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의서점 Jun 26. 2017

답은 없다. 그래서 읽는다.  

<소송>에 대해 이야기한 카프카적 밤의 북클럽 후기

 비가 오고 있었다. 가랑비가 아니고 소나기였다. 우산이 없다. 주차장 입구까지만 가면 되는데, 그냥 뛰자. 그러나 달려 나가는 순간 사정없이 때리는 빗방울에 당황한다. 아이를 학교 앞에 내려주고 차 안에 앉아, 비옷 입고 자전거 타고 공원을 돌아볼까 진지하게 고민한다. 오늘 같은 날 사람들은 산책 나오지 않을 테고 예쁜 꽃들이 핀 공원을 나 혼자 누릴 수 있다. 자전거 말고 우산 정도로 타협을 해 볼까. 한 시간 정도 걸으면 운동화가 비에 젖을 텐데... 고민하는 사이 비가 거의 그쳤다. 산책은 무슨. 집에 가서 북클럽 후기나 써야지.

 허겁지겁 나가느라 어질러 놓은 주방에 버터 통이 사라졌다. 음식물 쓰레기통을 보니 역시나 버터는 녹아내리고 있다. 알면서도 묻는다. 아버님 여기 통 어디에 두셨어요. 아버님은 흠칫 놀라며 버렸다고 하신다. 물론, 바라보기 심난해서 그랬다는 이유도 덧붙인다. 익숙한 풍경이다. 전생에도 이랬을 것 같다. 한복을 입고 쪽을 진 내가 아버님 부엌에 털 뽑다 만 씨암탉 못 보셨어요 하고 물으면 아버님이 흠칫 놀라며 내가 심난해서 버렸다 하고 말씀하셨을 것 같다. 나는 이 삶에서 절대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억울한 기분이 든다.


“만약 둘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똥 맛 카레를 드실래요? 카레 맛 똥을 드실래요?”


 지난 토요일, 카프카의 <소송> 북클럽에서 J님은 물었다. 자신은 똥 맛 카레를 먹겠다고 했다. 나는 둘 다 어차피 망한 건데 카레 맛 똥을 먹으면 똥을 먹은 사람이 되니까 좀 더 멋진 거 아니냐고 했다. 그러나 그게 카레든 똥이든 모르니까 먹을 수 있는 거 아닐까. 인생은 단 한 번이니까 뭐든 모르고 먹는 것이다. 먹고 나서야 젠장 똥이네 이러는 것이다. 그런데 또 그때 깨닫게 된다. 이 맛이 익숙하다는 것을. 그제야 내가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이상한 세계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특별히 잘못한 일도 없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 삶으로 던져졌을까. 요제프 K가 특별히 잘못한 일도 없는 것 같은데 소송을 당하자마자 유죄가 되는 부조리한 상황에 던져진 것처럼 그 느낌이 비슷하다.


 K님은 자신이 여자로 태어난 것이 소송당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느낀다고 말했다. 가부장의 세계에서 여자로 태어나고 키워지고 살아가는 불합리함. 여자라면 다 공감하는 답답한 느낌이다. 나도 그 느낌을 너무나 알 것 같다. 하지만 K님은 책을 읽으면서 삶에 대해 이해하고 그 깨달음을 실천하려는 멋진 여자분이다. 여자로 태어나고 키워질지언정 호락호락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자로서의 태도로 살아갈 사람이 아니다. 이건 절대 밤의 서점에서 책 많이 사는 단골손님이라 멋지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밤의 서점의 단골손님들은 다 멋이 넘쳐흐른다.


 <소송>을 북클럽 책으로 정한 것은 순전히 나의 사심이었는데, 어릴 적 <심판>이라는 제목으로 읽었을 때 영 독해가 안 되었던 기억 때문이다. 주인공이나 줄거리를 외우면서 세계 명작이나 한국 소설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던 시절, 나도 카프카 읽어봤다고 하고 싶어서 읽었다. Y님은 말했다. 카프카를 알고는 있었지만 이번 기회에 제대로 읽어보았다고. (그러고 보면 Y님, 정말 성실히 책을 읽어오셨다. 뒤의 미완성 장들까지 말이다.) 나도 이 기회에 제대로 읽어보았다. 왜 내가 이 책을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가 돌아보면 순전히 결말 때문이었다. 결말에서 ‘일 년 동안 소송이 진행되면서 아무것도 깨달은 바 없는’ 요제프 K는 두 남자에게 이끌려 처형당한다. 죽으면서 요제프 K는 말한다.      


개 같군!


그리고 카프카는 이렇게 책을 맺는다.      


그가 죽은 후에도 치욕은 살아남을 것 같았다.    

 

 이런 엔딩이라니. 황당한 게 참을 수 없이 좋다. 카프카 말고는 이런 소설을 쓸 수 없다. 우리는 카프카스러움에 대해 이야기했고 나를 포함한 몇은 카프카에 대한 애정을 고백했다. 카프카 자신이 되지 않는 다음에야 <소송>의 뜻한 바를 알 수는 없다. 아니, 카프카 자신도 잘 알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더 잘 이해하는 방법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카프카와 <소송>을 함께 읽고 공동 지성을 발휘해 보고자 모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효과가 있었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C님은 카프카 소설은 텍스트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읽지 말고 텍스트가 열어가는 길을 따라서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의미의 불확정성을 전제하고 읽는 게 올바른 독법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밤의 점장의 요청에 맞춰 데리다의 카프카 독법을 간략히 이야기해 주었다.(그녀는 저번 북클럽에서 철학 덕후임을 밝힌 바 있다.) 나는 거의 철알못이지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데리다를 찾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아들을 수 있는(!) 철학적 글을 읽을 때 머리가 시원해짐을 느끼는데 이런 게 독서가 주는 쾌감의 한 종류인 것 같다. 데리다의 카프카 읽기를 찾아 읽으면 이런 쾌감을 느낄 수 있겠지 기대한다. 뇌의 주름을 간질이며 시원하게 청소해주는 그 느낌. 깜깜한 머릿속에 불을 하나씩 켜는 느낌.      

 

 독문학 전공자이자 카프카 좋아한다고 독자카드에 적어 넣은 J님은 나더러 말했다.

“폭풍의 점장님 그런 말투 너무 좋아요. 문학작품 내에서 이야기하지 않고 생활로 가져오는 말하는 방법이”

갑자기 칭찬받아 좋기는 하였지만 그 자리에서 답 한대로 사실 내가 <소송>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할 바가 없어서 그런 거다. 문학적으로 하나도 모르니까 생활에서 뭘 느꼈나 이런 거 물어보는 거지 (이 사람아...)의 심정이었다. 사실, 이번 북클럽을 준비하면서 미완성 장들 말고 본문만 두 번 읽었는데도 모르겠다. 소송을 가지고 이야기한 팟캐스트도 들어보고 연구자들의 글도 막 찾아봤다. 그러나 여전히 뭔 소린지 모르겠다. 하지만 모른다고 이야기를 못하는 것은 아니다. 뭘 모르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된다. 어쩌면 모르기에 더 재미나게 이야기할 수 있다. 정해진 의미를 찾지 말고 오해와 억측과 상상이 난무하는 아무말하는 자리, 카프카적인 북클럽이 되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소송>을 매개로 죄, 죄책감, 꿈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밤의 점장이 어린 시절 죄책감을 느낀 사건을 들려주었는데, 너무 재미나서 여기에다는 적지 않겠다. (북클럽에 참석하면 이런 얘기들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재밌어요:)


 자리를 마무리하면서, R님은 자신은 대학교 신입생이며 책을 많이 읽고 싶다고 이야기하여 우리의 부러움을 온몸에 받았다. K님은 R님에게 이제부터 책 많이 읽으면 정말 좋을 거라고 말했고 나는 책은 무슨 책 일단은 놀아야지요 라고 덕담했다. 또 너무 많이 읽고 알면 괴롭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건 정말로 농담이다.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좋다. 단조로워 보이는 삶에서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게 더 많다면 더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형태를 드러내는 삶의 허무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요제프 K는 고결하지도 않고 똑똑하지도 않고 그가 노력하면 할수록 상황은 더 꼬여간다. 그리고 매 순간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 결말은 정해져 있다. 그것은 '개 같은’ 치욕적인 죽음이다. 인생이 이런 것이라면 정말 암울하다. 책에 등장하는 인용담의 이야기처럼 우리에게는 각자 자신만을 위한 법의 문이 있는데, 우리는 평생 거기 들어갈 수가 없다면, 그리고 그런 것이 인생이라면? 각자의 인생을 살지만 인생은 해독할 수 없고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 앞에서 우리는 무력한가? 아니다. 우리는 인생의 불가해함을 조금이나마 알기 위해 책을 읽고 생각한다. 불가해함을 풀 답을 발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리고 견뎌나갈 수 있는 내면을 만들기 위해 말이다. 그러면 우리의 생이 똥 맛 카레든 카레 맛 똥이든 두려움 없이 먹어 볼 마음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두려움이 없다면 그것은 조금은 먹을 만할 것이다.


(By 폭풍의 점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