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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Apr 10. 2019

<500일의 썸머> 우리 모두의 썸머

한 때 톰이었고, 썸머였던 우리들의 이야기

'사람이 미래다'라는 슬로건으로 유명한 한 대기업 광고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보단,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마세요.' 나도 모르게 그 문구가 뇌리에 박힌 탓인지 이후 몇 번에 연애에서 종종 그 말이 떠올랐다. 처음엔 나를 보며, 다음엔 상대방을 보며. 영화 <500일의 썸머>는 한때 톰이었고, 썸머였던 우리들의 연애를 그린 로맨스 아닌 로맨스영화이다.


기념일에 흔히 쓰이는 카드를 만드는 회사에서 재직 중인 톰과 썸머. 톰은 그곳에서 카드에 들어갈 문구를 만들고, 썸머는 사장의 비서직으로 일하던 중 톰은 남몰래 썸머를 마음에 품는다. 그렇게 홀로 호감을 가졌던 톰은 우연찮은 기회에 썸머와 가까워지게 되고, 회식에서 그녀와 묘한 기류를 풍긴 그는 이후 썸머의 키스로 그녀와 한층 더 가까워진다. 그렇게 썸머와 남몰래 비밀연애를 하는가 싶었던 톰. 그러나 썸머는 그에게 '나는 진지한 관계는 싫어'라며 선을 그어버리고, 데이트에 찐한 스킨십에 썸이라고 하기엔 다소 농도 짙은 두 사람의 관계가 톰은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운명을 믿는 톰과 사랑을 믿지 않는 썸머의 불확실한 연애는 썸머의 이별선언으로 막을 내리는가 싶더니, 회사 동료의 결혼식장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과연 도통 답을 내려주지 않는 썸머는 톰에게 있어 나쁜 여자이기만 한 걸까.

누군가 영화 <500일의 썸머>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톰이 불쌍하다가 두 번째에는 썸머가 이해되는 영화라고.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나도 이제 갓 스무 살이 되었던지라 도통 이 영화에 공감할 수 없었다. 200일에서 50일로, 300일에서 10일로 쉴 새 없이 오고 가는 영화의 서사도 그러하였고, 톰에게 좀처럼 마음을 내주지 않는 썸머가 못내 야속하였다. 한마디로 이 영화를 호구 같은 한 남자가 어장관리녀에게 치이고 치이는, 여자가 쓰레기와도 다름없는 그저 그런 멜로 영화로 치부해부린 것이다. 영화의 첫인상이 그랬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가 좋아하는 이동진 기자가 뽑은 로맨스 영화 1위라는 것도 당최 이해되지 않았으며 종종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현실 연애라는 것도 좀처럼 공감하지 못했다. 이 영화가 현실이라기엔 도저히 썸머가 이해되지 않았달까. 그러나 9년 후 스무 살에서 서른을 바라보는 지금 다시 만난 톰과 썸머는, 꽤나 현실적이었다. 어릴 땐 보이지 않았던 톰의 우유부단함과 썸머의 이중적인 속마음. 그리고, 그녀가 결혼을 결심한 이유까지. 어쩌면 어려서라기보다도 몇 번의 연애가 종지부를 맺으며 깨닫게 되는 일종의 연륜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나는 톰의 사랑보다 썸머의 자기방어에 공감이 가는 사람이 되고만 것이다.


이 영화를 전지적 썸머의 시점으로 본다면 이러하다.




회식에서 만취한 톰의 친구는, 톰이 썸머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썸머는 이를 다시 톰에게 물었지만, 톰의 대답은 어정쩡할 뿐이었고 그런 톰에게 '친구로서?'라고 되묻자 톰은 그렇다고 답해버렸다. 이후 썸머는 복사실에서 톰에게 먼저 키스를 했고, 그녀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연애는 그녀가 시작한 연애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둘이 레코드 가게에서 데이트를 하던 중 톰은 시종 링고스타를 좋아하는 썸머의 음악 취향을 장난삼아 웃어넘기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뮤지션에 대해서 '나도 잘 몰랐어'라며 말하는 썸머에게 '내가 들려줬잖아'라며 답한다. 둘이 함께 영화 '졸업'을 보았을 때, 썸머는 극장에서 나와 그 영화를 보고 여운이 가시지 않아 울음을 멈추지 못했고 그런 그녀를 보며 톰은 '괜찮아. 그냥 영화일 뿐이잖아.'라며 그녀를 달랜다. 썸머가 좋아하는 뮤지션을 톰은 시종 장난처럼 놀려댔고, 그녀가 영화를 보고 나와 울음이 멈추지 않았을 때 그는 맛있는 것을 먹자며 데려갈 것이 아닌 그 영화가 왜 그녀를 울게 만들었는지 물었어야 했다. 그러니까, 지금 그녀가 밥맛이 없던 것은 배고프지 않아서가 아닌 함께 있어도 외로운 이 남자와 더 이상 같이 있고 싶지 않아서인 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그렇게 펑펑 운 영화 <졸업>의 마지막 장면은 결혼식장에서 여자 주인공을 데리고 도망쳐 나온 남자와 그런 그를 무작정 따라나온 여자. 그리고 두 사람이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듯 웃음기가 사라진 채 멍하니 정면만을 응시하던 순간이었다. 마치, 세상에 둘만 남겨진 것 같던 찬란한 시기가 끝나고 서로에게 익숙해진 나머지 권태로워지는 연애의 말로처럼.


함께 싱크대며 가구들을 살펴보며 신혼부부처럼 장난을 치던 두 사람. 다소 들떠 보이는 톰에게 썸머는 나는 진지한 관계는 원치 않아라며 그에게 먼저 선을 그었지만, 그는 '알았다'라며 그녀를 이해하듯 넘어간다. 돌아서면 남인 연인 관계에서 우리는 헤어질 일 없다는 듯이 천진난만하게 구는 톰에게 그녀는 역설적으로 나는 진지해지고 싶지 않아라며 상대방에게 확신을 얻기 바랐지만, 톰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리 만무했다.


썸머와 술집에서 데이트를 하던 와중, 별안간 웬 남자가 그녀에게 추파를 던졌고 옆에 있는 톰은 남자친구냐는 그 남자의 말에 그저 친구라며 그 상황을 나서지 못하고 방관할 뿐이었다. 그러다 별안간 톰이 그 남자에게 주먹을 날렸는데 그 이유는 남자가 썸머에게 치근덕거려서가 아닌 톰 자신을 '찌질이'로 표현한 것에 분개했기 때문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그는 썸머에게 너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말하지만, 썸머는 날 위해서가 아니라 널 위해서라며 답한다.) 결국 크게 다투고 만 두 사람. 이후 썸머는 먼저 그의 집으로 찾아가 화해를 청하고 그 상황에서 톰은 '나는 너와 어떤 관계든 상관없어.'라며 마치 썸머를 배려하는 듯 말했지만, 이 시점에서만이라도 톰은 한발 더 나아가 그녀에게 직진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애인이랑 다름없어'라며 화를 내고 돌아간 남자의 집에 비를 뚫고 찾아간 여자가 들을 대답으로는 퍽 맘에 드는 대답은 아닌 것이다.


썸머는 그에게 이별을 고하고 그는 썸머와 다시 재회할 요량으로 회사까지 그만둬버린 그녀에게 메일을 보내지만 그녀는 '이제 정말 친구가 될 수 있겠지.'라며 답한다. 이후 직장동료 결혼식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다시 재회한 두 사람. 썸머는 그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고, 건축가가 꿈이었던 톰이 읽고 있던 '행복한 건축'을 핑계 삼아 말을 붙인다. 이후 결혼식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두 사람. 썸머는 톰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고, 톰은 운명처럼 썸머와 재회할 마음에 들떠 그녀를 찾아가지만 그가 들고 간 선물은 그녀가 좋아한 뮤지션의 앨범도 아닌, 보고서 펑펑 울어버린 영화의 DVD 내지는 O.S.T 앨범도 아닌 자신이 읽고 있던(자신이 좋아한) '행복한 건축'이었다.


그날 썸머의 결혼반지를 발견한 톰은 시간이 흘러 회사를 그만둔 후 평소 자신이 좋아하던 언덕에서 머리를 식히던 중, 자신을 기다리던 썸머와 재회한다. 톰은 썸머에게 '그날 결혼식장에서 왜 나랑 춤췄어?'라고 묻지만 썸머는 '그냥 그러고 싶었어.'라며 답한다. 그런 그녀에게 톰은 '그냥 춤이 추고 싶었구나.'라며 대답해버리지만, 썸머가 단순히 '춤'이 추고 싶어 이미 남이 돼버린 그에게 다가가 먼저 말을 걸고, 결혼식장에서 함께 춤을 추고, 자신의 집에 초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건 썸머가 톰에게 그리고 톰에게 미련이 남은 자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는 아니었을까.




이처럼 전지적 썸머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되려 썸머를 쓰레기라 욕하던 관객들은 절로 그녀의 태도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굳이 이처럼 세세하게 이럴 땐 이러했고 저럴 땐 저러했어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톰이 건축가의 꿈을 잊지 않도록 응원한 썸머와 그런 썸머를 마냥 괴짜로만 바라보는 톰의 시선은 이 연애가 왜 종지부를 찍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준다. 썸머의 파티에 초대되어 그녀의 친구들과 합석한 자리에서 친구는 톰에게 꿈을 물었고, 자신의 하는 일은 비록 카드에 문구를 쓰는 일이지만 사실 건축가가 꿈이라는 말 대신 마치 자신의 현재 직업에 대해 굉장히 만족해하는 듯한 대답을 내놓는다. 그런 그를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짓던 썸머. 그녀에게 있어 '건축가를 꿈꾸는 톰'은 톰의 어린 시절 로망이 아닌, 그녀가 그에게 쏟은 마음 중 일부인 것이다.


그렇다면 '썸머가 쓰레기네'라고 욕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톰이 쓰레기네'라며 욕을 해야 옳은 것일까. 마지막 썸머의 말처럼 그저 톰과 썸머는 서로가 서로의 짝이 아니었을 뿐이다. 사랑에 있어 확신이 없는 썸머와 순수하게 운명을 믿는 톰. 사랑에 있어 상처받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공허함과 허전함을, 사랑은 그저 아름답다고 믿는 톰이 알리는 만무했고 그런 톰에게 있어 쉽게 확신을 내주지 않는 썸머 역시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톰은 사랑이 아름답다고 믿었지만 그 사랑을 쟁취하는 것에 있어서는 운명보다는 행동이 먼저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썸머는 사랑은 없다고 말하면서도 사랑해주기를 바라며 애매하게 톰을 밀쳐냈다. 어쩌면 연애도 싫다던 썸머가 자신이 무슨 책을 읽는지 물어봐 주는 낯선 남자와 결혼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톰과의 연애를 통해 그녀가 느낀 어떤 무엇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사실 '난 사랑은 믿지 않아'라며 톰을 밀쳐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며 사랑이 있다고 믿고 만 것은 아닐까. 썸머는 톰을 사랑하지 않아서라기보다, 톰보다 자신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그와 헤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썸머는 일찌감치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톰이 사랑한 것은 자신이 아닌, 자신을 사랑하는 그의 모습 내지는 그저 '여자친구' 혹은 '연애 상대'일뿐이라는 것을. 그가 술집에서 낯선 남자와 주먹다짐을 하던 날, 그와 영화를 보던 날, 그가 그녀가 초대한 파티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그녀에게 선물로 준 그 순간, 그녀는 서서히 마음을 닫아버렸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마치 썸머가 괴짜였기 때문에 둘의 연애가 끝이 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듯 그녀가 서운해했을 모든 장면들을 영화의 엔딩으로 공을 들인다.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 나레이션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톰은 더 이상 운명을 믿지 않기로 했다고. 뜨거운 여름이 지나 선선한 가을이 오듯 톰이 용기 내어 데이트 신청을 건넨 여자의 이름이 'fall(가을)'인 것은 단순히 있어 보이기에 넣은 각본가의 재간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 <500일의 썸머>는 러브스토리가 아니다. 우리는 때때로 누군가에게 톰이었다가, 썸머였으므로.



같이 본 친구와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게 꽤 인상적으로 남는데,
영화를 보고 난 후 '썸머가 나쁘네'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이유는 그 친구가 영화를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어떤 연애는 이제 갓 생겨버린 상처와도 같고, 어떤 연애는 그 후에 굳어지는 딱지와도 같다.
연애에서 상처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썸머와 같이 속으로는 '날 사랑한다고 먼저 말해줘'라며 외쳐도 겉으론 먼저 상처받지 않으려 상대방을 밀어낼 것이고
상처보다 자신의 감정이 우선인 사람은 톰처럼 쉴 새 없이 '넌 그래서 어떤데'라며 질문할지언정 먼저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톰은 너무 이상적이었고, 썸머는 너무 현실적이었을 뿐이다.
단지 톰은 썸머를 이해하기에 둔했을 뿐이고, 썸머는 톰을 배려하기엔 이기적이었을 뿐이다. 

2019.04.09 Instagram에 남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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