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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의서점 Jul 17. 2017

카뮈의 희곡 <오해>를 낭독하다

- 우리를 무장해제시킨 밤의북클럽

“학생 역을 해볼 사람 있습니까?”
 

 친구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귀밑에 땀이 촉촉이 배어나던 그해 여름, 나는 프랑스에서 연수를 받고 있었고, 연극반을 담당한 세바스티아노 선생님이 이오네스코의 <수업>(학생과 선생이 극을 이끌어가는 2인극이었다)을 자신과 함께 낭독할 사람이 있는지 물어본 참이었다. 클럽에 놀러가자는 제안만 받아도 얼굴이 빨개지곤 했던 내가 그때 어떻게 용기를 냈던 것일까.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리에 앉아 맡은 배역을 소리 내 읽는 것이 다였다. 그런데 낭독을 하자마자, 주위의 친구들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몰입의 순간이 시작되었다. 마치고 나서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었을 때는 키팅 선생님 앞에 선 에단 호크가 된 기분이었다.(<죽은 시인의 사회>의 숙맥, 에단 호크를 기억하시는지^^)
 그런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기에 언제든 마음 맞는 사람들과 모여 희곡을 낭독하는 시간을 열고 싶었다. 서점을 열고 북클럽 모임을 시작하고 나서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다. 밤의점장이 꿈꾸어온 한여름의 로망이었달까.


 카뮈의 <오해>는 90페이지 정도 되는 3막극으로 등장인물도 5인이 다다.
 마르타는 어릴 때 집을 나간 오빠를 대신해 어머니와 함께 여관을 운영한다. 우울한 하늘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 고향 마을에서. 그리고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부유한 투숙객을 약을 먹여 죽인 후 바다에 버린다. 오빠가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돌아왔지만 두 사람은 알아보지 못했고 계획은 평소처럼 실행된다.
 마르타 역을 P, 어머니 역을 J, 마리아 역을 폭풍의점장, 아들 얀 역을 밤의점장이 맡았다. 북클럽에 오기 전 P가 이 책을 읽고 나눈 후기에 밤의점장은 감동했다.(사람은 참 사소한 일에 감동한다.)


 밤처럼 어두운 서점에서 우리는 한 시간 반 동안 작품 전체를 낭독했다. 어머니 곁을 지켰으나 마지막 순간에도 오빠에게 어머니의 사랑을 빼앗기는 마르타는 굉장히 긴 독백 씬을 소화해야 했다. P가 감정을 완벽하게 잡아서 같이 낭독한 우리까지 극에 훅 들어갈 수 있었다. J 역시 인생의 피로감에 지쳐 휴식만을 갈구하는 어머니를 차분하게 연기했다. 폭풍의점장의 여성스러운 마리아, 밤의점장의 남자 목소리도 어색하지 않게 녹아들어갔다.  
 

 희곡을 많이 읽어보지 않았지만 각자 배역을 맡아 낭독할 때의 느낌은 눈으로 읽을 때와 상당히 다르다. 왜 그런 것일까. 나는 평소에 감정을 터트리는 편이 아니다. 누군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들어주는 쪽이다.(점장이 당신 앞에서 수다쟁이가 되었다면 그만큼 당신을 편안하게 느껴서일 것이다.) 그렇게 감정과 생각을 내면화하는 데 익숙해 있는 사람에게 희곡 낭독은 좀 특별한 시간을 허락한다. 우리의 문제와 정념, 고통을 대면함으로써 폭발시키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다.


 1944년 마튀랭 극장 초연에서 마르타 역을 맡은 마리아 카자레스는 이런 말을 했다. “연극무대는 진실이 나타나는 장소다. 연습을 계속하다 보면 아주 기이한 순간이 찾아온다. 배우가 대본을 손에서 떼긴 했지만 아직 텍스트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순간이 그런 때이다. 그때 배우는 작위적인 것이 아니라 진정한 감동으로 – 자신 앞에 제시된 인물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이 감동이다- 만들어진 어떤 마음 상태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순간에 배우는 완전히 무장해제 된 듯 벌거벗고 멍청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카뮈는 바로 이런 순간에 배우를 더할 수 없이 존중해주고 참다운 애정으로 그를 따뜻하게 배려해주곤 했다.”


 서점의 어두운 조명 아래 각자의 자리에서(역에 몰입하기 위해 우리는 각자 한쪽 귀퉁이에 앉아서 낭독했다) <오해>를 함께 낭독한 우리는 그런 상태를 아주 조금 맛보았던 것 같다. 끝까지 사랑받지 못한 마르타가 혼자 바다 속에 들어갈 결심을 하는 걸 지켜보며 우리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을 때 말이다. 다음 희곡 낭독모임에서 같이 벌거벗고 멍청해질 준비가 되신 분, 안 계십니까?               


(by 밤의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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