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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리영 May 04. 2023

모든 이야기가 거짓이라면

1부. 모든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거짓이다


이야기란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사람은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이야기를 쓰고 찾는다고 믿는다.


이를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해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이해’란 그저 안다는 것을 넘어, 그 개연성을 긍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안다는 일이 그저 ‘A가 B를 좋아한다’라는 사실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해한다는 일은 ‘A가 B를 좋아할 만하다’라는 이유 혹은 인과관계에 대한 긍정이다. 다시 말하자면 어떠한 사실에 대한 개연성을 그럴듯하다고 인정하는 일이다.


사람은 빈칸이 숭숭 뚫려있는 문장과 비슷하다. 한눈에 이해하기 어려워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빈칸을 상상해야만 한다. 상상을 더해 읽은 문장이 그럴듯할 때 우리는 누군가를 이해했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A가 B를 좋아한다’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운동을 좋아하는) A는 (운동선수 출신의) B를 좋아한다’처럼 빈칸을 상상하는 것이다.


언젠가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어떤 문장도 삶의 진실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이를 근거로 우리는 결코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모든 이야기란 필연적으로 거짓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든다. 나는 그 목적이 이해라는 맥락에서 마음이 뭉클해지곤 한다. 우리는 결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겠지만,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한없이 근사(近似) 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2부. 이야기하고 싶은 장면에 도달하기 위해, 그 앞의 이야기를 만든다.


우리는 스스로 ‘나’를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나’의 여러 가지 빈칸에 대해서 그럴듯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B를 좋아한다’라는 사실에 대해 ‘나는 (아름다운 사람이 좋고, 아름다운) B를 좋아한다’라는 이야기를 통해 ‘나’를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앞서 ‘모든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거짓’이라고 말한 것처럼. ‘나’를 이해하는 모든 이야기 또한 거짓일 것이다. 모든 이야기들은 나에게 주어진 어떠한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뒤늦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B를 좋아한다’라는 사실이 먼저 주어지고, 이를 스스로 이해하기 위해 ‘나는 (아름다운 사람이 좋고, 아름다운) B를 좋아한다’라는 그럴듯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누구나 스스로 ‘나’를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스스로 만들어낸 이야기가 진실과 한없이 근사(近似) 할 것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결코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도 없을 것이다.


나는 서론부터 시작해 차곡차곡 결론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는 드물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화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장면에 도달하기 위해, 그 앞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결국 스스로 ‘B를 좋아한다’라는 장면에 도달하기 위해, 앞선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았다고 그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내가 전하고 싶은 것은, 모든 이야기는 거짓이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자기합리화라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히려 이러한 거짓들을 긍정한다. 이야기란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다만 이야기에 매몰되어 스스로를 억압하지 않을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언제부터 우리는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 결과 자신에게 허용된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를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누군가 믿어주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는 스스로에게도 없었던 일로 하고,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며내 그것을 맹목적으로 믿어버리는. 스스로가 느끼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그럴듯한 행동을 해왔던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이 엄습하기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가 거짓이라면, 내가 진실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순간순간 감각되는 느낌이라고 믿는다.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내가 B를 좋아한다’는 느낌. 나는 내가,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야기나 개연성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이러한 순간들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즐겨 마시는 커피의 종류를 알고, 네가 하루에 몇 시간을 자야 개운함을 느끼는지 알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와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인가? 나는 네가 커피향을 맡을 때 너를 천천히 물들이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일곱 시간을 자고 눈을 떴을 때 네 몸을 감싸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네 귀에 가닿을 때의 그 느낌을 모른다. 일시적이고 희미한, 그러나 어쩌면 너의 가장 깊은 곳에서의 울림일 그것을 내가 모른다면 나는 너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느낌이라는 층위에서 나와 너는 대체로 타자다. 나는 그저 ‘나’라는 느낌, 너는 그냥 ‘너’라는 느낌.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느낌의 세계 안에서 드물게 발생하는 사건일 것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 그러니까 어떤 느낌 안에서 두 존재가 만나는 짧은 순간.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사로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사랑은 능력이다.” -신형철, 『느낌의 공동체』중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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