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내 집중력
정신없는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거처를 옮겨 물리적 거리가 짧아진 탓에 만남이 늘어난 것인지 아니면 바빠지는 9월이 오기 전에 끝나가는 여름을 조금이나마 붙잡으려 했던 것인지. 일주일 내내 약속이 있었던 적은 처음이었기에 설렘과 피곤 그 사이 어딘가 정신을 계속 두고 있었습니다. 동아리 면접부터 취재하며 얻은 공짜 연극 티켓,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MT, 다시 시작된 학생기자 취재 등 이런저런 일이 많았지만 다 쓰기에는 제 필력이 따라주지 않아 지난주의 첫 시작. 오펜하이머 얘기를 하겠습니다.
월요일에 오펜하이머를 봤습니다. 정정하겠습니다. 들었습니다. 저번 글에 예매 팁을 알려준 친구와 인터넷의 도움으로 아이맥스를 예매해 설레는 마음으로 향했지만 라섹한지 4개월 밖에 되지 않은 제 눈은 무지막지하게 큰 자막과 화면비율을 감당하지 못해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뻐근하더라고요. 오히려 좋다. 3년간의 국제고 생활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리라 하며 리스닝을 시도했지만 제가 알고 있는 물리학은 슈뢰딩거의 고양이뿐임을 잊고 있었습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깜빡 졸고 중반부터는 그래도 눈이 좀 적응돼서 재밌게 봤습니다. 인생 영화다! 까진 아니지만 이젠 놀란의 작품은 믿고 보는 정도가 된 거 같습니다. 테넷처럼 미친 듯이 복잡하지 않고(아직까지 테넷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크나이트같이 누가 봐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작품성과 대중성을 짭짤하게 잘 섞는 비법을 터득했달까요. 영화가 인터스텔라나 인셉션같이 압도하는 느낌은 덜하지만 작중의 대사로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방식이 꽤나 신선했습니다. 같이 본. 정정하겠습니다. 5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따로 봤던 친구는 '잘 정리된 나무위키를 읽는 느낌'이라는 감상평을 남겼습니다. 아마 놀란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나무위키 몇 줄 정도는 자기가 고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을 만큼 공감합니다. 혹시라도 진짜 고쳤으면 댓글을 달아주시길.
아이맥스는 잘 모르겠지만 영화관에서 봐야 되는 이유는 사운드. 단순히 웅장하다란 느낌보다 인물의 감정선을 극대화하는 연출을 잘 활용했습니다. 긴박한 음악으로 분위기를 형성하다 막상 핵폭발 실험에 성공하는 장면에선 음소거를 한 연출은 정말 짜릿합니다. 당장 비슷하게 생각나는 걸로는 슬램덩크의 마지막 공격 장면과 드라이브 마이 카 막바지 부분에서 남주와 여주가 달리다 여주가 피던 담배를 선루프로 들어 올리는 장면... 두 영화에서 이런 포인트에 심장이 쿵쾅거리신 분들은 이번 영화도 잘 맞을 거라 생각됩니다.
아, 그리고 갑자기 조디악이 보고 싶어져 불법 스트리밍이 없나 찾아보고 구글에게 2000원을 주고 어제 봤습니다. 불법 스트리밍이 범죄긴 하지만 난 평소에 선량한 시민이니 이 정도의 경범죄는 저질러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종종 갖고 있기 때문에 성인이 된 지금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 범죄 습관입니다.
옛날에 데이빗 핀처 감독의 영화를 좋아했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좋아하지만 파이트 클럽의 브래드 피트를 보고 아빠 옷장에 가 가죽 재킷이 없나 뒤적거리는 걸 시작으로 세븐, 나를 찾아줘, 소셜 네트워크 등 넷플릭스에 있는 유명한 영화들을 본 기억이 있는데 핀처 특유의 건조한 느낌이랄까, 살인, 폭력이 일상처럼 나오고 분명 할리우드 영화지만 할리우드를 추종하지 않는. 무정부주의? 불편? 영화 내내 관객을 어딘가 불편하게 만드는, 근데 그 불편함이 어떤 감정으로부터 오는지 모르겠는 그 특유의 느낌. 아 좋아했다는 말은 취소하겠습니다. 생각해 보니까 좋아함의 감정보단 불편함의 감정이 컸고 근데 그 불편함이 곱씹을수록 깊은 여운을 줘서 그런지 머릿속에 깊이 박히고... 이건 좋아하는 걸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왜 오펜하이머를 보며 데이빗 핀처 감독이 생각났을까 고민해 봤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오펜하이머의 극단적인 감정을 무미건조한 대화로 이끌어내는 과정과 몇십만 명이 죽은 핵폭발을 그냥 라디오 송출 하나로 퉁치는 장면, 개인적인 원한으로 촉발된 거대한 청문회까지. 여러모로 비슷한 분위기가 들어가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 긴 러닝타임까지도요 (제 집중력은 2시간이 최대이니 놀란 감독은 앞으로 주의하기 바랍니다.)
조디악으로 오랜만에 다시 느껴본 핀처의 그 알 수 없는 불쾌함과 놀란의 미친 스토리 구성력까지. 나쁘지 않았던 일주일이었습니다. 집중력을 요하는 컨텐츠를 이번에 많이 접했다 보니 오히려 더 릴스를 많이 보게 되는 거 같기도 하고 그러네요. 과연 제 집중력은 누가 훔쳐 간 걸까요. <도둑맞은 집중력>이란 책이 교보문고 베스트셀러에 올라와 있던데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이 시대의 깨어있는 경제학자 윤루카스의 <차가운 자본주의>가 베스트셀러 문고에 오른 걸 보고 그쪽 매대는 쳐다도 안 봤는데 이 책은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이 책은 따뜻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