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처럼,돌같이
레오 리오니 <바닷가에는 돌들이 가득>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이라는 표현이 있다. 세상에 그만큼 돌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아마 흔하디 흔하기 때문에 쓰는 말일 것이다. 세상에 흔한 돌. 누군가의 발에 차여서 굴러다니는 돌. 한번씩 내가 전혀 특별하지도 않고 도리어 쓸모없다고 느낄 때가 있다. 종종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숨만 쉬면서, ‘아무것도 하기 싫어’를 인생의 목표로 다짐한 사람처럼 굴 때가 있다. 물론 내가 그런 기분에 얼마나 쉽게 빠져드는 사람인지 알고 난 이후부터는 늘 경계하고 온 몸에 털을 세우고 다닌다. 그래서 도리어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저 그런 사람이라는 말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는 말처럼 견디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어쩌면 그런 말에서 도망치고 있는지 모른다. 갑자기 그런 기분은 예고도 없이 나를 찾아온다. 아주 오래된 친구처럼. 중학교 때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에 빠져 지낸 적이 있다. 한동안 삶의 의미를 잘 몰라 중학생의 얼굴이라기에는 우울한 모습으로 지냈던 기억이 있다. 물론 막살 거 같았던 쇼펜하우어가 생을 아주 열심히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배신감을 느꼈지만.
인생에 우울한 순간들은 참으로 많았던 것 같다. 터널을 지나는 시간이었다고 해야 할까. 이곳으로 지나면 빛이 있을 거지만 지나는 동안은 어둡다.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지 못한다고 포기했을 때, 엄마의 병을 알게 되었을 때, 어린아이를 둔 엄마로서의 나와 엄마의 병간호 사이에서 고민하는 스스로에게 좌절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기억은 불쑥불쑥 찾아온다. 이제는 다 털어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내의 삶 속에서 아직도 침잠되어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무얼까.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기억력의 문제이지 시간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레오 리오니의 <바닷가에는 돌들이 가득>은 “바닷가에는 돌들이 참 많아요”로 시작한다. 이어지는 말 “어디에서나 보는 평범한 돌들이 많지만 재미있고 신기한 돌이 많아요.” 그는 바닷가에서 만나는 많은 돌들에도 각기 다른 얼굴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많은 얼굴과 표정들이, 비슷한 동물들이 각각 새로운 이름을 얻는다. 바닷가이지만 흔하게 쓰는 파란색 대신 흑백의 색채로 돌들은 극사실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작가가 바닷가에서 가만히 돌들을 뚫어져라 보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조용히 보면서 그 얼굴을 떠올리고, 그들의 움직임을 기억해보는 모습을. 그림책에 등장하는 돌들은 다양하다. 정말 이런 돌들이 있나 싶을 만큼 많아서 나도 모르게 지난여름 바닷가를 기억해본다.
“바닷가에서 재미있는 돌들을 더 찾아볼까요?”라는 말에 따라 페이지를 넘기면 그 뒤부터는 모두 돌들이다. 설마 이런 돌이 하더라도 어쩌면 바다에서 한 번쯤은 만나볼 수 있는 모습도 있다. 오로지 돌만으로 그려진 그림책. 이 그림책은 한참을 보고 있으면 나도 돌이 된 것처럼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돌들 속에 포함된 것 같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이 될 거냐고 물었다.
친구들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사람 중에서는 특히 남자가 많았다. 꽃으로 태어나거나, 새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 닭은 절대 싫다고 했다. 나는 무어라고 답했을까? 나는 나무나 돌은 싫다고 했던 것 같다. 나무도 돌도 저 스스로는 움직이지 못하니 말이다. 자유롭게 움직이면 좋겠다는 열망이 가득할 때이니 붙박이 인생처럼 보이는 것들은 아마 무력하다고 봤을 것이다. 그런 돌들이 책의 모든 페이지를 채운 이 그림책을 아무 생각 없이 읽는다, 특히 우울하거나 기분이 이상하게 가라앉는 날 이 책을 펼친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진 돌들을 하나하나 새겨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얼마나 큰가. 내가 쓸모없는 존재라고 느끼는 것은 나의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보다 쉬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나도 간혹 그런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냥 맥없이 힘없이 손에 쥔것들을, 들고 있는 것들을 놓으면 된다. 인생의 결론이 죽음이니 다 부질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쇼펜하우어에 빠졌던 나의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삶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이 인생임을 되새긴다. 비관론에서 회의론으로 노선을 변경했다, 그림책 속의 돌들을 보며 이제는 한 가지를 더 깨닫는다. 돌들의 모양이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세찬 바닷바람과 날마다 밀려오는 파도를 견디고, 시간을 지나오면서 만들어진 것을 알았다. 돌은 그냥 무력하게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삶이 우울하거나 기쁘거나 지나치게 에너지가 넘치거나 모두 그냥 시간만 보낸 것이 아니듯. 돌은 어쩌면 자신의 모습으로 견디는 방법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더 오랜 시간이 지나면 한 줌의 모래로 자신을 흩뿌릴 수 있는 지혜를 아는지도. 그것이 자기 삶의 결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림책을 보고 글을 쓰는 동안 회색빛 구름처럼 나를 감싸던 기분을 창에 비쳐 들어오는 햇살에 사라지고 있다. 때때로 나는 어떤 유혹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다 그만두고 싶다는. 쓸데없다는. 그런 기분이 들면 다시 이 책을 펴서 돌의 얼굴들을 새겨볼 것이다. 그리고 돌들이 얼굴을 만들어낸 그 긴 시간을 음미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