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의서점 Jun 05. 2017

랩 걸, 한 사람의 일과 인생을 천천히 음미해본 독서

-뼛속까지 문과인 밤의 점장을 매료시킨 과학 에세이

 토요일 아침, 샌드위치가 든 비닐봉지를 흔들며 언덕길을 올랐다. 스트라이프 무늬가 시원한 흰 원피스를 입은 령님이 서점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작은 것들의 신> 북클럽에 이어 두 번째로 보는 얼굴이라 더욱 반가웠다. 이제 막 더위가 시작되려는 계절, 서점 셔터를 올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서늘한 공기가 확 끼쳐온다. 동굴 같은 밤의서점에 잘 오셨어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미래의 무게에 짓눌린 사립학교 남학생들이 숨어들던 그 동굴. 우리 서점이 그런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자주 이야기한다.(조금씩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고 믿고 있고.)

  필사 책상과 시집 서가 책상을 옮겨 자리를 만들고 차를 끓이는데, 폭풍의점장과 또 다른 참석자가 도착했다. 서로 간단한 소개를 마친 후, 샌드위치를 베어 물며 질문을 던진다. 

"책 어떻게 읽으셨어요?"

"아, 허를 찔렸어요. 과학자의 에세이를 읽다가 그렇게 대책 없이 두근거려버릴 줄은!"

"맞아 맞아, 빌!!"(책을 읽은 분들은 무슨 말인지 바로 알 것이다. 저자 호프 자런의 실험실 동료 빌은 우리가 그리는 완벽한 (이성) 동료이자 친구이자 소울메이트다.)

 

 우리는 겨우 흥분을 진정시키고, 이 책이 각자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 돌아가며 이야기한다. 그날 나온 이야기들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겠다.

 “전 IT 업계에서 일해서 책 속 상황에 많이 공감했어요. 여자들이 야무지게 일을 잘하는데도 ‘여자니까’ 잘 못할 거라는 편견이 은근 깔려 있거든요. 반면 남자들은 인정해주고 들어가요.”     


나는 너무 많은 일을 하려 한다는 말을 들었고, 내가 해낸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도 들었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고,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내가 한 일을 할 수 있었다는 말도 들었다.(...) 너무 여성적이라는 꾸지람을 들었는가 하면 너무 남성적이어서 못 믿겠다는 말도 들었다. 내가 너무 예민하다는 경고를 받은 적도 있고, 비정하고 무감각하다는 비난도 들었다. _본문 396쪽


 “저자가 과학자로서 첫 발견을 하는 대목, 너무 좋았어요. 처음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비슷한 걸 느꼈거든요. 아, 이제 난 평범한 사람으로 살 수 없겠구나.(웃음)”


이 가루가 오팔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무한대로 확장되고 있는 이 우주에 단 한 사람, 나뿐이었다. 상상할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는 이 넓고 넓은 세상에서 나, 작고 부족한 내가 특별한 존재가 된 것이다. (...) 바로 이 날을 위해 일하고 기다려왔다. 이 수수께끼를 해결함으로써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무언가를 증명했고, 마침내 진정한 연구가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됐다. 그러나 그 큰 만족감에도 그 순간은 인생에서 가장 외로운 순간으로 기억되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내가 좋은 과학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깨달은 동시에 지금까지 알던 여성들처럼 될 기회를 이제 공식적으로, 완전히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_본문 105-106쪽


 “우리 자매는 모든 걸 공유하고 서로를 이해해주는 사이예요. 이 관계가 영원히 계속되길 바라지만 그럴 수 없겠죠. 빌과 호프는 누가 봐도 완벽한 소울메이트인데 결혼은 클린트랑 하잖아요. 그 부분에서 정말 배신감을 느꼈달까. 어른의 관계란 무엇일까 생각도 하게 되고.”(알라딘 한줄평에도 “나중에라도 빌과 결혼하길 바란다”라는 리뷰가 있다:)


실험실에 내가 돌아온 것은 며칠이 지난 후였고, 그사이 빌은 나를 찾아 온 동네를 이 잡듯 뒤졌다. 그는 어색한 분위기를 무시하고 내게 “얼른 정신 차려! 출발해야 하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너덜너덜해진 조지아 주 미슐렝 지도책을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에 대학에서 빌린 밴의 열쇠를 들고 있었다. 나는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내가 수수께끼처럼 사라져 버린 사이 빌은 미친 듯 떠들었던 내 의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밴을 예약하고 장비를 챙긴 것이다. 나는 살짝 미소 지었다. 다시 시작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 이번에는 더 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 고마웠다. _본문 216-217쪽


나는 빌의 충고를 받아들여 의사를 보러 갔다. 나에게 맞는 약을 받아서 건강하게 먹고, 규칙적으로 잠을 잘 수 있었고, 더 튼튼해졌다. 빌은 담배를 끊었다. 우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문을 두드리는 것도 멈추지 않았고, 언젠가는 그 문들이 열리기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사랑과 공부는 한순간도 절대 낭비가 아니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_본문 251쪽


 “식물학자는 주목받지 못하는 직업이잖아요. 초반에 연구 예산 따려고 미친 듯이 일하고 시달릴 때,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어도 현실은 고단할 수밖에 없지 하며 진짜 공감했어요. 번역일이 경제적 보상이 적다 보니까 생활비 걱정하던 때도 있었는데, 저자도 같은 시기를 겪었다는 게 위로가 됐어요. 그러면서도 일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온 것도 멋있었고.”


언젠가 과학 분야의 교수를 만나면 연구 결과가 잘못될까 걱정이 되느냐고 물어보라. 연구가 불가능한 문제를 선택했거나 연구 과정에서 중요한 증거를 간과했을까 걱정이 되는지 물어보라. 지금도 여전히 찾고 있는 해답이 가지 않은 여러 길에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지 물어보라. 과학 분야의 교수에게 무엇이 가장 걱정인지 물어보라. 길게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는 당신을 빤히 바라보면서 한 마디로 답할 것이다. “돈이오.” _본문 179쪽


 이런 이야기들로 꽃을 피우다가 참석자 중 한 분이 <공기 도미노>를 쓴 소설가 최영건 씨라는 걸 알게 되었다. 자연스레 소설가로 데뷔하게 된 이야기, 철학 덕후(!)였던 어린 시절 경험도 나왔다. 각자의 상황과 경험이 책과 오버랩되면서 대화는 더 깊어갔다. 

 저자가 조울증을 겪는 대목, 그때 느낀 광기를 묘사한 부분은 어떤 소설보다 생생하게 다가왔다. 자기 삶의 일부는 받아들이고 일부는 싸워가면서 과학자로서, 한 아이의 엄마로서 성장하는 저자의 모습은 여성 독자들에게 분명 좋은 자극을 줄 것이다. 무엇보다 식물을 통해 인간을 바라보는 묘사는 정말 탁월하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런 대목들에 밑줄을 긋게 되겠지.


시간은 나, 내 나무에 대한 나의 눈, 그리고 내 나무가 자신을 보는 눈에 대한 나의 눈을 변화시켰다. 과학은 나에게 모든 것이 처음 추측하는 것보다 복잡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을 발견하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레시피라는 것을 가르쳐줬다. 과학은 또 한때 벌어졌거나 존재했지만 이제 존재하지 않는 모든 중요한 것을 주의 깊게 적어두는 것이야말로 망각에 대한 유일한 방어라는 것도 가르쳐줬다. _본문 49쪽     


눈 속에서 사는 식물들에게 겨울은 여행이다. 식물은 우리처럼 공간을 이동하면서 여행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식물은 장소를 이동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사건을 하나하나 경험하고 견뎌내면서 시간을 통한 여행을 한다. _본문 274쪽     


내 실험실은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죄책감이 내가 해내고 있는 일들로 대체되는 곳이다. 부모님께 전화하지 않은 것, 아직 납부하지 못한 신용카드 고지서, 씻지 않고 쌓아둔 접시들, 면도하지 않은 다리 같은 것들은 숭고한 발견을 위해 실험실에서 하는 작업들과 비교하면 사소하기 그지없는 일이 된다. _본문 35쪽      


되지 않을 일은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노력해도 되지 않고, 마찬가지로 어떤 일은 무슨 짓을 해도 잘못될 수가 없다. 나는 이 사실을 단박에 알아차린다. 그가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나도 안다. 내 일이 있고, 이루어야 할 목표가 있고, 돈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살고 싶지가 않다. 정말로 그렇게 살고 싶지가 않다. 우리는 계획을 세운다. 그는 자신의 강인함을 나와 나눌 것이고, 나는 내 상상력을 그와 나눌 것이다. 그리고 서로에게서 말도 안 되게 남아도는 것들을 요긴하게 쓸 용도를 찾을 것이다. _본문 293-294쪽


 이번 후기가 본문 인용으로 빼곡해지리라는 건 예감한 바였다. 뼛속까지 문과인 내게 과학의 즐거움을 가르쳐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아마 나는 내내 이 책을 서점에서 영업하게 되리라.^^ 사실 가장 백미인 두 장면은 독자들의 읽는 즐거움을 가로채지 않기 위해 건너뛰었다.(살짝 귀띔을 해주자면 어느 산에서 호프가 바라본 빌, 그리고 학회로 떠나는 자동차 여행이다.)


 "나의 일부만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법을 배우면서도, 나의 본질을 배반하지 않기 위한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길을 걸어온" 수많은 여성분들, 그리고 과학 분야 책은 어려워서 못 읽었던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구입은 밤의서점에서^^)  


by 밤의점장 

작가의 이전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