틴트와 선크림

현아에게

by Peace

0. 2008년 봄

단발머리와 교복이 어색했던 우리의 큰 기쁨은 하교 후 시내로 놀러 나가는 일정이었지. 지금보다 더 선머슴 같았던 나와 달리 언니가 있는 너에겐 뭐든 능숙해 보였어. 매 순간 붙어 다니며 생각도, 행동도 한 명처럼 함께 했던 우린 머지않아 비슷한 파우치를 갖게 됐지. 우리 또래라면 다 아는 틴트와 선크림. 교복 재킷 주머니에 보관하기 위해 똑같이 부러뜨린 꼬리빗. 어떤 것에도 권태롭지 않았던 그때의 우린 매일의 새로움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매 순간 정직하게 설렜지. 나는 너한테 틴트라는 단어를 처음 배웠어.


1. 2012년 겨울

모든 것을 함께한 우리지만 우린 우리 생각보다 달랐던 것 같아. 너는 나보다 예리하니까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람을 골라 사귈 이유가 없었던, 그 시절 우리에겐 사소한 차이란 오히려 즐거움이 되었어. 우리는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서로의 모든 걸 배우고 받아들였어. 네가 한 말, 내가 산 것. 그걸 충실히 배우는 게 우리의 유일한 과업이었지.

내가 독서실 화장실에서 울 때 그 오랜 시간을 떠나지 않고 문 밖에서 기다려주던 너. 내가 다른 친구들과 급식을 먹고, 네가 다른 친구들과 노래방에 갈 때마다 묘하게 엇갈리던 시선. 그런 이상한 기운 같은 것을 너는 지나치지 않고 꼭 먼저 손을 내밀었어. 우리 사이의 그런 생채기는 매점 빵 하나로도 표면이 다져지는 그런 것이었던 것 같아.


2. 2021년 가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의 다름은 실체 있는 것이 되었어. 투박하지만 여린 나, 섬세하고 고지식한 너. 성인이 되자 우리는 각자 더 견고한 개체가 되어갔지. 우리에게 서로가 아닌 다른 사랑하는 것들이 생기면서 말이야. 나는 네가 왜 그렇게 방어적이고 수동적인지 이해할 수 없었고, 너는 내가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에 화를 냈지. 우정이란 이름으로 서로를 통제하던 잔소리는 기어이 마음을 긁기 시작했어. 보내는 시간, 만나는 사람이 달라지면서 서로를 용인할 수 있는 품도 줄어든 거지.

그러다가 싫은 소리가 다시 한번 더 반복되면 우리는 서로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일을 멈출 것 같은 때가 왔어. 답장하지 않기가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요즘 우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알겠지.

그러다 머지않아 너에게 '그 메시지'를 받았어. 충격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야. 그런데도 한편으로는 올 게 왔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어. 너는 충동적인 말이었다며, 대화를 하자며 찾아오겠다 했지만 나는 그 모든게 무의미해졌다고생각했어. 우리는 선을 넘은 거야. 누가 먼저 넘는지 기다렸을 뿐.


3. 2025년 가을

모든 이별은 종국에는 미화되는 것 같아. 일만 하며 살다 보니 삶이 건조해졌다 느낀 건지, 갈등으로 머리가 어지러울 때에는 중요하지도 않던 어린 시절 추억이 다 떠올랐어. 주변에 근황을 물어도 보고, 서로 정리하지도 못한 인스타그램 계정에 들어가 보기도 했어. 우리가 왜 멀어진 건지 모르겠는 날도 있더라.

친구라서 가능했던 많은 간섭과 용서의 순간들. 실수하더라도 다음날이면 함께 급식을 먹을 당연한 사이라는 안정감. 그렇게 관계가 옅더라도 실선이었던 시절을 지나, 점선으로 점선으로... 단단했던 관계에 균열이 생기고 그 틈으로 신뢰가 빠져나가고 시간이 빠져나갔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서로 모르는 사람이 되어갈 때, 분명히 서로를 상처 입혔으나 누구 하나 먼저 얘기하지 않던 순간들이 있었어. 서로에게 무심했고, 서로보다 다른 사랑이 먼저가 되고, 같은 날 입학하고 졸업했지만 결코 함께 목표를 이루지는 못한 탓에, 서로의 마음에 천천히 먼지가 쌓여가는 걸 보고도 못 본 척 한 순간들이.

나는 너에게 상처받았을 뿐인 그런 무결한 피해자로 남고 싶었던 겁쟁이야. 어느샌가 망가진 관계로부터 수동적으로, 고상하게 도망치고 싶었나 봐. 그래도, 그 많은 생각 끝에, 결국 나는 늘 같은 결론으로 돌아와. 몇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너를 만나기엔, 너한테 묻어둔 내 부끄러운 모습이 너무 많더라고. 그런 이유로 나는 너를 그냥 지나치기로 결정한 것 같아.


4. 2020년 여름

네가 운전 연수를 받은 직후에 차를 렌트해 나를 데리러 왔을 때. 오밤중에 가까운 바다를 보러 가자고 전화해 온 순간. 집 앞 카페에서 함께 자격증 공부를 했던 걱정 없는 시간. 아무 날도 아닌데 서로에게 꽃을 선물했던 저녁. 그리고 네가 우리 엄마 장례식에 한달음에 달려와 오랜 시간 묵묵히 자리를 함께했던 날. 우정과 사랑이 크게 다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던 순간들.


5. 2026년 봄

틴트와 선크림 같은 것은 이제 내게 특별한 것이 아니고, 십 대와 이십 대를 지나 삼십 대가 된 우리가 앞으로도 예전처럼 설렘을 느끼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하며 살아야 할 거야. 너의 삶을 이룰 희로애락들, 그 많은 성취와 절망의 지난한 순간들. 나는 너의 그런 순간마다 함께할 거라 믿었지만 결국 이렇게 되었어. 우린 이제 서로의 미래에서 지워졌지만 이걸 우리가 함께한 마지막 공부라고 여기자.

내가 빠져나간 자리를 너를 실망시키지 않을 사람들로 가득 채우길 바랄게. 살다가 가끔 나를 떠올리더라도 네게 상처 준 기억은 잊고, 중학생 시절 철없는 단발머리 친구로만 기억해 줘. 너에게 축하할 일이 생기고 내가 축사를 하게 된다면 하고 싶었던 말들은 이미 걸러졌어. 서로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을지 우린 이미 알고 있을테니 보내지 못할 편지는 이만 줄일게.

결혼 축하해, 현아야. 행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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