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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진 Yejin Lee Jul 02. 2024

육아맘, 다시 WHO로

육아를 하고 다시 직장에 돌아가니 달라 보이는 것들

오랜만에 다시 글을 쓴다. 이유는 올해 5월부터 출산 전까지 다니던 직장이었던 WHO에 복귀하게 되어, 지난 몇 달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내느라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거의 없었다.


작년 9월, 회사의 유급 출산휴가가 끝나고 펀딩 문제로 계약이 늦어져서 일은 잠시 쉬었었다. 대신 박사 과정을 시작했었다. 그런데 올해 3월, 회사 매니저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펀딩을 드디어 확정했고 계약서도 준비되었다고 말이다. 그렇게 WHO의 템포러리 P3 자리 오퍼가 왔다. 단기 계약이긴 하지만, 그래도 출산 전 일했던 P2 자리에서 한 직급 높은 P3 자리로 승진이 되었다. 국제기구에서는 연차가 쌓여도 승진은 쉽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더 감사한 일이었다.


또 감사한 건 육아를 하고 다시 직장에 돌아가니 달라 보이는 것들이 꽤 많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회사에 출근해 동료들을 만나고 회의에 참석하니 예전에는 따분하고 재미없다고 느꼈던 것들이 생각보다 즐거웠다. 일을 시작하니 그동안 박사공부와 육아로 정체된 것 같던 나의 삶에도 활기가 다시 찾아온 기분이었다. 여전히 국제기구가 돌아가는 방식은 답답하고 비효율적이지만, 육아를 하다가 회사에 복귀하니 내겐 여유와 이해심이 생겼고, 그전에는 보지 못했던 직장생활의 장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로 살아갈 때는, 누구보다 열심히 육아에 매달려도 경제적인 보상이 주어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직장은 내가 조금만 일해주어도, 매달 나의 통장에 월급을 넣어준다. 내가 일해서 번 돈으로 맛있는 걸 사 먹고 아이에게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다는 사실도 좋았다.


무엇보다 육아는 365일 아이가 아플 때는 24시간 나의 에너지와 시간을 들여야 하는데, 직장에는 정해진 출퇴근 시간이 있다. 특히 제네바의 국제기구 특성상, 한국처럼 야근을 해야 하는 경우는 많지 않고 오전 9시부터 일을 하면 적어도 오후 6시 이후까지 계속 일을 해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곧 회의감과 매너리즘에 다시 빠질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냥 오늘 하루 해치우는 작은 일거리들이 주는 성취감과 만족감이 좋았다.  


작년 출산휴가를 떠나기 직전, 번아웃으로 인해 회사의 크고 작은 일거리들이 모두 싫증 났던 나를 생각하면 놀라운 변화였다. 물론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의 시작부터 끝까지 WHO에서 코로나 백신과 관련된 업무를 맡게 되면서, 정말 바쁘고 힘들게 일을 했었고 결국 번아웃이 찾아왔던 거지만. 출산과 육아를 거치며 일 년 남짓한 시간 동안 일과 전혀 상관없이 살았던 시간이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혹은 육아라는 더 힘든 과제를 하다 보니 다른 문제들에 대한 회복력 (resilience)이 생긴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6개월의 출산휴가 이후, 작년 9월부터는 일을 쉬고 박사과정을 시작하면서 내가 하고 싶던 공부와 연구를 하게 된다는 큰 기대감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었다. 박사과정은 육아와 같은 장거리 마라톤 같았고, 단시간 과목할만한 가시적 성과를 기대하기 힘든 것 같았다. 물론 하루에 페이퍼를 몇 개 더 보고, 책을 몇 권 더 보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 발전이 있는 듯 보이지만, 큰 성취감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에 다시 회사에 복귀하고 일을 하는 게 더 좋았다.


어쨌든 '나'라는 사람이 좀 바뀐 것 같다. 사고방식도 예전과는 조금 달라진 것 같고 나의 삶의 우선순위도 많이 달라졌다. 아이가 없을 때는, 결혼을 했더라도 커리어는 내 삶의 우선순위에서 너무나 중요했다. 일에 많은 의미를 두고 찾았고, 직장에서 특히 국제기구에서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실망했고. 내가 열심히 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은 따라와 주지 못하는 것에 답답함을 느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간혹 가정 혹은 아이를 핑계로 미팅을 불참하거나 일찍 퇴근하며 일을 안 하는 동료들을 보면서 아이 없는 싱글들만 일을 더 많이 한다고 다른 싱글 혹은 아이가 없는 동료들과 불평을 하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아이가 생기고 나니, 나도 바뀌어 갔다. 아이라는 소중한 존재가 생기고 나니, 직장에서 얻는 기쁨이나 성취감이 조금 줄어들더라도 집에서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주는 새로운 기쁨이 생겨서 괜찮았다. 이 생각이 계속될지 혹은 또다시 바뀌게 될지 모르겠지만, 현재 시점의 나는 분명 아이가 주는 기쁨과 행복이 너무 크게 느껴진다. 나의 삶에 전반적인 행복감이 아이로 인해 높아져서인지, 다른 것에서 찾아야 할 재미와 의미의 기준이 예전에 비해 낮아진 것 같다. 그래서 예전보다 일에서 재미와 의미를 찾는 게 더 쉬워진게 아닐까.


한편으로는 생각하는 것도 좀 단순해졌다, 생각할 시간이나 에너지가 없어서. 아침 6시면 기상하는 우리 아기와 놀아주고, 아침을 먹이고, 크레시에 데려다주고 나서 출근을 하고 나면 이미 조금 지쳐있다. 그래서 직장에서 동료들과의 관계도 그렇고 일도 그렇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기계적으로 해치워 나가게 된다. 누군가 답장이 늦거나 일을 안 하면 예전처럼 답답해하는 게 아니라, 그냥 무슨 말 못 할 사정이 있겠지 혹은 다른 일로 바쁘겠지 생각하며 조금 더 시간을 두고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일은 다 처리가 되어있고 해결 안 되는 건 거의 없었다.

물론 나는 지금 직장생활을 하며 아기와 떨어져 있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퇴근하고 아기와 다시 만나서 함께 하는 시간이 더 즐겁고 행복할 수도 있다는 건 사실이다. 하루종일 붙어있던 첫 몇 개월을 생각하면, 너무 좋았지만 또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지금 워킹맘으로 살면서, 매일 아침저녁에는 아기와 시간을 보내고, 출근해서는 매일 처리할 일들에 집중하는 게 좋다. 내가 참석할 미팅과 작성할 보고서 그리고 작업할 데이터가 있는 게 감사하다. 구체적으로 행동에 옮기고 끝내버린 일들이 있다는 게 예전에는 좋은지 몰랐는데, 이제는 이게 참 감사한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육아와 박사 공부를 해보고 다시 회사에 돌아가니, 일이 주는 성취감은 크고 빠르고 확실하다는 것을 처음 느끼게 되었다.


정말로 육아는 나로 더 나은 사람이, 혹은 진짜 어른이 되어가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한 여자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살아내는 인생의 무게가 가볍진 않지만, 나를 사랑해 주는 가족이라는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이런 도전과 어려움들을 같이 헤쳐나간다는 사실에 큰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모나고 부족한 나의 모습들이 육아, 공부, 직장생활을 통해 앞으로 조금씩 더 나아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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