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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균 Apr 23. 2023

전역에 관하여

힘이 되어준 당신에게

전역. 입영 통지서를 받은 그날부터 손꼽아 기다려온 단어입니다. 혹시 본인이 건장한 남성이지만 아직 군대를 다녀오시지 않았다면 이 글을 읽는 데 주의를 요합니다. 미필자에게는 괜한 기대와 걱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거든요. 사실 뭐 전역이니 뭐니 유난 떨며 글을 쓸 생각은 없었는데 10년 정도 지나면 '좋은 추억이었지'하면서 강제로 기억이 미화될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끄적이는 이유입니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울지 않는 날이 없었다 이런 건 아닙니다. 재밌었던 일도 많았고 살면서 경험해 볼 수 없는 일들도 많아 인생이 다채로워진 건 사실입니다. 잠깐 훈련 얘기를 해보자면 전 대한민국에서 영하 25도까지 떨어지는 지역이 있다는 걸 작년 겨울에 처음 알았습니다. 저희 집 냉동고가 영하 20돈데 말이죠. 10일 동안 씻지도 못하고 옷을 8겹씩 껴입으면서 비닐봉지에다 밥을 먹으면 사람이 꽤 단순해집니다. 정말 살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더 궁금하신 분들은 유튜브에 KCTC라고 치시면 대충 어떤 훈련인지 아실 겁니다. 특수 레이저 장비를 활용 어쩌고 하면서 국방티비에서 홍보하는 영상이 나올 텐데 산 중턱에다가 이유도 모른 채 1.5m 정도 땅을 파 그 안에서 4일 동안 2교대로 4시간씩 한 명은 앞을, 한 명은 뒤를 보며 추위에 바들바들 떨면서 서있었던 제 입장에서는 국방이고 나발이고 북한군이 따뜻한 샤워 한 번 시켜준다고 하면 제 영혼까지 팔았을 겁니다. 아, 먹을 물이 없어서 주위에 있는 눈을 모아 버너에 녹여 먹었다고 하면 애들이 안 믿더라고요. 핸드폰을 가져가지 못한 게 천추의 한입니다.

그런데 군대를 다녀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실 육체적으로 힘든 건 별로 큰 문제는 아닙니다. 오히려 정신적으로 사람이 서서히 망가지죠. 부조리가 없어졌다 하지만 24시간 동안 긴장상태를 유지하며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것과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에 또래 여자 친구들은 교환학생과 각종 대학교 행사를 즐기며 빛나는 20대를 보내는 것과 대비되는 칙칙한 생활관, 어딜 보아도 보이는 빡빡머리, 강제로 끌려온 집단이라 그런지 찾아볼 수 없는 의지와 무기력함 속에서 지내다 보면 아무리 자아가 강한 사람이라도 그 분위기를 이기긴 힘들 겁니다.

처음엔 물들지 않고자 노력했습니다.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할까요, 입에 가득 웃음을 머금은 채 하루를 가득 미소로 채우고 낯선 이에게 오랜 친구인 듯 자연스레 인사를 건네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생각만큼 되진 않았습니다. 오후 5시 반에 받는 폰이 행복의 전부였던 곳에서 따뜻한 사람이 되기는커녕 가시 돋친 말들을 뱉고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이 제일 싫어했던 사람들의 실루엣과 겹쳐 보인다는 걸 깨달았을 땐 꽤나 많은 시간이 지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의 가족이나 주위 남자 친구들이 무사히 전역을 했다면, 술자리에서 꽤나 찡찡거리거나 괜한 군부심을 부려도 어느 정도는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 그 친구들 아마 1년 반 동안 정말 힘들었을 거거든요. 저 역시 최대한 말을 줄이면서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군필자인 친구들을 만나면 옆 테이블을 신경 쓰지도 않고 말이 길어지는 걸 보니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1년 반이었지만, 좋은 기억만 가지고 나가겠습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즐거웠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짜증 나는 사람들을 만나서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었고 멋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큰 꿈을 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꿈꿨던, 계획했던, 하고 싶었던 모든 일에 발자국을 남겨보겠습니다. 발자국이 어디로 이어질진 모르겠지만 신나는 모험이 되겠네요!

이제 12시간 뒤면 끝입니다. 사지방에서 쓰는 이 마지막 글을 끝맺으면서 지금까지 저를 스쳐갔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해드립니다. 당신이 제 옆에서 함께했든, 먼발치 서울 어딘가에서 스마트폰 화면 속 브런치 글의 좋아요와 댓글로 함께했든, 덕분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쉼 없이 설레지만 약간은 떨리는 감정을 뒤로하고 이젠 다시 사회로 나가보겠습니다. 응원해 주고, 위로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보내주신 감사와 위로에 걸맞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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