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장사 김 씨의 우아한 인생

by Peace

힘과 돈은 얼핏 같아 보이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 돈으로는 얼마든지 힘을 구할 수 있지만, 힘만으로는 돈을 벌 수 없다는 데에 그 차이가 있다. 남아도는 체력만으로는 빈 잔고를 어찌할 수 없다. 돈을 효율적으로 벌기 위해 필요한 것은 체력이 아닌 지력(智力)이다. 경제관념을 갖추기 위해서는 양질의 금융 지식이, 고등 교육을 받을 여유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여유야말로 돈이 없으면 갖출 수 없는 것이다.


농업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래로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쉼 없이 일을 해 온 김 씨가 있다. 김 씨는 타고난 장사로, 한 달에 하루를 쉬는 자영업을 오랜 세월 잔병 없이 이끌어 온 위인이다. 체력 못지않은 외향적인 성정을 활용해 힘을 쏟는 만큼 돈이 벌렸으니 김 씨로서는 자영업이 천직이었다 할 수 있다. 김 씨 부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손님을 맞았고, 대목이면 돈을 쓸어 담은 봉투를 한가득 싣고 돌아왔다.


김 씨의 딸은 아버지의 체력을 물려받지 못한 대신 우아함을 갖출 수 있었다. 생계를 걱정할 일 없는 집에 태어난 것이 복이라는 것을 모를 수 있는 고상함. 김 씨의 딸은 휴일이면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잤다. 자고 일어나면 부모님이 현금을 한가득 들고 돌아올 시간이었다. 그것을 백만 원 단위로 분리해 놓는 것이 그녀의 임무. 아득해진 기억이지만 돈 봉투를 탈탈 털어 바닥에 오만 원짜리 지폐를 흩뜨려놓던 그 감각은 어쩐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다고, 김 씨의 딸은 회고했다.


그 무렵 김 씨의 딸은 학교에서 경제 과목을 배우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손, 수요와 공급. 수리 영역에서 약점을 보이던 터라 놀랍지도 않게 경제에서도 고전하던 차였다. 썼다 지우기를 반복해도 다른 세상 얘기 같은 경제 그래프는 손끝을 간질이던 현금의 감각과 이상하게 엇갈렸다. 지폐의 물성이 주는 확고함이 있었고 그것은 영원해 보였으므로 당장 이해하지 못하는 경제 그래프야 아무래도 괜찮았다.


경제 성적이 다른 과목에 비해 낮은 것에 대해 토로하는 딸에게 김 씨는 이런 위로를 건넸다. 너는 다른 과목에서 만점을 받잖아. 어차피 아빠가 가진 것 다 너한테 물려줄 텐데. 너는 그 시간에 네가 좋아하는 걸 하면 되지. ‘아빠가 가진 것 다 너한테 물려줄 텐데’. 실패해도 괜찮다는 안도감. 그것은 2차원 종잇장에 머무는 경제 그래프보다 훨씬 더 실체 없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김 씨의 딸은 쉽게, 오랫동안 그 말에 기대어 살 수 있었다. 성인이 되어 친구들이 하나둘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때에도 김 씨의 딸은, 부모님의 신용카드를 이용해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시험공부를 할 수 있었으므로 김 씨의 말에도 근거는 있었다.


잠 한숨 안 자도 종일 일할 수 있는 체력의 김 씨와 달리, 지병이 있는 김 씨의 아내에게는 하루가 천 근 같았다. 김 씨의 아내는 벌어들인 돈을 활용해 실질적으로 가계를 운영했으며, 많은 순간 김 씨 대신 불안해했다. 딸이 성인이 될 즈음 김 씨의 아내는 매일 약의 힘으로 버티는 지경이 되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무렵 가게는 가장 번창했다. 이후의 모든 문제는 김 씨의 아내가 세상을 떠난 것을 기점으로 시작됐다.


모든 것이 그렇게 빨리 내려앉을 수도 있다니, 정말 기묘한 일이라고 김 씨의 딸은 생각했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돈 문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코로나19로 인한 국가 경제 악화가 시작이었다. 줄지어 방문하던 손님은 지갑을 닫았고, 김 씨 부부가 대출을 끼고 매입한 상가는 귀신의 집보다 음산한 공실의 행렬이었다. 그러나 경제 악화가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었다고, 김 씨의 딸은 생각했다. 문제는 어떤 필수적인 감각의 부재였다고, 알아야 할 것을 모르기로 결심한 느긋함이 결국은 화를 불러왔다고.


김 씨의 아내가 떠나고, 그들의 주 수입원이었던 가게 운영이 명의 이전 문제로 막혀버린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고인, 명의, 배우자, 법적 상속자, 구청, 시청. 남겨진 부녀의 트라우마를 시시각각 자극하는 단어가 가득한, 독촉장으로 추정되는 무엇인가가 자주 날아들었다. 그것들은 차마 개봉되지 못한 채 무겁게 쌓였다. 김 씨는 문맹이 된 기분으로 각종 청구서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내가 무엇을 지고 살았는지 알게 된 즈음에 아내가 곁에 없다는 것이 그를 가장 힘들게 했다.

김 씨의 상황이 부당하게 흘러간다는 데에는 김 씨의 딸에게도 이견이 없었다. 김 씨는 편법을 모르는 사람이자 잘 베푸는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입장에서는 더욱 억울할 것이었다. 그와 별개로 김 씨의 딸은 처음으로 생존의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딛고 선 지반은 더 이상 단단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선한 심성은 그의 경제적 상황과 관련 있어 보이지 않았다. 나이 든 아버지가 어떤 면에서든 자신보다 느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스스로의 느긋함에 마음이 애끓었다.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무렵, 김 씨는 소송 한 건에 매달리고 있었다.


아빠, 소송한다고 했던 거 있잖아. 비용 많이 나오는 거 아니야?

괜찮아.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어. 가게는 지켜야지.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변호사 고용이라는 게, 패소하면 수임료 일부는 날아가는 거 아니야? 승산이 있어서 거금을 주고 고용하는 거 맞지?

그럼. 돈 날리는 거 아니야. 다 방법이 있대. 아빠 걱정하지 마. 다 너한테 물려줘야지.


실로 결연한 도전이었으나 김 씨의 딸은 이제는 아버지가 이길 판에만 돈을 걸어야 하는 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 씨에게는 천만 원 단위의 수임료가 한 달 벌이 정도로 쉽게 느껴졌다. 길어야 몇 달 몸 갈아 일하면 벌릴 돈이라면 걸어봄직 했다.

비록 아내가 생전에 돈 관리를 전담했다 한들, 선봉장으로서 전장을 지휘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돈이 돈을 벌고 있었고, 김 씨는 그 모호한 우상향의 감각을 믿고 있었다. 실패에 대비할 필요 없었던 희망적이고 우아한 삶.

그러나 이미 김 씨의 잔고에는 여유가 없었고, 비슷한 문제를 겪어본 적 없는 그는 반격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김 씨가 남은 돈을 쏟아부어 매진한 소송은 반전 없이 패소로 종결되었다. 그리고 부녀는 아주 오랫동안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던 문제인 생계의 문제를 앞두고 있었다.


허둥지둥, 전전긍긍. 김 씨는 아내를 닮아가는 딸을 보며 죄책감과 무력감을 느꼈다. 한 줄기 자존심으로, 어려워진 형편이지만 딸의 대학원 학비를 대겠다는 무의미한 고집도 부려 본다. 김 씨의 딸은 그런 아버지를 보며 금융 문맹이라는 말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던가 생각하면서도, 딸을 위하는 마음만은 퇴색되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상태가 된다. 나를 느긋한 사람으로 키운 것은 아빠의 돈이었는가, 아니면 무한한 사랑과 지지였는가. 아마도 후자였겠지만 사랑도 돈이 없으면 지속될 수 없음을, 딸은 모르지 않았다.

김 씨는 여전히 좋은 체력을 자랑한다. 60대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지만 체력은 여전하다. 일을 쉬게 된 김 씨는 남는 체력을 어찌할 수 없어 동네를 활보한다. 가끔은 상가 외벽에 붙은 임대 현수막에 내 일처럼 마음 아파한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딸에게 독서 인증 사진을 보내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발산할 곳을 간절히 원하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도무지 알지 못하는 채로. 다음 날이면 다시 옷을 갖춰 입는다. 힘을 다하는 그날까지 걷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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