 되던, 24살 안디잔스키.


그런 그가 악한 영이라니.


속상했다. 또 미안했다. 그가 이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는 나한테 그렇게 선했는데. 만약 그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내 표정을 살피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기뻐하면 그도 환하게 웃었고, 내가 시무룩해지면 그도 같이 시무룩해졌기 때문이다.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차라리 어제 놀이기구도 사양하지 말고 더 탈걸, 솜사탕도 양꼬치도 사주는 대로 다 먹을 걸. 더 많이 웃고 더 기뻐해 그가 더 뿌듯할 수 있게 할 걸.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어젠 내가 잘못한 거구나.      


뒤늦게 속이 쓰려왔다. 


내가 기어이 돈을 건넸을 때 급격히 어두워지던 그의 표정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유 없는 호의는 없는 거고, 친구 사이에도 돈 관계는 확실해야한다는 건 내가 사는 세상의 기준이다. 내가 대체 뭐라고 그의 앞에서 내 기준만이 절대 법칙인양 우겼단 말인가. 그렇다면 나는 자신이 믿는 신만이 옳다며 방명록을 쓰는 사람들하고 뭐가 다른가. 


나는 어제 승객이 아니라 그의 친구여야 했다. 그리고 나를 친구라고 부르는 그의 호의에 감사하고 기뻐해야 했다. ‘아니야, 괜찮아’ 대신, ‘좋아, 고마워’ 라고 말해야 했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그를 위해 행복해야 했었다. 그의 친구로서 내가 보답할 건 그것 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 또한 그의 친구로서 그 뿌듯한 미소를 지켜주고 싶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전화번호도 이메일도 모르는 우리는 이미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사이였다. 고맙다고, 지금도 조금 미안한 마음이 있지만 그래도 마음 속 깊이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고맙다, 친구. 





토요일 연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