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는 말을 해볼 수도 있었지만

결국 하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

by Peace

대학교 4학년을 마친 뒤, 졸업을 한 학기 유예하고 본가에 돌아와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그 당시 내가 가진 최대의 고민은 진로였는데, 따뜻한 방에서 부모님의 지원을 받으며 하루에 한두 시간 노트북만 두들겨도 존중과 용서를 받던 시기였으니, 그 또한 다시 돌아오지 않을 황금 같은 시기이기는 하다. 다만 내가 되짚고자 하는 때는 그보다는 뒤쯤이다.

같은 해 여름, 나는 추가 유예 없이 졸업을 했다. 졸업식이 한창이던 캠퍼스에서 인턴 서류 합격 안내를 받았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서둘러 정장을 구해 면접을 준비했고, 초심자의 행운과 순수한 패기 덕분에 단번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합격 후 확인해 보니 근무지가 C시였다. 나는 A시 출신이고 B시에서 대학을 다녔으니 C시와는 아무런 연이 없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타지 생활을 이미 몇 년 경험한 나에게 C시로의 이동은 새롭고 즐거운 여정이 될 터였다. 인턴 합격 소식을 확인하고는 가장 먼저 엄마에게 알렸다.
“엄마, 나 합격했어. 그런데 근무지가 C시라서 자취를 해야 해.”
엄마는 내가 어디에서 일하든 상관없다며, C시에 방을 알아보러 가자며 함박웃음으로 나를 축하해 주셨다.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독립하기엔 아직 멀었던 나는 부모님의 도움으로 투룸 빌라에 방을 얻어 타지 생활을 결정했다.


고대하던 C시로의 이사 날, 나와 엄마는 간소한 짐을 추려 C시로 출발했다. 엄마가 운전하는 SUV에 타서는 에어팟을 끼고 따로 노래를 들으며 갔다. 그때는 가족과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따로 노래를 듣는 것이 어색한 행동이라는 걸 몰랐다. 나는 가끔 그렇게 사춘기 청소년 같은 행동을 할 때가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였는지, 엄마아빠와는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민망하고 불편해졌었다. 부모님은 내가 유치원에 다니던 때부터 맞벌이를 하셨고, 기질적으로 여리고 습관적으로 공상에 빠지던 내게 친구가 되어 준 것이 노래였다. 게다가 내가 겪는 성장통과 일상적인 감정을 사사로이 나누기엔 부모님은 너무 바빴다. 엄마아빠는 매일 아침 나보다 일찍 출근해 저녁 9시가 넘어야 귀가했다. 그들이 운영하던 작은 가게는 점차 큰 가게가 되어 가고 있었으므로, 말하자면 그들은 생계를 위한 치열하고 기분 좋은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매일 밤 엄마아빠와 만나는 짧은 순간에는, 어린 나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과 감정을 섬세하게 나눌 여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부모님과 함께 있어도 혼자만의 작은 공간을 꼭 확보하는 사람이 되었다. 동시에 나에게 ‘엄마의 차’라는 것은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워서, 나는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영원히 탈 수 있을 줄 알았다.

짧지 않은 여정 끝에 C시에 도착한 우리는 간소한 이삿짐을 풀고 입주 절차를 마쳤다. 그런데 C시에서 B시까지 당일에 돌아가긴 무리였기에, 엄마는 그 방에서 나와 하루 함께 자고 돌아가기로 했다. 방에는 이전 세입자가 두고 간 퀸사이즈 침대가 하나 있어 두 명이 자기에 넉넉한 공간이 되었다. 그런데 좁은 방에서 엄마와 함께 자야 한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답답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도 엄마 옆이 아니면 밤중에 꼭 깨곤 했는데, 이십 대가 되어서 엄마와 한 침대에서 딱 하루 같이 자려는데 뭐가 그렇게 답답하던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날 밤, 오랜만에 누군가와 한 침대에서 자려니 역시나 잠자리가 불편했다. 반대쪽으로 돌아누운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내일은 꼭 엄마가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나보다 10센티 정도 작았는데도, 그 침대에서 엄마가 차지하는 공간이 아주 크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는 내가 꽤 성장해서 엄마 아빠가 없는 방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인턴 첫 출근을 한 주에, 엄마는 친구들과 떠난 해외여행지에서 급작스러운 건강 악화로 돌아가셨다. 거짓말 같은 일이었지만 인생에는 가끔 그런 거짓말 같은 슬픔이 닥치곤 한다. 그렇게 C시에서의 첫 밤은 별다른 준비도 없이 엄마와의 마지막 밤이 되었다. 엄마가 떠나고 일상의 많은 면이 바뀌었고 그중 대부분은 복구할 수 없게 되어 나와 아빠의 마음에 깊은 황무지를 남겼다. 가장 힘든 시간은 밤이다. 엄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고 안심한 채 푹 자고 있던 밤. 누구든 가족에게 큰일이 생겼다고 급하게 연락해 올지 모르는 무서운 밤.

내 짧은 생 가운데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싶은 사무치는 순간은 엄마와 싸운 숱한 순간도, 함께 C시로 이동하면서도 따로 노래를 들었던 때도 아니고, C시의 작은 자취방에서 엄마와 함께한 마지막 밤이다. 돌아누운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나는 어느새 나보다 작아진 잠든 엄마를 뒤에서 안아줬을 수도 있고, 엄마에게 다음 날 바로 일하러 가지 말고 하루이틀을 함께 지내자고 했을 수도 있고, 그저 이불을 덮어줬을 수도 있다. 아니면 친구들과의 해외여행을 떠나지 말라는 말을 했을 수도 있다. 엄마의 몸이 점점 약해지고 있으니 이제는 일을 쉬는 게 어떠냐는 말을 했을 수도 있다.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는 게 어떠냐고 했을 수도 있겠다. 그것도 아니면, 아주 어린 시절이 아니면 해본 적 없는 사랑한다는 말을 괜히 해봤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위에 언급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을 거라는 걸. ‘만약에’의 지옥에 빠지면 지나온 선택지만이 아니라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삶도 지옥이 된다. 나는 부모에게 사소한 애정 표현을 하기엔 방패가 두꺼운 어른으로 자라 버렸다. 그러나 동시에, 부모와의 순간이 너무 당연한 찰나와 같다는 것은 아직 모르는 어린아이였다. 한동안은 엄마에게 무심했던 스스로의 행동을 항변하고 싶은 방어적인 마음과, 돌이킬 수 없는 쓰레기짓을 하고 말았다는 죄책감을 오갔다.
‘그때의 나는 이미 엄마와 심리적 골이 깊었어. 엄마와 친밀하게 지냈으면 그랬겠어? 아니, 나는 엄마가 나를 위해 그 모든 걸 해줬는데도 엄마가 빨리 돌아가기만을 바랐어. 그게 엄마의 마지막 모습인 줄도 모르고.’
나를 감쌌다가 욕했다가를 반복하며 나를 상처 입히는 짓. 그렇게 내 마음을 긁어서 더 큰 상처를 남기면, 현실의 불안에서는 다소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나를 아프게 해야만 아픔을 덜어내는 아이러니다.


엄마를 보내고는 많은 날을 애도의 슬픔, 존재의 의미, 삶의 허무와 싸우며 지내고 있으나, 그중 가장 잔혹한 진실은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혼비백산 중에도 살아 있는 사람은 매일의 일을 해치워야 했으므로 애도는 분주하고 형식적으로 해치워졌다. 우리가 이것을 별일 아닌 양 굴면, 우리가 느껴야 할 슬픔이 줄어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일상의 일에 매진했다. 그러나 그 정도 크기의 비극이란 표면만 다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자유롭고 독립적이던 나는 조심스럽고 걱정 많은 성격으로 변했다. 일상 속 작은 판단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부를 것이라는 왜곡된 사고는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

나는 아직 터널을 지나고 있고, 어쩌면 마음속에 영원히 벽돌을 얹어 두고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6년이 흐른 지금은, 내 감정의 곁가지만을 에둘러 더듬거리는 대신 불안의 가장 깊은 곳에 손을 뻗어 그것으로 글을 쓸 정도로 일상의 채도를 되찾았으니, 이 성취와 안심으로 오늘 밤은 무사히 넘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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